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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윤헌 Mar 07. 2024

기차여행

기차여행     

 내가 다니면서 중얼대는 노래 중의 하나가 장미화가 부르는 ‘서풍이 부는 날’이란 노래이다. 이 노래의 가사 일부분이다 ‘무명 바지 다려 입고 흰 모자 눌러쓰고 땅콩을 주머니에 가득 넣어 어디론가 먼 길을 떠나고 싶어도 내가 잠들어 있어 못 가고 못 보내’ 누구나 잠들지 않으면 여행을 떠나고픈 사람이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도 여행을 무척 좋아한다. 주로 동기회나 산악회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음주·가무(飮酒歌舞) 하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꼭 가고 싶어질 정도로 기다리는 편은 아니다. 오히려 홀로 조용히 가는 여행을 선호한다. 외국 여행은 새로운 문화를 접하는 점에서는 좋지만, 비행기 타는 것도 괴롭고 가이드 따라 타율적인 여행이라 선호도가 적은 여행이다.     

 2012년 8월 8일 이번 방학에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이 없는 유일한 날이다. 이 하루를 어떻게 알차게 보낼까를 궁리한다. 물론 아내에게도 비밀이다. 2박 3일 정도면 최고로 좋은 일정인데 단 하루뿐이라 여행 일정을 잡기 곤란하다. 그래서 이번에는 기차여행을 하려고 마음속으로 정했다. 올림픽 축구가 새벽 3시부터 아침 6시까지라, 모두 올림픽 폐인 생활을 즐기고 있을 때 나는 아침에 아내 출근을 도와주고는 샤워하고 마산역으로 무조건 나가 보기로 했다. 9시쯤에 전화벨이 울려 받아 보니 평소에 등산, 낚시, 술 마시기를 같이하는 동료 교사이자 동갑인 친구가 내 일정을 알고는 오늘 뭐 하려고 하느냐고 한다. 거짓말을 못 하는 내 성격이라 10시에 마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가려고 한다고 대답하자 전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말 “나도 간다. 기다려라.”     

 10시에 마산역에 도착하니 기차가 그리 많지 않다. 10시 40분에 서울행 무궁화가 내가 탈 기차의 전부인 것 같다. 나는 기차를 타고 중앙선인 단양과 제천, 원주행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산에서는 직접 가기는 힘이 드는 여행 코스다. 조금 후에 친구가 왔고 둘이 상의하여 포항 쪽으로 가자고 하고는 동대구역까지 기차표를 끊었다.     

 10시 40분 출발하여 12시 10분에 동대구역에 도착하는 기차를 탔다. 친구는 브라질과 축구를 보았는지 창원 중앙역을 벗어나자, 졸고 있다. 참 좋은 친구다. 나에게 이렇게 좋은 시간을 내어 주다니, 이번 여행에서 나는 나의 정체성(正體性)에 대해 생각하기로 했다. 50이 넘은 나이에 뭔 정체성을 이야기하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 시기에 정체성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정체성, 부부에 대한 정체성, 친구에 대한 정체성, 직업에 대한 정체성을 본격적으로 분석하고 새로운 진로를 설정하는 여행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기분이 좋아진다. 친구야 맛있게 잘 자라.     

 삶에 대한 정체성이다. 기실 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고 나름대로 성과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뒤돌아보니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고 있고 내 가족 하나만 챙긴다는 명목으로 나에 대한 무언가는 한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대부분의 우리 나이에 그렇게 사는 것이 사람 사는 것이라고 말하면 그래도 남보다 크게 뒤처지지 않는 삶이라고 이야기는 할 것 같으나 내가 노후에 뭘 할 수 있을까? 무엇을 남겼느냐는 물음에는 술 마시는 취미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도 나는 내 관리를 위해 내 의지(意志)를 정말 소중하게 생각한다. 맹목적 생존 의지든 권력에로의 의지든 내 관리를 위해서는 뭐든지 한다. 지금까지 삶의 정체성에 대한 명확성은 90점 정도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적인 삶의 모습, 가정을 위하는 나의 노력, 직장에서의 나의 얼굴과 평가, 집단의 인간관계를 기준으로 삼으면 그 정도 점수는 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지금까지는 삶의 정체성이 명확했다면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가 무엇이며, 또 다른 정체성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참 힘든 대답이 필요할 것 같다. 베이비붐 세대 64%가 취미가 없어 노후가 어렵다는 신문 기사가 생각난다. 취미가 없는 건지 돈이 없는 것인지 구분이 안 되는 대목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정체성을 분명히 하여야 한다는 것이 이번 여행에 첫째 과제이자 풀어야 할 실마리이다.      

