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유산

by 석정

어머니의 유산(遺産)


철 지난 유행가를 들으며 가끔 눈물이 흐른다. ‘홍시’ ‘사모곡’이라는 노래인데 이 노래를 들으면 작고하신 어머니가 자꾸 생각나기 때문이다. 보통 어머니와의 추억이라면 칭찬과 사랑받았던 순간, 좋은 음식이나 좋은 여행으로 감명이 복받치는 일, 국난극복(國難克服) 했던 어려운 시절의 추억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베이비붐(Baby Boom) 세대의 사람들은 가난하고 배고픈 시절 자식들의 공부를 위해 대부분의 삶을 희생하신 어머니의 추억이 가장 많으리라 추측된다.

우리 부부가 아이들이 어릴 때는 아이들 장래 문제, 현실 문제, 공부 문제, 인성 문제, 어느 정도 성장하자 배우자 문제들로 많은 대화를 했는데, 현재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평소 행동하신 일이나, 말들을 떠올리는 일이 종종 있다. 지금 생각해도 참 현명하신 일이 많아 자식으로 참 떳떳하고 행복하다.

어머니의 사고는 매우 유연하신 것 같다. 전통적 관습이나 인습을 거부하시지는 않았지만 추종하지도 않으셨다. 단적인 예로 음복(飮福) 문화 개선이다. 시골에서 제사는 자시(子時)에 지내기에 보통 12시 넘어 제사 지내고 잠깐 눈 붙이고는 새벽 5시에 일어나 집안 어른에게 음복을 배달한다. 밥 한 그릇, 국 한 그릇, 술 한 대접, 제사 음식 한 접시, 각종 나물을 차려서 6집을 다녀야 했다. 물론 제사가 많은 종가(宗家)는 한 달에도 서너 번 하는 집이 있었다. 우리 집은 내가 어릴 때 집안의 최고 어른인 할아버지가 계셔서 음복이 오면 튀김이랑 고기를 맛볼 수 있어 아주 좋았다. 그러나 맏며느리 처지에서는 제사 음식 장만한다고 종일 일하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음복해야 하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가 조용히 아침에 가져다주는 음복을 없애고 집안의 어른들을 집으로 초대해 음복하신 것이다. 며느리나 손부들은 큰 개혁에 어머니를 존경하며 어머니를 따른 기억이 있다.

어머니는 인간관계의 연결고리를 중시하셨다. 어머니 위치가 씨족사회의 중간 위치 즉 아버지가 종중의 남자 항렬로 20명 중 5번째쯤 되시는데 정말 많은 시동생이 집에 와서 많은 이야기를 하고 가셨다. 남의 말 옮기기 좋아하거나 남의 험담 조금만 하여도 집안사람끼리 대판 싸우게 만들 수 있는 위치인데 살아계시는 동안 그런 일이 한 건도 없다는 것이다. 엄마는 10살 많은 시어머니뻘 되는 형님들부터 8살이 이상 적은 질부(姪婦)까지 포용한다. 즉 한세대와 한세대 간의 가교(架橋) 역할을 하신 것이다. 어머니보다 연세 많은 분은 어머니보다 일찍 돌아가셨지만, 어머니보다 나이가 적은 동네 아주머니들은 내가 벌초나 묘사 모시러 고향을 가면 엄마 이야기를 많이 하시며 많이 아쉬워하셨다.

어머니는 원칙은 기본이고 두 사람 간의 합의(合意)와 양보와 배려를 강조하신 분이다. 사람 사는 것이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사는 것이 원칙이고 나머지는 사람 간의 합의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실천하신 분이다. 형제들이 많아 의견을 달리해도 딱 부러지게 기준을 제시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부부간에 의견을 달리하여 명판결을 기대하며 기준을 제시해 달라고 부탁해도 늘 하시는 말씀이 “수의(收議)해서 해결해라” 하신다. 어찌 보면 우유부단하다고 말씀하실지 모르지만, 어머니 살아생전 어떤 일을 결행(決行)할 때 결단력과 실천력이 대단하신 분이다.

어머니는 상대의 장점을 최대한 인정하셨다. 평상시 누구 집 며느리, 자식들 험담하신 적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우리 집 며느리의 약점도 다른 사람에게 절대 이야기하지 않으셨다. 그러면서 며느리에게 좋은 일을 시켜 남에게 인정받도록 했다. 비근한 예로 우리가 시골에 가면 베지밀 한 상자 사 오라 하신다. 그 베지밀을 집안 어른에게 갖다주라고 시킨다. 그 후에는 집안 어른들이 우리 며느리 칭찬이 자자해진다. 산 교육이고 장점을 최대한 부각하게 시키는 교육이다. 하나 더 이야기하면 동서가 한 명 있는데 대구로 이사 가고는 20년 이상을 명절이나 제사, 시아버지 생신에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아도 책망하지 않고 포용하면서 사셨다. 한 번쯤은 화도 낼 만한데 화를 내지 않아 어머니에게 물어보니 “참석 안 하는 너희 작은 엄마가 더 속이 아프겠지. 대구 나가서 고생해도 살만큼 벌었으니 다행 아니니” 하시고는 가타부타 안 하신다. 득도(得道) 수준이 아니고는 힘든 절제력이라 믿고 싶다.

