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소리와 비슷한, 너무 깊지도 너무 얕지도 않은 느낌
저는 귀촌하기 전에 책을 많이 버렸어요. 이사할 때마다 책이 많아 아저씨들이 힘들어하셨는데 단정해졌지요. 그래도 왠지 모르게 버릴 수 없는 책들이 있었어요. 별다른 기준은 없었고 손이 가는 대로 정리했는데요. 저의 손아귀에서 살아남은, 책장에 가장 오래 꽂혀 있는 책들 중에서도 요즘의 제가 닮고 싶은 글을 소개 드립니다. 신영복의 <청구회 추억>과 유안진의 <지란지교를 꿈꾸며>에요. 두 분 모두 부드러운 문체로 사소한 마음을 조명했어요. 둘 다 초등학교 때에 읽은 수필인데요. 혹시 아시는 분이 계시려나요?
<청구회 추억>은 신영복 선생님이 서오릉 봄나들이 갔다가 우연히 여섯 명의 꼬마들과 조우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예요. 첫 만남 이후 2년간 매달 한 번씩 만나 책도 읽고 놀이도 함께 했지요. 그들이 다니던 초등학교의 이름을 따서 ‘청구회’에요. “언젠가 먼 훗날, 나는 서오릉으로 봄철의 외로운 산책을 하고 싶다. 맑은 진달래 한 송이 가슴에 붙이고 천천히 걸어갔다가 천천히 걸어오고 싶다.” 아름다운 문장이지 않나요. 제가 유일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필사한 책이, 이 글이 수록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랍니다.
<지란지교를 꿈꾸며>는 검색하면 짧은 글이 바로 나오니 한 번 읽어보셨으면 좋겠어요.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 형제나 자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할 수 있으랴 영원이 없을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 필요하리라… 그는 때로 울고 싶어지기도 하겠고 내게도 울 수 있는 눈물과 추억이 있을 것이다 우리에겐 다시 젊어질 수 있는 추억이 있으나 늙는 일에 초조하지 않을 웃음도 만들어낼 것이다…” 좋은 문장이 너무 많아서 다 옮길 수가 없네요. 저는 오랫동안 지란지교를 꿈꿔왔고 꿈꾼 만큼 고운 지란을 만났다고 생각해요.
이외에도 차마 버릴 수 없었던 책들이 있습니다. 대개는 사회과학과 철학 책이에요. 요즘에는 잘 안 읽히더라고요. 좋은 글의 종류는 참 많아요. 제가 읽은 글들은 다 그 시점의 저에게 필요한 글이었겠죠. 요즘의 저는 숨소리와 비슷한, 너무 깊지도 너무 얕지도 않은 느낌을 좋아합니다. 마치 아래의 시처럼요. 최근 제가 옛날 생각이 나는 사람들을 만났거든요. <산샘에서 차를 덖으며> 이 한 그릇을 부쳐주고 싶었어요.
산샘의 물로 차를 달이며
맑고 차가운 물 한 잔을 떠서
끓어오르는 티끌을 바라본다
차를 좋아하는 그 사람에게
이 한 그릇을
부쳐줄 방법이 없구나
ㅡ 백거이의 〈산샘에서 차를 덖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