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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툰 Sep 18. 2023

인수인계 지옥! 후임자 A/S 기간은 언제까지일까?

여보세요, 나(후임자)야. 거기 잘 지내니?

  01. 그 놈 메시지


  운동을 마치고 사물함에서 휴대폰을 꺼내보니 문자 메시지가 들어와 있다. 카톡 메시지가 아니라 문자 메시지다. 그렇다면 짐작 가는 사람이 있다.


© john_tuesday, 출처 Unsplash


  설마 오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발신자를 확인하자 아니나 다를까 후임자로부터 온 메시지이다. 이 사람은 전임자 괴롭히기로 악명 높은 사람이었다. 


  자리가 바뀌고 나서 수개월이 지났음에도 시시콜콜한 일상 업무까지 확인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기도 했고, 타 부서로 발령 난 사람에게 전화해서 매일 하루 1시간 이상 통화하는 것은 내 눈으로 직접 보기도 했었다. 내가 휴직을 내면서 가장 꺼림칙했던 일 중 하나가 그 사람이 내 후임자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일반적인 부서이동이 아닌 휴직을 나간 사람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이었을까? 


  과거에 내가 목격했던 것과는 달리 전화를 하는 대신 늘 문자 메시지로 질문을 하곤 했다. 문제가 있다면 출근을 하지 않은 지 한 달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 연락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인데, 나는 이걸 또 전화가 아닌 문자라고 고마워하고 있었으니 나란 사람도 참 나인 것이다.


  


  02. 사람 쉽게 안바뀐다.


  휴직을 나온 직후에는 한동안 연락이 없길래 '그새 사람이 바뀌었나?' 했지만 순전히 착각이었다. 조금씩 연락이 오기 시작하더니 이젠 편해졌는지 지난주부터는 매일 아침 굿모닝 인사처럼 연락이 오고 있는 것이다.


  문자가 들어오는 시각은 항상 오전 9시 5분 경이다. 미루어 짐작건대 출근해서 커피 한 잔 하고, 본격적인 업무 시작 전에 질문부터 던져놓는 모양이었다. 늘 그렇듯이 오늘 받은 메시지도 2통이 연달아 들어와 있었다. 엑셀 파일 열어놓은 자료현황 사진 하나, 그에 대한 질문 하나.



© kelli_mcclintock, 출처 Unsplash


  [긴급] 서 과장, 팀장님이 급히 묻는데
  이 내용 알고 있어?

  긴급은 무슨 얼어 죽을 긴급. 우리 하는 일 중에 긴급 아닌 일이 어딨다고.


  서 과장, 잘 쉬고 있지?
  이런 메일을 받았는데 혹시 알고 있는 내용 있어?

  설마 내가 잘 쉬고 있을까 봐 걱정돼서 문자 하는 건 아니겠지? 이건 저의가 있을까 봐 좀 무섭다.


  서 과장, 미안한데 내가 작성한 내용 첨부했어.
  자료는 이대로 내면 되겠지?

  정말 미안하면 진심을 다한 그만한 액션을 보여야 믿지. '옛다 파일! 맞지, 그거?' 하면 하나도 안 미안해 보인다고.


  문자 내용을 보고 있자면 내가 이 사람의 전임자인지, 멘티인지, 결재자인지 혼동될 때가 있다. 처음엔 도망치듯 휴직계를 던지고 나온 것이 미안하다는 생각에 괜히 찔려서 제깍제깍 답해줬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 구질구질했다. 헤어진 연인 사이도 아니고 말이다.


  내가 가장 기분 나빴던 것은 이 사람에게 나에 대한 존중과 예의가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서부터였다. 휴직을 나오고 나서 1~2주 정도는 내가 답을 해주면 '고맙다'고는 하는데, 언젠가부터는 '이건 아니다'싶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고맙다는 인사는 형식적인 것이고, 이 사람은 작은 것 하나 스스로 알아보는 노력도 없이 나부터 찾는다는 게 느껴진 것이다.




