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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아, 네가 세상을 구했어 / 블랙박스 위크

by 프롬서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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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는 내내 블랙박스의 주간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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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이후로 매일 자동차 정비소로 퇴근하고 있습니다.


화요일에 새로 바꾼 블랙박스가 정상적으로 작동을 하지 않았거든요.


수요일에 오라고 해서 가봤지만 오작동이 있을 때가 아니면 원인 파악이 어렵다는 말만 듣고 되돌아왔습니다.


'설정을 하나 변경해 봤는데 또 안 되면 내일 오세요. 다 갈아엎어서라도 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또 가게 되었죠.




어쩜 그렇게 살아?


그걸 왜 참아?
엎어버려.

제 얘길 들으면 누군가는 그런 말을 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남의 얘기는 쉽게 하는 사람 많잖아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댓글을 보면 대단들 합니다.


'당장 이혼하세요.'


'나 같으면 뛰어내렸다.'


어쩜 그렇게 사냐는 거죠. 알고 보면 자기도 그렇게 살고 있으면서.




누가 그린 기린 그림인가?


사장님이 맘 편하게 정비할 수 있도록 저는 한쪽에서 신문을 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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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피라도 좀 드릴까요?


- 괜찮습니다.


마시겠다고 했다면 아마 지금쯤 제가 앉았던 테이블 위에는 빈 이디야 커피 봉투가 하나 더 던져져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신문을 보기 지루해질 무렵, 정비소 한 쪽 벽에 걸린 수채화 그림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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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과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있는 걸 보면 아마 동물원인 모양이에요.


- 자재분이 그리신 건가 봅니다.


- 아, 그거요. 허허, 우리 애가 그린 거.


- 그런 것 같더라고요.


- 지금은 고등학생. 미술 합니다.


- 그러시구나.




이야기는 위대해


그 그림은 이미 수요일에 본 적이 있었습니다.


혹시나 또 오게 된다면 물어봐야지 했는데 정말 또 오게 될 줄은 몰랐네요. 그것도 이렇게 빨리.


'엎어 버릴까?'


만약 저에게도 그런 분노가 일었다면 그 그림을 보자마자 다 풀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서사의 힘이 아닐지.


그 그림을 보자마자 아버지와 아이 사이에 있을 법한 많은 이야기와 감상이 떠올랐거든요.




그래도 지구는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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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쪽 벽엔 자동차 그림도 액자에 들어 있더군요. 색연필로 그린 것 같았습니다.


그 그림에 대해선 다음번에 물어봐야겠어요. 그때는 몇 년쯤 뒤면 좋겠는데.


- 다 됐습니다. 배선을 완전히 바꿨으니까 이제 잘 될 겁니다.


- 감사합니다. 내일은 보지 말죠, 사장님.


다행히 블랙박스는 잘 작동하네요.


잘 돌아갑니다, 세상.


아무것도 엎지 않고, 갈라서지 않고, 뛰어내리지 않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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