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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툰 Sep 12. 2023

내가 나에게 보내는 SOS 신호

내 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봐

  01.


지금 몹시 화가 나 있어요,
서툰 씨는. 


© priscilladupreez, 출처 Unsplash


  내가 휴직을 신청하기까지의 과정을 듣던 상담사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러한 상담사의 반응에 어리둥절해졌다. '화가 났을 수 있겠다'는 표현까지는 몰라도 '화가 나있다'는 것은 '실제로 일어난 사실'을 단정하는 것이지 않은가.


  - 저는 분노라는 감정을 느껴본 적은 없어요. 그때도, 지금도. 서운했다면 모를까.


  나는 머릿속으로 휴직 당시의 상황을 천천히 되짚어본 뒤 그렇게 말했다.


  - 아니요, 서툰 씨는 화가 나 있어요. 그것도 굉장히 많이.


  그녀는 다시 한번 단호한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왜 그걸 모르느냐는 듯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나는 오히려 그녀에게 반감이 들었다. 가령 그녀가 가진 상담 매뉴얼에는 '이런 상황에서는 분노'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왜냐하면 나는 정말이지 하늘에 맹세코 화가 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 중요한 순간에 자신에게 등 돌린 업무 파트너, 상대 입장 고려 안 하고 계속해서 과중한 업무지시를 내리는 상사, 휴직을 낸다는 얘길 듣자마자 그 자리를 뺏다시피 차지한 선배까지. 화날 일 투성이지 않은가요?


  - 제가 화를 느끼는 역치가 높은 편일 수도 있겠네요.


  - 아니오. 만약 그렇다면 서툰 씨는 왜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고, 이곳에서 심리상담을 받고 있을까요? 몸상태가 이상해서 병원을 찾아가는 차 안에서 가슴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고 했죠? 


  - 그렇습니다.


  - 그것이 바로 명백한 분노의 증거예요. 폭발시키지 못하고 참고 참았던 감정이 신체증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죠. 저는 그러면서도 서툰 씨가 자신이 화가 나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는 게 의아할 뿐입니다.


  - 글쎄요. 서운한 감정은 있었던 게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라도 그들의 입장이었으면 그랬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어요.


  - 서툰 씨는 사람을 맘 편히 미워하지도 못하는 분이로군요.


  그녀는 '이걸 어쩌지'하는 난감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02.


  - 서툰 씨는 그들을 미워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있어요. 


  이쯤 되니까 그녀가 생사람을 붙잡고 내 화를 돋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만 그녀의 말에 설득되는 것이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그녀의 말은 상당 부분 일리가 있었고, 객관적 정황들을 고려했을 때 '나는 화가 났다'라고 보는 것이 온당했다. 아직도 심정적으로는 내 감정에 대한 의구심을 완전히 지울 순 없었지만.


  또한 그녀는 내가 '배려한다'라고 믿고 있는 것이 '회사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러면서 더 이상 회사를 배려할 필요도, 눈치 볼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혹시 내가 잊었다고 생각한 것일까? 다시 한번 지금의 내 감정에 대해 규정지어주었다.


  나는 지금 '몹시 화가 나 있는 것'이라고.


  하지만 정작 내가 그것의 정체를 모르고 있기에 감정들을 표현할 길이 없다고 했다. 표현하지 않으면 감정들은 신체증상으로 표출되기 시작한다고. 번아웃이나 공황장애의 형태로 말이다. 그런 내부의 압력이 커지면 과부하가 걸릴 수밖에 없다. 그러다 마침내 나를 버티게 했던 마지막 끈이 끊어진 날 급히 병원을 찾았으며 휴직 신청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03.


  나는 내 감정과 기분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을 통해 전해 들어야 하는 현실에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알리 없는 상담사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 그때 '이상하다'라고 생각이 들었던 건 정말 천운이었어요. 서툰 씨처럼 자기감정에 무심한 사람은 그냥 넘어갔을 수도 있거든요. 그 타이밍에 병원에 간 것도, 휴직을 한 것도 운이 좋았습니다. 이번에 휴직을 내지 못했다면 정말 큰일이 났을 수도 있을 거예요. 여기에 서툰 님이 스스로 찾아오는 일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에 의해 실려왔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이 부분만큼은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의 내 상황을 고려해 보면 정말 그랬을 것이다.


  - 지금 직장에서 일한 지가 얼마나 되셨죠?

 

  - 16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 그동안 서툰 씨 안에 있는 진짜 서툰 이 끊임없이 말하고 있었을 거예요. 그만하자고, 그만해도 좋다고. 쉬고 싶다고 말이에요. 그런데 그 부탁을 10년이 넘도록 무시하고 있었던 거죠.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어서야 쉬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 nikkotations, 출처 Unsplash
그러니까 서툰 씨는
 내가 나에게 하는 부탁을 
처음 들어준 거예요.




  '맞아요, 상담사님...! 제가, 제가 그렇게 살아왔어요.'


  그녀는 내가 그렇게 오열하기라도 바란 것일까? 다소 격앙된 톤으로 마지막 한 마디를 한 상담사는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내 감정을 끌어내기 위한 회심의 멘트라는 것이 너무도 적나라하게 느껴졌기에 나는 민망해졌다.


  - 음, 그럴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런 것 같아요.


  그녀는 그게 전부냐는 듯한 표정으로 약 3초간 나를 더 응시했다. 그러고는 이내 틀렸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의자에 등을 붙이고 앉았다. 다음 주 같은 요일, 같은 시각에 보기로 예약을 한 뒤 그날 상담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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