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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윤헌 Mar 13. 2024

힐링 휴가

힐링 휴가     

 1997년 겨울에 태국 여행을 갔다. 외국 여행이니 문화 유적지나, 유명 관광지를 하나라도 더 보고픈 마음에 여행 일정을 바쁘게 다닌 적이 있었다. 그런데 태국의 푸껫 해변에 연세가 5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외국인 관광객 남녀 두 분이 이틀간 모래사장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는 말에 약간의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비싼 비행기 표를 끊어 고작 일광욕으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행의 일정을 빠듯하게 잡지 않으면 무슨 손해라도 보는 착각 속에서 국내 여행도 될 수 있으면 많이 돌아다니고 많은 유적지나 멋진 풍경을 보아야 제대로 된 여행이란 관념은 내 머릿속을 떠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특히 우리 자식과 같이 떠나는 가족 여행은 체험학습을 위한 여행이지 쉼이나 휴식 같은 것은 아예 여행 일정에 삽입되지도 않았다.     

 이제 나이가 쉰 중반을 넘어서 체력에 문제가 있는지, 마음의 여유가 생겼는지 모르지만, 여행은 곧 휴식이란 생각이 들면서 좋은 풍경은 인터넷이나 TV에 드론으로 찍은 멋진 것을 보는 것이 훨씬 좋고 여행은 자연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비함을 몸소 체험하면서 인적 네트워크를 통한 마음의 안식이 진정 여행이란 생각으로 굳어졌다.     

 친한 벗들과 1박 2일의 여행을 기획했다. 친구들의 여론을 들어 숙박 장소를 정하고 음식도 장만하기로 했다. 숙박은 대구에 있는 친구가 여러 곳을 방문해 보고는 마땅한 곳이 없어 후배의 별장으로 사용하는 촌집을 빌리기로 했다. 일에 대한 책임 의식이 투철하고 나눔과 베풂을 몸소 실천하는 친구이다. 우리가 하루 숙박하고 하루 쉴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답사를 3번이나 할 정도로 치밀하고 완벽한 준비성을 가진 친구이다. 기업의 최고 경영자 바로 밑자리까지 간 친구인데 누구에게 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부 자기 발로 뛰어 계획을 실천하는 주도면밀한 친구이다.     

 여행에 참여할 사람은 총 15명이다. 부부 동반에 피치 못할 사정으로 3명은 홀로 참석했다. 여행 당일 나도 덩달아 바쁘다. 전날 자율학습 지도로 밤 10시 30분에 귀가했다. 준비물을 하나도 장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회비를 모아 사용하지만 한 푼이라도 아끼고 좋은 품질의 음식물을 구매하기 위해서다. 새벽 6시에 일어나 경매시장으로 갔다. 싱싱한 문어를 사기 위해서다. 발품을 팔아 통영 돌 문어 싱싱한 것을 저렴하게 구매했다. 그리고 점심으로 준비하는 닭백숙을 위해 촌닭, 인삼. 황기, 대추, 마늘을 매입하고 전복 큰 것을 사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작아 포기했다. 장어도 1kg 장만했다. 다른 좋은 생선을 보기 위해 다니니 봉지에든 물건이 너무 무거워 500m 떨어진 주차장에 갖다 놓고 다시 시장으로 와서 아침 해장을 위해 대구(大口)를 찾았으니 품절이다. 고추, 오이, 상추도 매입하고 여자분이나 술을 안 먹는 사람을 위해 단술을 사려고 단골집에 가니 단골 아주머니가 아주 다정스럽게 대한다. 감주(甘酒) 파는 집이 건어물 상회인데 내 눈에 황태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이것이다. 해장국에는 황태가 최고라고 생각하고 한 봉지 구매하니 또 무겁다. 차에 실어 놓고 이제 공금이 아니라 사비(私費)로 아내의 아침 식사 대용을 사기 위해 다시 시장에 오니 체력에 한계가 온다. 시간을 보니 8시 30분이다. 9시 출발하려고 생각했기에 시간이 빠듯하다. 이마에 땀을 방울방울 매달고 집으로 와서 마지막 준비물을 정리한다.     

 계획한 시간보다 10분 늦게 출발하여 친구와 약속한 장소에 도착하니 친구가 전화로 마트에 주차할 곳이 없으니, 총무가 필요한 물품을 문자로 보내주라 한다. 아내가 옆에서 문자로 보내고 약속한 촌집에 내비게이션이 가르쳐 주는 대로 갔더니 엉뚱한 장소가 나온다. 친구가 도착했느냐고 전화가 온다. 못 찾겠다고 하고 마을 입구에서 기다리겠다. 하고 기다리니 조금 후에 친구가 도착하여 커브를 틀 때마다 앞에서 천천히 서행한다. 배려해 주는 친구가 고맙다.     

