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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툰 Oct 05. 2023

현실이 지옥인데 추억이 무슨 소용?

  01.


  지난 여름, 우리 가족은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전주 호캉스 이후로 3개월 만이다. 그 전주 호캉스는 부산 호캉스 이후 약 3개월만에 간 것이었다. 물론 그 이전의 호캉스도 있었다. 아마 담양으로 기억한다. 그 중 한 번은 가족행사였다고 치더라도 최근 1년 동안 분기별로 한 번은 여행을 간 셈이다.


© uguareschi, 출처 Unsplash


  그만큼 아내와 딸 아이는 여행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 정말 즐겁고 행복했다며 여독이 채 풀리기도 전에 다음 번 여행을 꿈꾸곤 했다. 그 곁에서 왠지 못마땅해 하는 내 눈치를 보면서 말이다.


  나도 여행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아니, 너무 좋다. 왜 좋지 않겠는가. 호화스러운 호텔에서 2~3일만에 한 달 생활비의 3분의 1을 넘게 쓰는데 안 좋기가 더 힘들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우리 주머니 사정에 그럴 형편이 되느냐의 문제는 둘째치고, 여행의 효용에 대한 근본적인 의구심을 갖고 있다.




  02.


  먼저 이것부터 생각해보자. 가족과 타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온다고 했을 때, 다음의 보기 중 하나라도 실현 가능한 것이 있는지를 말이다.


  첫째, 부서장 보고를 앞두고 발광하는 팀장의 모습이 귀여워 보일까?

  둘째, 쌓여있는 메일함을 보고도 부담감이 좀 덜할 수 있으려나?

  셋째, 누군가 선의로 대신 처리해준 내 업무가 단 하나라도 있을까?


© CoolPubilcDomains, 출처 OGQ
  어림없는 소리!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내 경우에는 저 셋 중 무엇도 해결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기분 전환을 하면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하는데 나 같은 사람은 그 말이 통 이해가 안된다.


  술을 마시고, 폭식을 하고, 여행을 가는 것으로 스트레스가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스트레스의 원인이 해결되어야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게 이치에 맞지 않을까?




  03.


  출근하자마자 일주일 전에 제출한 보고서의 디테일한 수치를 따져 묻는 팀장, 공중화장실 뚜껑 닫힌 변기만큼이나 열기 두려운 메일함, 누구든 대신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한이 임박할 때까지 아무도 손 대지 않은 잔업무들까지.


  팍팍한 현실은 아무 것도 나아진 게 없는데 잠시 마취주사를 맞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게다가 그 마취 지속시간은 너무도 짧다. 그래,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다 깰 만큼이나 짧다.


  '내일 출근해서 뭐부터 해야하더라?'


  비행기가 착륙하기도 전에 그런 생각이 드니까 말이다.


  그런 면에서 여행은 사치품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기분은 괜찮게 해주는데 실상 현실적으로 해결되는 문제는 없는 것이다. '기분'이라는 것도 곧 휘발될 것이고, 내 통장엔 현저히 감소된 잔고만 명징하게 직조돼있을 뿐이다.


© ml1989, 출처 Unsplash



  04.


  월월월월월월월!!


  전에도 말했듯 이건 개 짖는 소리가 아니다. 일주일이 모두 '월요일' 같던 지옥 같던 시기, 그 날도 야근은 확정이었다. 당시에 야근은 당연한 것이고, 오히려 정시퇴근이 이례적인 일이 되어버렸다.


  아직 1번 과제도 해결못했는데 중요도가 더 높다는 2번 과제가 떨어지고, 1번, 2번 과제를 동시에 진행하려하는데, 사실은 이게 가장 시급한 거라며 3번 과제에 대한 지시가 내려오는 식이었다.


  3번 과제가 마무리 될 때쯤 긴장이 풀린 부서장은 갑자기 떠오른 1번 과제 진행상황에 대한 질문을 한다. 이때 3번 과제를 하느라 보류 중이라고 답하면, 부서장 지시를 무시하는 거냐는 질책이 돌아오는 것이다.


  이런 반복이 수개월째 계속 되고 있었다. 거기에는 크게 부당하거나 틀린 지시는 없었다. 문제는 나 혼자서 그 모든 업무를 완성도 있게 해내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을 뿐.




  05.


© Violetta Deepova, 출처 OGQ


  저녁 식사 시간에 혼자 사무실을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차 빼서 조용한 곳으로 옮겨 주차했다. 나는 인적 없는 곳에 차를 세운 채 멍하니 차창 밖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지말자.
조금만 더 버티자.


  그렇게 마음을 다 잡았다. 당시에는 그것이 나의 저녁 루틴이다.


  그러다 문득 2주 전, 가족과 함께 다녀온 제주도 여행이 떠올랐다. 에메랄드빛 협재 바다 백사장에서 소라게를 발견하고는 딸아이와 즐겁게 웃었던 기억 말이다. 러고보니 과 2주만이었다. 내 처지가 천국과 지옥으로 뒤바뀐 것은.


  그때 바닷가에서 나는 딸 아이 손에 새끼손가락 손톱만큼 작은 소라게를 올려주면서 세상을 다 가져다준 아빠가 된 기분이데 말이다.


  아니, 이럴 수가.


  방금 전까지만해도 죽상을 하고 있었을 내가 어느 새 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룸미러로 확인하니까 진짜로 나는 웃고 있었다. 얼마만에 웃어보는 것인지. 


  '고마워, 소라게. 덕분에 잠시 견딜 수 있었어.'


  왈칵, 눈물이라도 쏟아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추억이..
효과가 있긴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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