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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툰 Sep 05. 2023

불가항력적 휴직


  01.


  '금요일 점심시간'이란 직장인에겐 남다른 의미가 있다.



© sonance, 출처 Unsplash


  커피로 각성하며 어렵사리 맞이한 '점심시간'도 기분 좋은데, 거기에 '금요일'까지! 


  좋은 거 위에 좋은 걸 엎은 데 덮은 격이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해보자면 이렇다. 회사 근처 맛집에서 점심식사와 커피를 즐기고 나서 몇 시간만 때우면 곧 퇴근할 수 있는데, 퇴근하고 봤더니 지금부터 주말이란다. 기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02.


  공교롭게도 '문제의 그날'도 금요일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즐거운 날이었겠지. 하지만 나는 달랐다. 입맛이 없어진 탓에 점심을 거른 것이 수개월 째였으니까. 이렇게 얘기해놓고 보니 내 미각에 미안한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금요일이라고 해서 특별히 좋은 게 있냐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물론 금요일이 싫다는 건 아니다. 나도 주 5일 근무를 하는 월급쟁이로써 주말이라면 환장하는 사람이고, 얼마 전까진 그것만 바라보고 살았었으니까.



© alvarordesign, 출처 Unsplash


  그러나 최근 몇 주 동안은 별로였다. 왜냐하면 나에게만 맡겨진 '끝나지 않는 프로젝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월월월월월월월!


  이건 개 짖는 소리가 아니다. 내가 주 7일을 모두 월요일 같이 살고 있다는 뜻이다. 3주 동안 야근을 30시간 가까이했었다. 그것이 금요일 오후도 설레지 않게 된 이유이다.




  03.


  사실 그렇게까지 에너지 쏟을 일도 아니었다. 정말 그랬다. 개인 프로젝트라 한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일주일 정도면 끝났을 일이었다. 현실적으로는 만들기 어려운 데이터를 추가하라는 팀장의 계속된 지시와 타 부서의 업무태만만 없었다면 말이다.


  앞서 말했던 '문제의 금요일'을 하루 앞둔 날, 이미 나는 결과 보고서 제출기한을 일주일이나 넘겨버린 상황이었다.


© berkeleycommunications, 출처 Unsplash


  - 아니, 이게 이럴 일이에요? 저희가 너무 어려운 과제를 요청한 건가요?


  자료를 요청한 상위부서에서는 담당인 나에게 직접 연락이 와서 독촉했다. 그리고 제출이 늦어지는 이유를 따져 물었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이다. 내가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거기에 대고 부서장 탓, 타 부서 탓을 하자니 그것은 또 프로페셔널하지 못한 태도 같았다. 멋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 말이다.


  그저 "죄송합니다. 내일까진 꼭 드리겠습니다."라는 지킬 수 없는 약속만 반복할 뿐이었다. 써놓고 보니 이 멘트도 그다지 멋있어 보이진 않는 것 같다.




  04.


  그렇게 시나브로 상부에서 마지노선으로 정한 데드라인이 도래했다. 상부 담당자는 그날까지도 못 내면 직무감찰까지 각오하라는 식으로 날 윽박질렀다.


  하지만 큰 걱정은 되지 않았다. 그간의 진행상황을 보면 시간에 맞춰 자료를 낼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렇다, 거의 100% 확실했다. 때문에 그날은 출근하면서 모처럼 마음이 가볍다는 착각까지 들 정도였다.


© CoolPubilcDomains, 출처 OGQ


오늘부로
지겹고 긴 노(No) 답 터널을 벗어나서
일상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조차도 나만의 과도한 욕심이었다. 금요일 점심시간 직전, 나는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돌연 최종 자료를 줄 수 없다며 퇴짜 놓는 타 부서는 둘째 치고, 부서장이 보고서 내용을 더 보충하라는 터무니없는 업무지시를 내리고 출장을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05.


팅~

  내 안에서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어떤 끈이 끊어진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그게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그때부터였다. PC 모니터를 쳐다보던 내 가슴이 심하게 뛰기 시작한 것은. 마치 심장 혼자서 100미터 달리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어?


  왜 이러지?


  이상하다?


© tjump, 출처 Unsplash


  심각한 문제의 전조임이 감지되었다. 급히 PC를 끄고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책상 위 서류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동료들과 직속 선배에게 휴가를 나가야겠다고 얘기했다. 추가 업무지시를 받은 데다가 갑작스러운 휴가였지만 나를 만류하는 아니, 만류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팀장에게 한 달 가까이 시달리는 모습을 봐왔기 때문일 것이다. 