 부부(夫婦)에 대한 정체성이다. 둘 다 가난한 집에 태어나 단칸 셋방에서 아내가 쓰던 자취 도구를 그대로 신혼살림으로 이어진 가난한 부부가 지금은 경제적으로 많지는 않지만, 남을 부러워할 필요 없고,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할 필요 없을 정도의 재산도 모았고 자식들 교육을 위해 많은 투자를 하였고 자식들의 자존감은 누구에게도 질 수 없을 정도로 키웠다. 지금도 우리 자녀들이 부모에게 정말 감사하다고 자주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딸의 남자친구는 화목한 우리 집이 너무 좋다고 같이 살고 싶다고도 한다고 딸이 자랑스러워하는 집이다. 부부간에도 신뢰는 대단하다.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하면 잘 믿어주지 않아서 말을 아끼지만, 나는 남자의 순결성이 결혼의 기본조건이란 신념으로 내 육체와 영혼의 정결함을 가지고 아내와 결혼했다. 물론 아내도 똑같다고 믿는다. 결혼 20주년까지는 부부의 정체성에 별문제가 없는 것 같다. 우리가 이사 가는 아파트마다 우리 가족이 모범 가족의 표본으로 자리매김하고 부부도 평생 한 번 안 싸우고 살 부부라고 칭찬을 듣는 부부였다. 한 번은 아내가 초보 운전 때 교통사고로 차를 폐차시킨 일이 있다. 나는 늦게 퇴근하여 경찰서에 아내가 있다는 말을 듣고 택시 타고 경찰서로 갔더니 경찰 조사를 받고 나오는 것이다. 나는 경찰서 앞에 설렁탕집에 데리고 가서 이웃집 아줌마와 저녁을 맛있게 먹었으면서 사고에 관한 이야기는 아내에게 들었고 사람이 다치지 않아 정말 다행이라고 이야기하면서 함께 승차한 이웃집 아줌마를 걱정했더니 나중에 아파트에 소문이 나길 그 집 신랑은 차를 한 대 폐차시켜도 마누라에게 고생했다고 보약을 지어 주었다고 소문이 난 모양이다. 그래서 아파트에 출퇴근하면 인사하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아이들 동기 부모들은 나이 불문하고 친구가 될 정도로 부부의 다정함을 인정받았다.     

 애들이 다 대학에 진학하다 보니 부부간의 대화가 자꾸 적어진다. 나도 직장에서 최고로 알짜라 말하는 3학년 학년 부장을 하다 보니 집에 오는 시간도 늦고 나이가 드니 체력적으로도 한계가 있는지 부부간의 대화보다는 그냥 잠을 자는 것을 더 좋아한 모양이다. 아내가 삐졌다. 아내는 아내대로 무엇을 배운다고 직업훈련원에서 공부한다. 부부의 영역은 공통이고 직업의 영역은 다른 것이어야 하는데 서로 가지고 있는 영역을 고집하다가 부부의 공통분모가 무너지는 기분이다. 추측하건대 젊은 사람들이 나이가 있는 아내에게 누나 또는 누님이라는 호칭으로 서로 농담하고 대화하고 같은 영역을 공부하다 보니 대화도 공통점이 많아서 좋았던 모양이다. 우리 부부는 자꾸 멀어져 가는 기분이다. 그래도 각방을 쓴다거나 이상 징후는 없는데 아들의 말로는 부부의 실제 거리는 30cm인데 마음의 거리는 4km도 넘는다고 핀잔받았다. 또 나는 일주일에 두 번은 테니스를 치고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는 등산한다. 운동을 자주 하니 50이 넘어도 남성성이 죽지를 않는다. 아내는 나와 나이 차이도 있고 아직 갱년기가 아닌데도 부부관계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다. 내가 성화를 부리면 마지못해 응해 주지만, 난 좀 더 적극적인 성생활을 원한다. 해결 과제란 무엇이란 말인가??      

 기차가 청도역을 지나고 있다, 우리 앞 좌석에 앉은 해병대 군인과 아가씨가 눈에 거슬릴 정도로 많은 접촉을 하고 있다. 나이가 있는 어른이 한마디를 해야 할까 말까를 망설인다. 그런데 앞에 앉은 젊은 커플 말고도 어린 아가씨들이 핫팬츠를 입고 다니며 조심성 없이 행동하는 것이 젊은 세대의 특권 정도로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친구는 여전히 말없이 눈을 감고 있다. 내 마음을 읽는 좋은 친구이다.     

