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툰 Dec 05. 2024

되찾은 거지 같지만 소중한 일상

  ***

  간밤에 지켜본 TV 속 상황은 긴박했다.


  그 동안 우리 실제 삶과는 관계없을 거라 여겼던 '비상, 계엄, 군인, 진입, 점거'라는 표현들이 불안감을 더욱 자극했다.


  이런 장면을 실시간으로 보게 될 줄이야.


  놀라운 일은 '월드컵 4강, 빌보드 1위, 아카데미, 노벨상 수상'까지 본 걸로도 족하다구.



아빠,
왜 저러는 거야?
내일 나 학교 갈 수 있어?



  함께 TV를 보던 초등학교 3학년 짜리 딸도 불안해하고 있었다. 이런 걸 산 교육이라고 하기에도 그렇고, 도무지 어떻게 설명해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저 말없이 곁에 있던 딸을 꼬옥 끌어안아줬었다.



  ‘그러게 일찍 좀 자지. 지금 밤 12시다, 이 녀석아.’




  ***

  그러다가 문득 헛웃음이 났다. 불과 몇 시간 전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퇴근 직전까지
데이터 오차를 맞추던 일,

내일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는
부서장 심기가 어떨지 고민했던 일,

금요일이 휴가라서
밀린 일들로 노심초사했던 일 등등.



  날 신경 쓰이게 했던 그 모든 일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다. 그때 내 눈앞에 벌어지고 있던 상황에 비하면 말이다.


  정말 그랬다. 자칫 잘못 흘러가면 상상 못 할 비극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에 비하면 직장 스트레스는 문제도 아니었다. 그날 하루에만 같은 내용의 자료를 매번 다른 양식으로 5번 넘게 만들어줬지만,


  그게 무슨 대수인가?


  아니, 몇 번이고 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몇 시간 전까지의 평범한 일상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내 거북목과 터널증후군 따위!




  ***

  새벽녘에 잠들었다가 깨어난 아침,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마치 숙취라도 있는 것처럼.


   그래도 다행스럽게 어제의 상황은 순리에 따라 정리가 되어 있었다. 걱정했던 큰 위기는 넘긴 모양새였다. 그렇게 안심하고 출근하는 길에 드는 생각은?




  휴가 간 부서장
오늘 출근하는데 기분 어떨까?

이번 주 휴가 가기 전까지
밀린 일 다 마무리 지을 수 있을까?



  잠시 잊고 있었던 아니, 어젯밤까지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던 고민들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훌쩍 커져서.



  죽지도 않고!





  ***


왜 별로 안기쁘지?
왜 이렇게 기분이 가라앉지?



  그날 나는 출근을 하는 내내 의아했었다. 당시에는 영문모를 일이라고만 여겼는데 되짚어보니 그게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큰 문제가 해결되고 나자 곧바로 내가 처한 현실 자각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평온한 일상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더 할 수 있을 것 같다던 그 작업’을 진짜로 또 하게 됐다.


  과연 이것이 내가 그렇게도 되찾고 싶었던 일상이었을까?


  그래, 맞다. 분명히 맞긴 한데 썩 기쁘지는 않은 이 기분.


  글쎄,


  굳이 표현하자면?



  다시 돌아온
소중하지만 거지 같은 일상



  바로 그것이었다. 실상 따져보면 내 일상도 그다지 평온하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잊지 않아야 할 것은 분명히 있다. 우리의 일상은 때때로 거지 같아도 기본값은 '소중함'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사실 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