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과장은 동기들에 비해 꽤 늦은 나이에 입사를 했다. 그 탓에 회사 내 일반적인 나이 대비 직급은 늘 한 단계 아래였다. 이를테면, 통상 대리를 다는 나이 때에는 사원 직급이었고, 과장을 달아야 할 나이에는 대리로 근무를 했었다.
그래도 괜찮았을 것이다.
입사가 늦은 것은 누굴 탓할 일도 아닌 데다가 동기들 틈에 섞여 꾸역꾸역 승진이 되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조금씩 그의 기분도 예전 같지 않았을 것이다. 언젠가부터 승진도 양극화가 진행되면서 까마득한 후배가 선배를 앞질러 갈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02.
신입 시절의 나는 연공서열이 그렇게 불만이었다. 선배랍시고 주먹구구식으로 일하거나, 아예 일을 안 해버리는 경우에도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무능력한 선배들 뒤치다꺼리하는 건 나 같은 후배들임에도 불구하고 경력이 길다는 이유로 근무평정에서 좋은 점수를 받으니 속이 쓰릴 수밖에.
그런데 격세지감이 느껴진달까. 어느 시점부터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오히려 그것이 내 '방패막이'가 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선 그것도 '쓸모없는 방패'로 전락했다. 특히 나나 물과장처럼 '끼인 세대'에게 있어서 그렇다.
가령 연공서열로 승진한 선배들은 내 앞을 꽉꽉 가로막고 있는 것은 변함이 없는데, 내 아래에 있는 후배들 세상에서 특이점이 발생했다. 승진자리에 조금 틈이 보일라치면 의욕과 욕망으로 가득한 후배들이 1~2자리씩 꼭 꿰차는 것이다. 나를 지켜주던 경력점수가 조금씩 퇴색되고 있는 추세라고 할 수 있겠다.
비로소 내가 바라던 세상이 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세상이 왜 이제야 온 것일까. 머리 팽팽 돌아가던 총기 있던 나의 사원, 대리시절은 이미 지나가버렸는데 말이다.
03.
나야 운이 좋아서 시기에 맞게 승진을 한 셈이지만, 물 과장 입장에서의 이런 상황은 심각했다. 동기들보다 승진이 1~2년 밀리고, 후배에게도 그 자리를 뺏기게 된다면? 자신보다 2~4년 후배가 그를 앞질러 상사 직급을 다는 경우를 봐야 하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회사가 나이만 들이밀고 일하는 곳은 아니다. 그러나 물과장의 콤플렉스인 나이를 빼고는 그의 정서가 완벽히 이해되지 않는다. 그래서 따져보면 심한 경우엔 6~7살 넘게 차이나는 까마득한 후배의 지시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는 것이다.
- 들었어? 이번 승진에서 박 과장님 또 물먹게 생겼대.
회사 소식통이 하는 소리다. 사내 소식 중 인사만큼 비밀스럽고도 재밌는 이야기도 없다. 하지만 물 과장의 승진에서 물 먹은 소식은 언제부턴가 씁쓸하게 다가온다.
- 왜? 경쟁자들 다 진급했잖아. 이번엔 되셔야지.
- 승진심사 사전회의가 있었는데 부서장이 박 과장님한테 미안하다고 했대.
- 아니, 이제 경력으로도 동일 직급에서 박 과장님보다 오래 하신 분이 없을 텐데...
- 그동안 다른 부서에서 평정에서 점수 못 받으신 게 회복이 안되나 봐.
어떤 때에는 부서의 다른 사람을 밀어줘야 해서, 어떤 때에는 타 부서에서 강력하게 밀고 있는 후배한테 치여서, 또 어떤 때에는 승진자리가 넉넉히 나오지 않거나 부서장이 미처 신경 써주지 못해서. 그가 매년 승진이 밀리는 이유는 다양했다.
04.
그런 그는 기구한 회사생활은 어느새 나뿐만 아니라 호사가들의 단순한 이야깃거리에서 위로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도 언제든지 삐끗하면 그런 처지에 놓이지 말라는 법이 없었으니까.
물 과장님 사표 쓰셨대요!
내가 휴직을 나오고 나서 약 한 달이 지났을 무렵에 듣게 된 소식이었다. 업무적으로도 사적으로도 연락이 없던 후배가 대뜸 그런 톡을 보내왔다. 그 소문을 오죽이나 퍼뜨리고 싶었을까. 하지만 정말 그러고 싶을 만큼 놀라운 소식이긴 했다.
- 나가서 다른 일을 하실 수 있는 스타일이 아니신데...