  03. 법아, 도와줘


  참다못한 나는 인터넷에서 '근로기준법'을 검색해 보았다. 후임자의 인수인계 요구를 당당하게 거절할 수 있는 규정이 있는지 찾아보려 한 것이다. 아쉽게도 근로기준법에 인수인계나 퇴직과 관련한 규정은 없었다. 대신 실무에서는 민법 제660조를 준용하여 판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사용자인 사측이 계약해지를 통고할 경우, 1월이 경과하면 해지의 효력이 발생한다는 규정이 명시되어 있다. 내가 근무하는 곳도 휴직 혹은 퇴직 통보를 하게 되면, 1월 경과 후 그 효력이 발생하였다. 또한 이조차도 고용자인 사측 입장만을 반영한 것이고, 피고용자가 원한다면 그보다 빠르게 회사를 떠날 수도 있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이 '1월' 즉, '30일'이라는 기간이다. 우리나라 회사는 통상 '30일'이라는 기간 안에 인수인계를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그렇게 굴러가고 있다는 것이다. 30일 정도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기간이다. 실제로 나 역시 휴직계를 낸 뒤, 사내 규정에 따라 30일 뒤에 출근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내 후임자는 그 30일이라는 기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그래놓고 내가 휴직을 나가고  달이 지난 지금까지 문자질을 해대고 있는 것이다.




  04. 나 어떡해?


  굉장히 무례한 겁니다.

  최근 가장 스트레스 받는 일을 묻길래 이 일에 대해 털어놨더니 상담사는 그렇게 말했다.


  - 막말로 그 사람이 서툰 씨에게 자기 월급이라도 나눠주나요? 그런데 그 사람은 왜 그렇게 당당하게 요구하고, 왜 서툰 씨는 거기에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하는 건가요?


  사실 나는 최근 후임자의 업무 연락이 잦아져서 굉장히 괴로웠고, 그로 인해 공황장애 초기증상까지 경험했다. 물론 후임자는 그런 사실을 꿈에도 모를 것이다. '당신이 보내는 문자 때문에 공황까지 오려고 한다' 라고 하면 황당해하며 웃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회사 업무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휴직을 나간 사람에게 그 업무에 대해 집요하게 물어보면 스트레스가 클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이다.


  - 따끔하게 경고 메시지를 보낼까요? 아니면 차단을 할까요?


  상담사의 말에 힘을 얻어 전의를 불태우는 내게 상담사는 웃으며 말했다.


  - 문자를 보지 마세요. 아마 그렇게만 해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알아들을 거예요.


  과연 그럴까? 내가 아는 그는 결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닌데 말이다.




  05. 드디어 해방인가!


  상담을 받은 그날도 문자는 들어왔다. 그리고 그다음 날에도. 문자내용 앞에는 '긴급'이 붙어 있기도 했고, 의례적인 인사말 대신 업무내용부터 두괄식으로 적혀 있기도 했다. 내가 문자를 읽지 않더라도 미리보기 내용만 보고 질문 요지를 알 수 있도록 머리를 쓰는 듯했다.

  

  '이런 쪽으로는 참 비상하다, 비상해.'


  나는 나대로 내용을 확인하고 싶은 욕구를 어렵게 참아가며 며칠을 보냈다.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 됐냐고? 놀랍게도 약 일주일 째 그의 문자가 오지 않고 있다.



© miguelalcantara, 출처 Unsplash
나는 이제야
그의 인수인계 지옥에서
벗어난 것일까?

  어떻든 이제는 상관없다. 그가 개미지옥 같은 함정을 만들어놓더라도 나는 더 이상 대응하지 않을 테니까. 만약 그가 따져묻는다해도 나는 그의 질문에 답할 의무가 없으며, 그가 내게 당당히 요구할 권리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나를 지켜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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