보통 유산이라 하면 물질적인 유산을 이야기하는데 나는 물질적 유산보다 ‘건강한 사고’ ‘긍정적 사고’ ‘인간관계의 소통’을 몸소 보여 주시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 대단한 유산이기 때문이다. 내가 교직 하면서 30년 넘어 정년 퇴임이 몇 년 남지 않아 어머니의 유산과 나의 교직 생활을 생각해 본다.

교직 생활 30년 넘게 하면서 가장 중시한 교육관이 전부 어머니의 유산임을 느낄 때 온몸에 전율이 일어난다. 학생과 내가 40년 이상 차이가 나도 소통이 잘되고 있는 것은 사고의 유연성 덕분이라 생각한다. 처음 정착한 강의식 수업에 벗어나지 못하거나, 유신 시대의 고리타분한 권위로 생활지도를 하거나, 고정된 관념에 사로잡혀 학생들 진로지도를 했다면 학생으로부터 많은 원성이 있겠지만 아직도 학생들과 아주 잘 지내고 있는 것이 사고의 유연성 덕분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상대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는 것은 제자들이 성장하는데 가장 큰 무기이자 자생분이 된다는 생각이다. 내가 처음 교직할 때 우리 학교 학생들이 퇴학을 많이 했다. 자퇴든 벌칙으로 인한 퇴학이든 한 반에 2~3명은 되었다. 내가 처음 담임하며 울산으로 전학 간 한 명 빼고 전부 진급시키니 원로 선생님들이 “홍 선생 대단하네” 하시며 칭찬받은 생각이 난다. 그다음부터 개성이 강하거나 모험심이 많은 학생 담임이 내 몫이었다. 25년 담임하면서 퇴학이든 자퇴든 몇 명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최근 젊은 선생님들이 나를 소개할 때 학생이 죽어가면 심폐소생술로 살려내는 선생님이라 칭찬한다. 장점이 보이고 가능성을 보기에 가능한 일이다.

인간관계의 중시는 타고난 것이라고 자부할 정도로 어머니 유산이 대단하다. 초, 중, 고등학교 동기, 철학과 선후배, 마산에 내려와 고등학교 동문회, 직장동료와 그 밖의 지인들이 어머니 돌아가실 때 조문객으로 오거나 부의금을 부친 숫자가 200명 조금 넘었다. 그중에서도 고등학교 절친인 ‘건해(建海)’ 친구는 없어서는 안 될 친구이다. 사람이 없으면 허전하여 살 수 없다는 생각이다. 내가 학년 부장을 하면 한 달에 한 번은 회식한다. 학생들의 좋은 정보는 회식에서 많이 오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교에 오는 졸업생의 상당한 숫자가 나에게 온다. 나의 자산이 인간관계를 소중히 여긴 어머니의 DNA 덕분이라 생각한다.

소통과 배려, 남의 말 좋게 하기는 우리 교육이 앞으로 나아갈 교육의 기준이라 생각하고 실천한다. 어려운 학생(다문화 특수 교육, 소외된 학생)의 말 들어주기, 교칙을 잘 준수하지 않는 학생의 개성 살려주기와 상담, 현장에서 사실을 가지고 바로 칭찬하기가 나의 주특기다. 그래서 학생들과 거리를 두지 않는다. 학년말이 되면 학생들이 교사 평가를 한다. 장단점을 적는 주관식이 있는데 거기서 가장 많이 나온 칭찬이 학생들 차별하지 않고 학생들의 말을 잘 들어주는 선생님이 좋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어머니에게 받은 참 교육이자 유산이라고 말하고 싶다.

정년이 몇 년 남지 않았지만, 하고 싶은 일이 있다. 새로운 나라 지도자를 기르는 교육이 하고 싶다. 다양성, 창의성, 바른 인성으로 반칙 없는 리더를 키우고 싶다. 교사 초년기에 12월 24일이 되면 사회 복지원을 우리 반 학생들과 방문했다. 이 시기에는 생활기록부로 대학 입시를 치르지 않았기에 순수한 봉사활동이었고 장애인 이해 교육이다. 학생에게 1,000원씩 걷고 내가 좀 많이 보태어 맛있는 음식이나 과자를 장만하여 사회 복지원에 방문하면 사회복지사가 복지원에 있는 원생들이 어떤 경로로 복지원에 오게 되었고, 원생들의 가정환경도 설명해 준다. 설명 이후 원생들과 같이 놀아 주거나 목욕 봉사를 하라고 한다. 그곳에 있는 원생들이 겉으로 보기에 쉽게 가까이 다가서기 힘든 아이들이다. 처음에는 쭈뼛쭈뼛하다가 30분 정도 지나면 보통 사랑스러운 동생처럼 아끼고 돌봐 준다. 요즘 대학 입시를 위해 포장된 봉사활동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봉사활동이다. 이런 교육을 지속해서 실시하여 이기주의, 개인주의에서 벗어나 사회 지도층이 되는 참된 교육을 하고 싶다.

어머니 돌아가신 날이 벌써 7년이 지나고 있다. 날이 갈수록 어머니가 내게 주신 대단한 유산은 더 빛이 반짝인다. 아직 좀 남은 교직의 마지막 열정을 타고난 어머니의 유전적 본성을 교육 현장에서 흔들림 없이 실행하고 싶다.

2020. 04. 28 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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