- 그러게 말이에요. 아무튼 그 소식 듣고 다 쇼킹했어요. 한 달 뒤에 나가게 된대요.
- 나가서 뭐 하시겠다는 말은 없었고?
- 책을 읽을 거라고 했다는데요.
- 책? 무슨 일을 하겠다는 게 아니라 책을 읽겠다?
- 네, 그랬다고 했어요.
- 무슨 책?
- 그건 저야 모르죠.
물과장의 퇴직 소식은 후배의 말처럼 근래에 들었던 것 중 가장 쇼킹한 뉴스였다. 그는 여기 일 말고는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 타입이었기 때문이다. 자존심이 상할지언정 2~3년만 더 버티고 있었으면 승진도 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그 2~3년이 당사자에게는 어떤 굴욕의 세월이 될지 감히 짐작할 수 없겠지만.
05.
늘 자기보다 한 수 아래로 봤을 물과장마저 퇴직이라니.
사람들이 경악한 이유에는 분명 그런 이유도 컸을 것이다. 평소에 그를 안쓰러워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조차도 내심 그가 그런 존재로 회사에 오래도록 남아주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래야 나는 그래도 할만하다는 생각으로 하루 더 출근할 수 있을 테니까.
실상 물과장은 어딘가 모자란 면이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승진에서 수년간 탈락한 사실 외에도 여자 하고는 얼굴 마주 보고 대화하는 것도 쑥스러워할 만큼 숙맥인지라 아직 결혼도 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의 배가 나오는 만큼, 그리고 머리숱이 줄어드는 만큼 하루라도 빨리 좋은 사람 만나라며 농담 섞인 충고를 하곤 했었다.
하지만 처자식이 없었기에 이른 시점에서 퇴직 결정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 또한 최근에 몇몇 퇴직자들의 스펙(?)을 알아보았는데 모두 자녀계획이 없는 딩크족 또는 미혼이었기에 그들의 퇴직조건을 내게 적용해 볼 여지는 없었다.
내 나이 정도 되면 미래의 추세가 뻔히 그려지기 때문에 계산기를 두드리면 어느 정도 견적이 나온다. 그러나 자녀가 있다면 그 사실 자체만으로 앞날을 예측할 수 없게 만드는 가장 큰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06.
- 좋은 사람은 다 떠나고, 독한 사람만 남는 것 같아.
몇몇 퇴직자들을 보고는 누군가가 한 말이다. 나는 그 말에 처음엔 웃었지만 충분히 공감가는 말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회사에 아직까지 남아있는 나는 과연 독한 사람인가를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달리 뾰족한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회사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당분간 싱숭생숭한 기간을 보낼 것이다. 지켜본 바, 사내에 퇴직자가 생길 때마다 사람들은 한동안 가벼운 우울증세를 보인다. 처음에는 그 사람이 어떤 수가 있어서 퇴직을 하는지 궁금해하다가 거기에 자신의 삶을 견주어 보고 이내 체념하는 단계로 접어드는데,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신세한탄과 우울증세를 동반하는 것이다. 나 역시 그 과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그런 말이 있지만 회사생활에서는 조금 다른 것 같다. 강한 자는 하루라도 빨리 이 조직에서 나가 원래 본인의 것이었던 자유를 손에 쥐는 자들이 아닐까. 회사에 남은 자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런 그들의 퇴직을 헐뜯거나 부러워하는 것이 전부였다. 내가 아는 한 그랬다.
특히 평소 위로와 격려의 대상이기만 했던 물과장의 퇴직이 주는 의미는 남달랐을 것이다. 그야말로 물과장의 역습이 아니고 뭐겠는가. 정말로 살아남은 자들에게 남는 몫이란 웃픔 말고는 없는 것 같다.
오늘은 독감으로 인해 글을 올리지 못할 뻔했습니다.
어제 올린 글에서 '오늘은 글을 올리지 못할 수도 있겠다'라고 미리 예고를 드렸었는데요. 어제는 오기와 의지만으로 독감을 물리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시간이었다면, 오늘은 링거를 맞고 조금은 상태가 나아졌어요. 비몽사몽의 시간을 보내며 잠에서 3번을 깼고, 운 좋게 그동안에 글을 완성할 수 있었답니다.
한 번 더 맨 정신에 읽어보고 발행 버튼을 누르고 싶은 마음 한가득이지만, 저 혼자 했던 '저와의 약속, 독자님들과 한 약속'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늦게나마 글을 올립니다.
직장에 다닐 때에는 아프면 병가를 쓰면 됐었는데, 휴직 중에 이렇게 날아가버리는 하루하루는 참으로 뼈아프네요. ^^ 모쪼록 건강한 나날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