 점심 준비를 시작하자 포항 팀들이 도착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행사 준비를 곧잘 한다. 1시 10분이 되자 서울서 내려온 친구를 태운 차가 도착하니, 모임에 참석할 친구들이 전부 참석했다. 먼 길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잘 지킨다. 여행을 주도하는 친구가 납작 만두를 노릇노릇하게 구워낸다. 대학 시절 도깨비시장 도로 손수레에서 먹던 옛날 맛이라고 회고하면서 맛있게 먹는다. 솥에는 장작으로 피워 놓은 불에 닭백숙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닭백숙이 솥에서 나오자, 반주를 곁들여 환호성을 지르며 먹는다. 찹쌀을 씻어 넣어 닭죽을 끓여 놓고 나도 소맥 한잔을 한다. 이번 행사에는 술을 자제해야 한다. 친구와 놀러 갈 때마다 술에 먼저 취해 있다고 아내에게 경고받았기에 이번에는 끝까지 버텨야지 다짐했기 때문이다. 식성이 왕성한 친구라 닭으로는 모자라 문어와 회로 담소를 나누기 시작한다. 날씨가 어둑해질 때까지 현재와 옛이야기로 웃음이 그치지 않는다.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동네 가게에 막걸리를 사러 갔다. 동네에 놀러 와서 동네 사람에게 기본은 해야 할 것 같아서이다. 가게에 가도 살 것이 별로 없다. 막걸리 6병과 음료수, 과자를 최대한 많이 구매했다. 더 살 것이 없다. 같이 간 친구가 총무가 마음이 참 곱다. 순간적으로 저런 마음이 어찌 나올꼬? 하며 나를 격려해 준다. 총무의 이런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가 있으니 기쁘기 그지없다. 역시 친구가 좋다.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준비한 나무로 숯불을 피워 본격적으로 술 파티를 시작한다. 매사 솔선수범하는 친구들이 서로 봉사하기를 자청한다. 밤이 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운다. 아들이 행정고시에 합격한 소식, 취직한 자녀 이야기, 자식 효도 이야기, 예비 사돈 자랑을 밤이 이슥해도 모두 들어주고 칭찬한다. 남의 칭찬 경청하는 것이, 어려운 현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친구라서 그런지 맞장구도 치며 들어준다. 남의 자랑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 줄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친구라고 나는 늘 학생에게 가르친다.      

 나는 언제 들어갔는지 모르게 잠자리에 들어갔다. 술에 취해 잠을 자러 간 것이 아니라 밤 10시 전후에 꼭 자러 간단다. 좋은 버릇이라고 칭찬하는 친구도 있고, 노인성이라고도 이야기한다. 아침에 코 고는 소리에 잠에서 일어났다. 마을 한 바퀴 돌아보고 청소할 것이 많아 몇 가지를 치우고 다시 들어가 누워 다른 사람이 일어나길 기다렸다. 8시쯤 모든 친구와 아내가 일어나고 아침 준비, 마당 청소를 시작했다. 9시 되자 성지 순례를 가야 한다고 한 쌍의 부부가 가고 11시에 또 서울 부부가 떠났다. 나머지는 점심까지 맛있게 먹고 마무리 설거지, 쓰레기 분리수거, 대청소를 마치고 3시 정각에 각자 집으로 향했다.     

 어느 친구든 얼굴에 피로감은 약간 있어도 화색이 돈다. 밤새 술을 먹어 몸은 피곤해도 정신적으로는 편안했다는 표정이다. 차를 타고 내려오며 아내 표정을 보았다. 술을 많이 먹었다고 날벼락이 떨어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외로 아내의 표정이 곱다. 아내 말이 “이번 여행에 내 행동거지가 좀 미흡하지만 봐줄 만하다.” 한다. 다행이다.     

 무조건 많은 곳을 다니는 여행이 아니라 친구와 서로 베풀고 좋은 이야기를 들어주고 세상 사는 이야기와 힘들게 살아가는 친구를 걱정하고 아픈 친구가 빨리 쾌차하길 바라는 영혼이 순수한 사람들과 1박 한다는 것이 바로 최고의 휴가가 아니겠는가? 처음 여행 계획서에는 갓 바위 등산도 있고 동화사 108배도 있었고 김광석 거리 관광, 옛 추억이 담긴 벙글벙글 식당 맛집 체험 있었지만 하나도 실천하지 못하고 친구와 오순도순 이야기하며 이틀을 푹 쉬고 가는 여행이었다. 나는 이것을 힐링 여행이라고 칭하고 싶다.

                                     2017. 6.12 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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