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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윰윰 Jul 27. 2022

내 세상은 무너졌어, 붕괴 이후의 삶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하니까

내 세상은 두 개의 기둥으로 지탱되었다. 하나,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기대와 둘, 내가 특별한 사람일 거라는 막연한 기대. 스물 아홉을 지나 서른에 딱 들어서는 순간 나는 내가 특별하지 않다는 걸 뼈아프게 알았다. 서른 하나, 직장생활 7년차에 인간에 대한 기대마저 붕괴되었다.


인류애는 없는데 인간과 부대껴 산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고로, 내 글은 붕괴 이후의 세계에서 제대로 시작된 건지도 모른다.


요새 인간은 엉망진창이야, 오직 술만이 마음을 달래지. 라는 말을 나 혼자만의 유행어로 삼고 있는데 나 역시 인간에 포함되기에 이 대사는 곧, 조소 어린 자조이기도 하다.


순간 순간 나는 황폐하다. 내가 믿었던 세상이 무너져서다. 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본'이라는 걸 갖고 움직인다고 생각해왔다. 일을 시작할 때, 사람을 대할 때 인간이라면 무릇 '그래야 한다'는 기본 상식을 갖고 있었고 어긋남 없이 그 기준치에 맞춰 살아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나 소용 없었다.


본디 사람이란 종족은 저 자신이 가장 중요해서 스스로 객관화되지 않는 자들은 남탓하기 바빴고, 그 탓에 발전이 없으며, 사고와 시야는 협소하여 전체 그림을 보지 못하는데 바로 그렇기에 이해력도 현저히 떨어졌다. 자신의 모자람을 인정하려는 일말의 양심이 없기에 오만함과 갑질, 자신이 명석하다는 등의 '자기방어기재'의 벽은 두터워지기만 한다.


너무도 많다- 질리도록 많고, 한때는 대화를 시도해봤으벽에 부딪혀 나가 떨어지는  오로지  뿐이다.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목적성, 실현 방안, 프로젝트에 함께 들어가는 이들의 스케줄과 상황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일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뒤에 스케줄과 기획을 짜야 효율적이라는  그들 입장에서 기본이 아니다.


말을 했는데 YES 대신 의문문이 나온다는 건 그 질문자가 멍청하다는 뜻이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하는 것은 그 발화자가 어렵고 복잡하게 사건을 꼬아 생각하는 것이다. 이해하려는 의지도, 의욕도, 두뇌도 없기에 발전은 없지만 존버력은 높디 높다. 그들의 시야는 협소하기에 일이 어떻게 꼬이는지, 되게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관심도 없다.


그냥 닥치는대로 쳐내는 것이기에 효율은 없으며, 못하면 찡찡거릴 뿐인데 그 뒷처리는 또 다른 사람들이 해준다. 평생 그에 익숙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며, 말을 해봐야 입만 아프다. 애당초 대화란 게 성립될 수 없는 이와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는, 특히 협업해야 하는 사회구조는 암담하다.


나는 이제 이해시키고자 노력하고 싶지 않은데 실무단에서는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게 있고, 나는 비효율적으로 돌아가는 시스템을 극혐한다. 사전에 꼼꼼하게 체크되면 꼬일 일이 적은데 어차피 변동성이 많다는 이유로 마구잡이 주먹구구식으로 끌어가는, 뭐든 간단하고 하면 된다면서 어떻게 해야할지는 1도 고민해보지 않는 무뇌아들을 극혐한다.


이제 나는 100퍼센트가 아닌 40퍼센트의 결과물을 목표로 하나, 나의 40퍼센트는 그들의 200퍼센트 이상일 때가 많다. 실로 무력해지는 순간이다. 내 말을 이해할 거란 기대는 없지만 해야하기에 말이나 해보는 것이다. 그렇게 깎이고 깎이며 살아가는 게 인생이라는 수감생활일지도 모른다는 것은 퍽 서글프다.


한때 나는 '이곳'을 벗어나면, 혹은 '해외'로 간다면 달라질 거라는 일말의 기대를 갖고 있었는데 잃은지 오래되었다. 지금 이 비슷한 고민을 계속 하는 것은 내 세계가 산산히 부서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일 테다. 나는 인간에 대한 희망 비슷한 걸 갖고 있었는데 이젠 없다. 극히 일부에 해당하는 자들만이 일을 제대로 되게 해보았으며, 그들과 대화할 때만 속 시원하고 커뮤니케이션이 되고 동시에 슬퍼진다. 그들은 어느 곳에서나 고생하다가 저마다 병을 앓았고 나와 비슷하게 시니컬하다.


세상을 담담하게 쌓아가다 그 모든 기둥이 부서지고 내 세상이 황폐해졌을 때, 거기서 내 글이 시작된다면 나의 테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이쯤 부서졌으면 세상을 등질 만도 한데 나는 속세를 좋아한다. 팬시하고 스타일리시한 물질적인 것을 좋아하기도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을 좋아하고 나와 다른 이들 심지어 상처준 이들마저도 이해해보고자 노력한다. 불필요한데 그렇게 생겨먹어서 별 수 없다.