 친구에 대한 정체성이다. 난 친구에 대한 좋은 추억이 너무 많다. 신세를 많이 져서 은혜를 다 갚으려면 백골이 진토가 되어도 다 못 갚을 은혜이다. 대학 시절 자취하는 나에게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 도시락 두 개 들고 온 친구도 있고 자기 집에 돼지불고기 먹는 날이면 어찌 연락하여 자기 집에 오게 하는 친구며 기타 등등 말도 없이 많은 혜택을 본 사람이다. 친구는 죽마고우(竹馬故友) 형으로 가족 같은 초등학교 동기가 있다, 42명이 6년간 같은 교실에서 수업한 친구로 현재는 30명 정도가 연락되고 경조사에 부지런히 참석하고 1년에 두 번 정도 만나 회포를 푼다. 너무 잘 알다 보니 남녀 간에 성적 매력은 거의 없고 말도 거침없이 쏟아내어도 별 무리가 없는 친구들이다. 초등학교 동기보다는 약간의 익명성을 전제하지만 잘 지내고 있는 중학교 동기가 있다. 나는 자주는 참석하지는 못하지만, 큰 행사에는 참석한다. 몇 년 전에는 경주 문화원에서 실시하는 추억의 수학여행을 중학교 동창들과 교복을 입고 1박 2일 동안 재미나게 행사하여 울산 MBC에 방송까지 나간 적이 있다. 말에 조심성은 없어도 되지만 그래도 초등학교 동기보다는 행동에 절제한다. 술 한잔 하면 여자들이 훨씬 대담하게 행동한다. 한 번은 관광차로 등반하고 집에 가는 길에 관광춤을 추며 놀았는데 다음 날 아침 피곤하여 출근하기 힘들게 만든 친구고 술잔을 따라 주어 마시니 안주로 뽀뽀까지 해 준다. 어느 모임에서 이런 환대를 받을까?

 사회생활과 직결되는 고등학교 동기가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만난 10명으로 주위 친구도 부러워할 정도로 친구 사이가 좋다. 이런 친구를 금란지교(金蘭之交)라 부른다고 생각된다. 이 좋은 친구들을 자주 만나지 못함이 늘 아쉽다. 고등학교 10명 친구는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 가족 동반으로 전국의 콘도를 얻어 재미있게 논 친구들인데 이제 장례식장에서나 볼 수 있는 친구다 보니 아쉽기 그지없다. 그래도 서로 배려해 주고 아끼는 마음은 있어 경조사나 큰일이 있으면 누구 더 먼저 많이 도와주는 친구들이다. 올 초 내가 정직(停職) 3개월의 중징계를 먹고 전국에 있는 친구들을 방문한 적이 있다. 울산, 대구, 포항, 구미, 서울에 다니며 친구들과 소주 한잔 하며 회포를 푸는데 어떤 친구는 480만 원 해외여행을 169만 원에 시켜 주려는 친구, 돈을 주는 친구 등등이 많아 나름대로 인생을 굴곡지게 살지는 않았구나. 하고 생각한 적이 있다.

 난 늘 가까운 친구를 원하고 있는 것 같다. 창원에 고등학교 동기 4명이 있다. 한 달에 한 번씩 비정규직으로도 본다. 이 친구들과 10살쯤 적은 아줌마 무리와 같이 비정규적으로 놀다가 친구 마누라가 이 사실을 폭로하여 나를 포함 3명이 마누라에게 혼난 적이 있는 아주 재미있고 좋은 친구다. 그러나 늘 바쁘다. 나도 바쁘고 그들도 바쁘다 요즘은 직위가 있어 그런지 더 바쁘다. 자연히 만남이 적다. 이제 3개월에 한 번씩 부부 동반으로 등산도 하고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는데 누구 입에서 어떤 폭로가 나올까 늘 조바심하는 것이 남자들이다.


 직업에 대한 정체성이다. 성실하게 임하려고 얼마나 큰 노력을 했는지 모르는 직업이다. 직업이란 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재화를 얻기 위해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으며 자아실현을 하는 장소이기도 한 곳이 직업인데 나는 선생님이라 멍에를 지고 영혼과 바꿀 태세로 직업에 임한 사람이다. 평가는 항상 남이 하는 것이라 선생님의 정체성이 잘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객관적 기준을 몇 개를 두고 보면 비교적 훌륭하게 살았다고 자부를 한다. 