  - 그래, 부서장 없으니까 결재도 안되는데. 주말 동안이라도 푹 쉬고 와.


  그동안 나를 격려해 주던 동료들도 내 노고의 결말이 이다지도 형편없다는 사실에 모두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휴가를 나가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는 아마도 출장 가는 고속도로에 있을 부서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 부서장님, 컨디션이 갑자기 안 좋아졌습니다. 출장 중에 이런 말씀드려 죄송하지만 오후에 휴가 좀 다녀오겠습니다.


  이 와중에도 부서장에게서 휴가 허락을 받아야 하는 처지라는 사실이 내가 얼마나 무력한 위치에 있는지 체감하게 해 주었다.




  06.


사람 얼굴이 그게 뭐야?
내일이라도 당장 휴직 내!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자마자 내 얼굴을 본 아내가 화가 나서 말했다. 근 한 달 동안 죽상을 하고 나가서 밤늦게 돌아오는 걸 봐왔으니 내 속이 어땠을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대고 '여보, 내일은 주말이야.'라는 대꾸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 그보다는 병원부터 가봐야겠어. 몸이 좀 이상해.


  나는 집 근처 정신과에 전화했다. 지금 당장 진료가 가능한지 알아보고, 가장 빠른 시간을 예약해서 곧장 병원을 찾아갔다.



© goldcircuits, 출처 Unsplash
번아웃.. 이요...?

  TV를 통해 혹은 동료들과 농담처럼 말로만 주고받았던 번아웃.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그 말을 의미 없이 몇 번 반복해 보았다.


  번아웃,

  

  번아웃이라..


  여러 차례 입 밖에 꺼내봐도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07.


  - 일찍 잘 오셨어요. 조금만 늦었으면 심리적인 증상에서 그치지 않고, 신체 증상으로도 나타나기 시작했을 거예요.


© cdnpagesca, 출처 Unsplash

  내 상황을 들은 의사는 딱하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 신체증상으로 나타난다면 어떻게...?


  지금 내 상태가 심리적으로 불안하다는 건 이해하겠는데 이게 신체증상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는 부분은 의아했다.


  - 흔히 공황장애라고들 하죠? 서툰 씨는 지금 공황장애 직전입니다.


  공황장애? 이것도 말로만 듣던 병명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단어를 입 밖에 내기도 전에 의사의 질문이 이어졌다.


  - 그다음 단계는 뭔지 아시나요?


  - 모르겠습니다.


  번아웃도 당황스럽고, 공황장애도 오늘 처음 들은 얘기인데 굳이 다음 단계까지 알아야 하나? 의사가 나를 약 올리기라도 하는 것 같아 조금 기분이 나빠지려고 했다.


  - 혹시 상상되는 게 있으실까요? 책임감이 강한 분이시라 참으셨겠지만 아마 그런 생각이 들었을 것 같은데요. 매우 안 좋은 선택.. 하지만 그 생각이 분명히 났을 거예요. 말씀해 보시겠어요?


  기분이 상하면서도 의사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있었다. 휴가를 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계속 생각났던 것, 그러면서도 떨쳐내려 노력했던 그 불온한 단어. 그 단어를 머릿속에서 지울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병원으로 온 것이었다.


  - 맞아요..


  - 뭐였나요? 서툰 씨가 스스로 병원에 오시면서 생각했던 것.


  의사는 왜 기어코 내 입을 통해 그 얘길 듣고 싶어 하는 걸까? 하지만 내가 그 말을 해야 이 대화를 끝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 devasangbam, 출처 Unsplash
자살..

  - 맞습니다.


  의사는 자신의 퀴즈를 맞힌 저에게 상품이라도 주듯 약을 처방해 줬습니다.


  - 2주 뒤에 다시 오세요.




  08.


  회사 사람들은 나에게 묻는다. 어떻게 휴직할 용기가 났냐고.



  아무리 세상이 좋아졌다한들 그래도 남자가,

  후임자도 없는데,

  아직 한창때인데,

  승진 점수관리도 해야 할 텐데.



글쎄, 굳이 대답하자면 내 입장에서는 휴직계를 낼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용기가 아니었다.


그저
불가항력적이었다는 말씀 밖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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