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학교에 가니 담임이 소라를 보고 웃으며 ”얼굴이 좋아 보이네“ 하신다.
세상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속담이 맞는다는 생각을 오늘 담임을 보고 느낀 소라다. 복도에 서 있는 담임에게 정중하게 인사하며 어제 있었던 일을 상세히 이야기한다.
담임은 웃으며 ”그래 엄마가 있으니 좋제“ 하신다.
소라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교실로 들어갔다.
교실에 몇몇 친구들이 눈에 들어온다. 엄마를 만나기 전에는 반 친구라도 친구란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리 친하여지려고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냥 혼자 놀았고 혼자 공부 시늉만 냈다.
아침 1교시에 담임 수업 시간이다. 정신을 차려서 들으려고 해도 집중이 안 된다. 습관이 하루아침에 고쳐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갑자기 아빠 생각이 났다. 아빠에 대한 추억이 별로 없어 아빠의 얼굴만 둥그렇게 망막 앞에 나타났다.
소라는 할머니가 술에 취해 엄마 이야기는 조금 하고 아빠 욕을 많이 한 것을 축약해 보았다. 규선은 미순이 떠난 후에 어머니의 주사가 약간은 사라진 듯하여 일상적인 가정생활은 할 수 있었지만 26살의 나이에 애 둘 아버지는 부담스러웠다. 다른 친구들은 여자 친구와 놀러 간다고 해도 규선은 꿈도 꾸지 못했다. 한참 젊은 나이에 5년이나 애들 키운다고 애쓰니 이제 기진맥진이다. 소라가 초등학교 입학하고 얼마 후에 아빠가 사라졌다. 온데간데없어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오리라 생각했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어린 소라가 생각에도 술주정은 해도 할머니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그리고는 아직 아빠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아빠는 죽었을까? 소라가 한참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큰 물체가 바로 앞에 서 있다. 담임이다.
”무슨 생각을 그리 열심히 하지. 오늘은 엎드리지도 않고 자세가 좋네“ 하신다.
배시시 웃으며 ”죄송합니다“ 했다.
솔직히 지금까지 살면서 남에게 죄송하다는 소리는 처음 해 본다.
모든 것을 이해하고 행동거지도 가르쳐 주시는 존경하는 선생님이 있다는 것이 소라는 심적으로 너무 든든하였기에 죄송하다는 소리도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한 달 후에 또 소라가 조퇴하려고 담임에게 부탁하니 담임이 흔쾌히 허락하면서 동생도 같이 데리고 가라고 조언한다. 소라는 동생 학교에 가서 동생을 외출시켜 약속한 장소로 갔다. 이번에는 엄마가 더 화사하게 차려입고 와서는 두 아이와 고깃집에서 점심을 먹고 백화점에 가서 옷도 한 벌씩 사주고는 시간이 되자 또 거제도로 가버렸다. 그렇지만 소라는 이제 언제든지 엄마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집에 가서 할머니의 날벼락을 예상하기는 힘든 나이었다. 소라가 집에 가서 새 옷을 입고 좋아하는데 할머니가 어디서 돈이 생겨 옷을 사들였느냐 묻고는 도둑년 취급을 하자 엄마가 사준 옷이라 하자 노발대발한 할머니가 새 옷을 가위로 싹둑싹둑 잘라버리고 소주를 두 병이나 마시고는 아파트가 떠나갈 정도로 소라에게 욕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 만남의 기쁨이 또 다른 한 사람의 가슴에 피멍이 들 줄 미처 몰랐던 소라는 담임이 생각났다. 담임에게 전화하여 그간 엄마와 관련된 모든 일을 이야기하고 오늘 할머니의 패악스러운 행동에 비분강개하며. 1시간이 넘게 울면서 이야기하고 나니 기분이 평상심을 좀 찾은 것 같았다. 세상에 담임 같은 사람만 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하며 소라는 가출을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