첫째는 선생과 학생의 관계다. 만나서 헤어질 때 요즘 학생은 싫으면 싫다고 표현하고 좋다면 좋다고 분명히 표현한다. 다행히 싫다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좋다.

둘째는 졸업생과의 관계이다.

내가 1989년 부임하던 첫해 빼고는 22년간 담임을 한다. 참 많이 하고 어렵다는 고3 담임도 11번 하고 고 3학년 부장도 2번이나 한 것 같다. 할 때마다 입시성적은 최고의 성적으로 배출한다. 졸업한 학생을 만나러 가면 내가 담임하지 않은 학생들이 다수가 있다. 왜냐면 선생님이 좋아서 왔다고 한다. 그리고 개별적으로 선생님에게 술대접하러 오는데 내가 담임했느냐고 하면 옆 반 담임했다고 한다. 담임하지 않고 수업만 들어도 선생님께 꼭 술대접하고 싶다는 졸업생이 부지기수이다. 그리고 내가 담임하고 졸업시킨 학생들 최고 나이가 39살인데 3년 주기 아니면 2년 주기 아니면 연속하여 담임했는데 나를 좋았다는 평가와 주례를 많이 부탁하는 것을 보면, 나쁜 이미지의 선생님은 절대 아닌 것 같다. 그러면서 살면서 생각해 보니 윤리 선생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와닿는 것이 많다고 한다.

셋째는 진로지도이다. 좋은 대학을 원하면 좋은 대학으로 인도하고 대학이 안 맞으면 직업 진로로 상담하는데, 모두 좋았다고 한다. 학년 초가 되면 별난 학부모가 우리 아이 샘 반에 넣어 달라고 교장에게 탄원서도 올린다고 한다. 그리고 입학식이나 개학식에 담임 발표할 때 내 이름이 호명되면 한 반은 탄성이 나머지는 한숨 소리가 들린다. 대학 친구 아들이 우리 학교에 입학하는데 친구 아내가 입학식 때 참가했다가 나중에 전화하여 연예인이냐고 묻는다. 선생님으로서도 좋은 정체성을 지닌 사람이라 표현하고 싶다.

나는 게을러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지금 학교 뒤에 도서관이 있다. 도서관에서 일주일에 책 3권을 빌려온다. 소설이나 수필 등 문학 분야 1권, 철학 및 사회사상 1권, 교육학 분야에 1권 합해서 책 3권을 빌려오면 자율학습 시간이나 틈만 나면 독서를 한다. 독서가 선생님을 하는데 가장 큰 동력이자 힘의 바탕이 되는 것을 느낀다. 학생 지도에서 학생들도 처음에는 완력으로 힘으로 이끌었지만, 지금은 사랑으로 이해하고 포용하면서 이끌고 있다. 그래서 내가 맡은 동 학년 학생들은 나를 아버지라고 통칭한다.     

여기까지 분석하자 기차는 경산역에 도착한다. 다음 역이 동대구역이다. 친구를 깨운다. 어디로 갈 것인지 동대구역에서 찾아보니 시간상으로 가장 가까운 시간에 가는 것이 포항행이다. 포항에는 친한 벗이 있어 포항까지 가서 연락하지 않는 것은 매우 실례라고 생각하고 경주까지만 가기로 하고 표를 예매했다. 12시 30분에 출발하여 1시 10분에 경주에 도착한다. 새마을이라 좀 조용하다. 친구와 일상적인 대담을 한다. 23년 동안 가족보다 더 많이 대화하고 술 마시고 같은 일을 한 친구이기 때문이다. 경주에 도착하여 마산에 가는 차편을 알아보니 4시 33분에 바로 가는 열차가 있다고 한다. 얼른 예매했다. 점심도 먹고 관광도 해야 한다. 때맞추어 지인이 경주에 맛있는 한정식이 있다고 연락이 왔는데 택시를 타고 물으니 잘 모른다고 한다. 나도 거기서 먹어본 경험이 있어 유적지로 갔더니 지인과 내가 말하는 식당이 아니었다. 우리는 간단하게 동동주 한잔과 쌈밥으로 식사하고 유적지를 탐방한다. 나는 경주라면 애들이 어릴 때 경주 한화 콘도를 빌려 1년에 4번 이상 친구들과 모임을 하고 귀가할 때 유적지 1~2곳을 아이들에게 설명하였기에 유적지 관광은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친구는 경주에 수십 년 만에 왔다며 관광을 원한다. 자기 시조인 김알지 묘소에도 가고 계림, 안압지 첨성대, 석빙고, 천마총을 둘러보고 기차 시간이 되어 경주역으로 갔다. 마트에서 맥주 캔을 몇 병 구매했다. 기차여행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맥주 마시기이기 때문이다.     

