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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윤헌 Mar 06. 2024

조카 자랑

조카 자랑     

 누구나 남에게 인정(認定) 받는다는 것은 엄청 힘들다. 그리고 포장되지 않는 상태에서 존경받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누가 누구를 자랑한다는 것, 남에게 인정(認定) 받는다는 것은 큰일을 하여 대내외적으로 인정받거나 적은 일에 섬세하게 대처하면 가능할 것으로 추정된다. 두 가지를 완벽하게 소화해야 큰 자랑이 되고 ‘난 사람’이 된다. 그래서 옛 속담에 영웅은 고향에서는 나지 않는다고 했다. 두 가지 모두 완벽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내 조카 홍인기는 81년생이다. 6월 중순에 태어나 2달 만에 자기 할머니에게 맡기고 부모들은 머나먼 미국에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유학(留學)을 떠났다. 그 당시 할머니 연세는 53세 정도라 농사일에 전념하면서 아직 막내아들 대학 공부를 시켜야 하는데 둘째 아들의 손자를 키우게 되어서 몹시 힘들어했다. 아이가 아파도 걱정이고 아이가 다칠까? 봐서 잠시도 한눈팔지 않은 할머니였다. 할머니도 엄청 힘들었지만, 더 힘들게 공부한 사람이 막내아들이었다. 81년도 대학 다닐 때 한 달에 기본적인 생활비가 있어야 자취 생활을 할 수 있는데 어머니가 손자에게 묶여서 집 일을 하지 못하니 집안이 궁색하여 생활비가 늘 바닥을 쳐서 자취 생활 2년 만에 영양실조를 당해야 했던 내가 조카를 자랑하고 싶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마을 사람들로부터 똑똑하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지만, 할머니 밑에 크는 손자들처럼 버르장머리가 없어서 마을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곤 했다. 이 아이가 3살 되던 해 가을에 자기 부모가 있는 미국으로 갔다. 미국에서 부모와 생활하다가 초등학교 4학년인 91년에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키워주던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고 시골 생활 자체를 알지 못해 주위 친척이 얼마나 고생하여 키운 손자인데 저렇게 모르면 할머니가 서운할 것 같다고, 모두 한 마디씩 하였다. 그리고 포항에 우리 아이들 데리고 갔더니 사촌 동생조차 부정하고 남이라고 자기 친구에게 이야기하여 나도 좀 서운한 감정을 가지기도 했다.     

 이러던 조카가 우리나라 생활을 오래 하면서 적응하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다닐 때는 자기 사촌들을 어찌나 잘 이끌어 가면서 놀아 주던지. 그리고 공부도 잘하여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였고 지금은 대학원에서 뇌(腦)를 연구하고 있단다. 지금 우리 여식은 많은 학원에 다니며 과외를 받는데, 조카는 과외는 물론이고 교습학원 한번 안 다니고 공부했다. 전국 모의 수능 고사에서는 전국 7등이란 성적을 올린 조카이다. 내가 내 조카에 대해 세세하게 잘 알고 있는 것은 대학교수로 봉직하는 형님이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근무하고 있는 나에게 조카의 많은 부분을 상의하기 때문이다.     

 내가 조카를 자랑하는 것은 공부도 공부지만, 어린 나이에 사람의 도리(道理)를 지키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보통 아이들 같으면 자기 아버지 따라 시골에 갔다가 아버지 졸라서 빨리 집에 가자고 하는 것이 보통의 아이들일 것이다. 이 조카는 대학 1학년 때부터 서울서 대구를 거쳐 시골 할아버지 집으로 직접 온다. 아주 불편한 교통편인데도 불구하고 설과 추석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 생신에다 증조(曾祖) 할아버지, 할머니 기일(忌日)도 종종 챙긴다.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는 연구로 시간이 없고 몸이 피곤하다는 핑계로 잘 빠지는데.     

 오늘 아침에 방학이라 집에 있으면서 시골 어머니께 안부 전화를 드렸다. 날씨가 덥지 않으냐? 태풍이 오는데 걱정이 된다는 나의 전화에 어머니가 이야기하신다. “야야 어제 조카인 인기가 휴가 기간인데 할머니를 찾아왔다.”라면서 약간 흥분된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셨다. 시골에서 하루 자고 가려고 한 것을 덥다고 서너 시간 있다가 갔다고 한다. 할머니가 덥다고 빨리 가라 해서 갔는데 이 조카가 하는 말이 더 걸작이다.

 “할머니 저도 이제 자동차 면허증을 취득했는데 앞으로 차를 사면 할머니, 할아버지 모시고 좋은 곳에도 모시고 다닐게요” 했단다. 전화기를 끊고도 나도 약간의 흥분 때문에 얼굴이 붉어졌다.     

                                     2006. 8. 18 아침 憲     

 지금은 미국의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박사 후 연구원으로 맹활약하고 있다. 결혼하여 딸이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으나 고국에 취업이 어려워 미국에서 연구원으로 있는데 우리나라 뉴스에 가끔 연구 실적이 방송으로 나온다. 코로나로 귀국이 어려워 취업 자리가 더 어려워 보인다. 상위 1%에 속해도 취업을 걱정하니 인간은 평등하다는 말이 입증되는 느낌이다. 조카의 품성은 여전히 좋다. 얼마 전에는 나에게 전화하여 호칭을 삼촌이라 부르지 않고 꼭 ‘작은아버지’란 호칭한다. 참 대견하다.        2022. 10. 11  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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