근래 가장 많이 느끼는 기분 상태는 서늘한 자조, 비애로운 해맑음이다. 인간으로 태어났고, 그런 자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다는 걸 알고, 바뀔리 없다는 걸 이미 다- 알면서도 분노하는 건 뇌가 있는데 왜 자기 객관화가 안 되는 거냐에 대한 분노일 테다. 어째서 남 탓만 해대기 바쁠까. 난 멘사 회원도 아니고 스펙이 화려하게 좋지도 않으며 IQ도 그냥 보통 수준이다. 허니 나 역시도 똑똑하지 않은데 나 정도 수준도 되지 못하는 이들이, 심지어 말도 못 알아 먹는 이들이 많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이들에 대해 말하는 것도 이제 입 아프고 지긋지긋한데 답답하니 말이라도 해봐야겠지. 질리도록 하다보면 하기 싫어질지도? 같은 말 반복하는 거 싫어하는데 또 그러고 있네 하는 자조가 든다. 때로 나는 인생이 수감생활처럼 느껴지는데 같은 죄수복 입은 것들을 못 견디는 거다. 웃기지, 어려서 나는 그런 말 안 통하는 자들을 돌멩이 취급했었는데... 다시 그래야겠다. 돌멩이들은 눈치채지 못하게 해맑은 팩폭러로 살지 뭐. 웃으며 뼈 있는 말을 해도 못 알아먹으니, 힘은 들지만 알아먹는 형태로 말을 해야하고 저들의 멍청함이 내게 줄 수 있는 텔런트들이 뭔지 생각해봐야겠다.


이해할 수 없으니 이용해먹기라도 하자-  분노할 때마다 글을 쓰는 건 어떨까. 시를 필사하고 글을 쓰고 노래를 듣다 보면 차분해진다. 오늘 그러했던 것처럼. 인간은 엉망진창이고 나 역시 엉망진창인 구석이 있지만 저들의 엉망진창인 것과는 다르다. 다름을 인정하자. 사람을 좋아하니까 저들도 날 좋아해주길 바랐던 모양인데 그럴 일은 죽을 때까지 없을 가능성이 농후하니 포기하자. 저들은 누군갈 좋아하질 못하고, 무의식 깊은 곳부터 자신에 대한 자아도취로 가득한 걸로 봐주자.


인간에 대한 이상도, 나는 남들과 달라야 한다는 일종의 특별함에 대한 환상도 모두 부서져버린 지금. 나는 나 역시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짐승 중 하나이며, 안 될 걸 알면서도 기대를 반복하는 한심한 자로 인지한다. 기대하지 말고 차라리 창조하자- 모든 게 부서져버린 세상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묘한 해맑음과 긍정을 갖고 살아가는 캐릭터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그 캐릭터로 내 세상엔 없는 '것'을 도전하고 이행해보자.


어려서는 캐릭터를 마구 죽이거나, 극한 상황에 몰아넣는 것만을 즐겼는데 딱히 별로다. 어려서부터 좋아했던 <아이러니>를 이용해보자. 영화 <시네마천국>에서처럼 영화감독이란 외적욕망은 이뤘지만 우정과 순수라는 내적욕망을 잃었을 때,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처럼 사랑의 미결이라는 내적욕망은 이뤘지만 죽음으로서 영원히 함께한다는 외적욕망을 잃었을 때 비애롭다. 무언지 모르게 자꾸 곱씹게 되고 헛헛한 기분이 드는 건 아이러니해서다.


나는 어떤 아이러니를 가져갈 수 있을까- 어떤 아이러니를 더 선호하는가 고민해봐야 하겠다. 결국 나는 사람을 좋아하고, 기대는 안 하는데 말은 하는 사람이어서 <캐릭터>가 내 글에선 무엇보다 중요하다. 덮어놓고 세상은 세상이기에, 인간은 인간이기에 아름답다는 주장해대는 이상주의를 혐오하며, 눈물이나 짜내라고 외쳐대는 신파는 극혐한다. 인생 살기도 힘들어죽겠는데 힘들다고 찡찡거리는 골방문학이나 팍팍한 현실을 담은 콘텐츠도 싫다. 현실에 살짝의 판타지를 가미한, 붕괴되어버린 세상에서 그 모든 붕괴를 알고도 한 발씩 나아가는 그런 자들이 좋다. 나의 글은 그런 자들을 위하여, 그런 자들을 담아내기 위해 끝없이 갈고 닦아 질테다. 이것은 예언이며 동시에 다짐이다.


멍청한 것들과 부대끼는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전업 작가가 되어야만 한다. 이미 너무도 많이 봐서 지겹고, 나는 이제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죽은 자들과 향락어린 시간을 보내고 싶다. 물론, 현실에 발 딛고 살아야만 하겠지만 몇 시간만 그러고 몇 시간은 나를 위해 쓰고 싶은 것이다. 해봐야지- 해보아야 한다. 이 지긋지긋한 지리멸렬함을 탈피하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내가 인간이고, 유한한 삶을 살아가나 죽는 순간까지 이 삶과 세상이라는 족쇄와 감옥을 벗어날 수 없는 수감자 신세라는 걸 인정하면서 툴툴대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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