 기차가 연착하여 4시 38분에 승차했다. 이 기차는 울산 태화강을 지나 월성을 거쳐 해운대를 지나고 삼랑진에서 마산으로 가기로 된 기차이다. 승차하고 기차가 출발하자마자 곧바로 시원한 맥주를 마신다. 제맛이다. 이런 분위기를 너무 좋아하는 나는 청순한 소년과 때 묻지 않은 청년이 합해진 것 같다고 생각해 본다. 많은 착각이겠지?? 맥주 마시고 조금 있다가 내가 잠이 온다. 그냥 잔다. 잠을 한참 자다가 일어나 보니 울산의 젖줄 태화강이 보인다. 낚시하는 사람이 많이 보이는 것 보니 태화강이 많이 정화되었나 보다. 울산을 지나며 울산현대고등학교에 근무하는 대학교 친구가 생각난다. 대학 다닐 때 나에게 담배를 가르쳐 준 친구고 도시락을 나누어 먹던 친구였는데, 몸이 멀어지니 마음도 멀어지는 것인지 최근에는 전화만 몇 통화했을 뿐 식사도 한 끼 못 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심장이 아프다. 자책감이다. 이제 나의 정체성에 대한 과거의 분석이 끝났으니, 미래의 나의 정체성에 대한 정립이 필요한 시간이다. 오전보다는 기차에 탄 승객들이 좀 시끄럽다는 생각이 든다.     

 삶에 대한 미래의 정체성을 어떻게 정립할까? 62세까지는 무난하게 정년을 마칠 수 있으면 아주 좋은 것이고 거기다가 관리자로서의 책무를 맡으면 금상첨화(錦上添花)가 될 것이다. 이 부분은 직업에 대한 정체성과 겹쳐야 할 부분이라 뒤로 미루고 퇴직 후를 생각해 본다. 연금이 있기에 그다지 고달픈 생활은 벗어날 것 같다는 생각은 한다. 취미생활로 시간을 보내기는 너무 어리석은 생각이 든다.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다. 1차로 생각하는 것이 시골에서 촌닭을 키우는 것이다. 500평 정도의 규모에 자유롭게 먹이를 먹고 알을 낳으며 항생제를 먹지 않는 튼튼한 닭을 키워 국민의 건강을 돕는 일을 하고 싶은 것이 첫째요. 둘째로 막걸리 파는 카페를 하고 싶다. 이득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고단한 사람이 이야기 나누고 가는 집으로 부담 없이 놀다가 가는 집이다. 내가 직접 막걸리를 담그고 유기농 채소로 반찬을 하여 저렴한 가격으로 손님과 스스럼없이 대화하는 그런 막걸리 카페이다. 이것은 아내와 이야기하니 단번에 거절당했다. 이유가 막걸리를 내가 다 마시기 때문에 안 된다고 했다. 3번째는 봉사하는 선생님을 하고 싶다. 대안 학교에 나가서 상담도 하고 같이 문제를 해결해 주는 무보수의 선생님이 되고 싶어 진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에는 취미생활과 등산을 겸하면 나의 미래 삶에 대한 정체성은 어느 정도 정립이 될 것 같다. 맥주 한 모금을 다시 먹는다. 


 부부의 정체성에 대한 해답을 내려야 한다. 보통 농담 삼아 나이 들어 마누라 어디 가느냐고 묻다가 맞고 더 나이가 들면 아침에 눈을 뜬다는 이유만으로도 마누라에게 맞는다고 한다. 나에게도 해당이 될까? 생각하니 끔찍해진다. 초등학교 동기 여자가 한 말이 생각난다. 너는 10년간은 돈을 벌어오니 괜찮을 것이고 퇴직하여도 연금이라는 은행이 있으니 소박 당할 일은 없을 거라고 한 말이다. 휴~~ 다행이다. 나는 소박이 문제가 아니고 얼마나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고 이것을 정립해야 하는 것이 부부의 정체성이다. 23년을 정답게 살아왔었지만, 더 많은 시간을 살아가야 하는 부부이기에 매우 중요한 문제임은 틀림없다. 오전에 진단했듯이 우리 부부는 2개의 문제만 해결하면 아름다운 노후를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최근에는 아내와 대화를 많이 한다. 특히 노후에 무엇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하고 내가 닭 키우는 것에도 아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시골에 경매가 나오면 새벽에 같이 물색도 하러 다니고 일요일에는 두 달 전부터 조조 영화를 보러 간다. 조조 영화 보러 가면 난 영화표만 끊어서 가는 데 딸의 조언에 따라 생과일 주수도 사주고 팝콘도 사준다. 이런 것이 늘 불만이었던 아내이기 때문이다. 좀 더 자상한 남편이 되려고 노력해야지. 그리고 성(性)의 문제는 힘들지만 내가 절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느 조언가가 젊을 때보다 마누라가 더 만족하도록 해 주고 난 후에 부부관계가 좋고 나쁨을 이야기하라고 한 이야기에 공감하고 그렇게 해 보려고 노력하는데 쉽지는 않을 듯하다. 약간의 미흡이지만 부부의 정체성도 해결의 실마리가 보인다.     

 기차가 해운대역을 지나간다. 기차가 바다를 끼고 달리는데 기차를 탄 승객이 우르르 일어나 밖을 본다. 나도 좋다고 카메라 플러시를 연신 터트린다. 부산의 고층 아파트도 지나간다. 부산에는 좋은 추억이 있다. 예비고사를 치고 친한 친구들과 태종대를 구경하고 자갈치시장에서 낙조(落照)를 구경하면서 ‘아나고회’를 맛나게 먹고 고3이 맥주 1잔으로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기차 타고 대구 가면서 앞으로의 인생을 이야기하던 좋은 추억 때문에 부산은 늘 좋다.     

 친구의 정체성을 정해야 한다. 별 뾰족한 수가 없다. 나의 절친한 친구들은 아직도 경제적으로나 직장에서도 왕성한 위치에 있는 친구가 많다. 곧 대구은행 행장이 유력한 친구도 있고 스포츠 조선의 본부장도 있고 사업적으로 성공한 친구도 있고 식당을 차려 맛집으로 소문나서 대기표를 받아야 맛을 보는 식당 경영하는 친구도 있다. 대기업 부장으로 퇴직하여 사업하는 친구 등등 모두 바쁘다. 은행장이 유력한 친구가 땅을 준비할 것이니 늙어서는 모여 살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그래 기다려 보자. 지금처럼 산다면 친구 관계는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창원에 있는 좋은 친구 4명과 잘 지낸다는 생각도 해 본다.     

기차는 밀양역을 지난다. 마산까지는 30분 정도 남아 있다. 내가 담임한 학생들 소풍 때 종종 이 코스를 이용한다. 마산역에서 승차 밀양역에 내려 밀양 영남루와 강변에서 신나게 놀다가 마산에 가면 3시 40분 정도라 학생들도 만족하는 소풍 코스이기 때문이다. 잠깐 친구와 이야기하는데 웬 아줌마가 아기와 신경전을 벌이고 아이는 대성통곡한다.      

 이제 직업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할 시간이다. 교감 교장이 되고 싶다. 그런데 성실성이나 경력, 또 선생님에 대한 신망, 실무 처리 능력으로 보면 못할 이유가 없는데 사립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욕심을 낼 수 없는 자리이다. 지금껏 교감, 교장 승진한 사람들이 능력보다는 다른 변수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 待天命)으로 가닥을 잡는다. 담임도 학생들이 싫어하지 않을 정도에서 끝내야지. 정 안되면 명예퇴직도 하려고 생각을 정립한다.     

 마음이 편해졌다. 기차여행이 이렇게 좋은지 모르겠다. 기차는 창원 중앙역을 거쳐 마산역으로 달려간다. 예정 시간보다 10분 늦은 8시 10분에 마산역에 도착한다. 늦은 저녁 시간이다. 이 친구와 헤어질 때 소주 없이는 못 헤어지는 친구다. 25년 만에 향어회를 먹는다. 나는 소주가 달다. 내가 풀려고 생각한 정체성 문제를 모두 풀었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회포를 풀고 집에 가니 10시다. 아내가 반갑게 반겨 준다. 중간에 내가 카카오톡으로 사진을 보내주었기에 어디 갔다 왔는지 알고 있기에 생글생글 웃으며 재미있었느냐고 묻는다. 재미를 넘어 우리 시골말로 “깨빈하다(개운하다)”라는 말로 대신한다.     

내일에도 태양은 떠오르겠지. 그러나 그 태양은 어제의 태양이 아니라고 말할 자신이 있다.


                              2012.8.10. 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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