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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윤헌 Jan 19. 2024

목욕(沐浴)에 대하여

목욕(沐浴)에 대하여


  긴 운동 후 따뜻한 물에 푹 담그고 오면 기분이 상쾌하다. 마산 인근에 적석산이 있다. 해발 497m로 비교적 낮은 산이지만 가파른 등산로 덕에 1시간을 힘겹게 등반해야 정상에 도착한다. 정상에서 구름다리를 건너 약간 위험한 등산길을 헤쳐 하산하면 저수지가 출발지이자 종착점이다. 약 2시간 30분 정도 소요되는 등산이다. 등산을 마친 후 대정마을에 가면 소고기를 값싸게 먹을 수 있다. 30년 전에는 돼지주물럭으로 명성을 떨친 곳인데 15년 전부터 축산 농가가 직접 생산한 한우 고기를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하기에 많은 사람에게 인기가 많다. 식사 후에는 동산 온천이 300m 떨어진 곳에 있어 온천욕을 즐기고 집으로 오면 환상적 등산이 된다. 그래서 등산 후 목욕탕을 자주 찾는다.     

 11월 셋째 주 일요일이다. 늦가을 날씨치고는 매우 포근하다. 애주(愛酒) 가들이 포진한 지인들과 둘레길을 걸었다. 회갑을 지나니 높은 산을 가지 않으려고 한다. 단풍을 보고 걸으니 땀이 난다. 3시간 정도 소요된 거리를 걷고 어시장 횟집으로 갔다. 마산에 34년을 살아도 횟감을 잘 모른다. 그냥 회라면 소주 안주 정도로 생각할 뿐이다. 애주가들이 수다 떨며 한잔, 한잔 마시는데 횟집 주인이 대낮부터 술을 많이 마신다고 핀잔을 준다. 애주가들이라 그런 핀잔 정도는 이제 칭찬으로 들린다. 자기의 주량만큼 먹고 헤어졌다.     

 음주 목욕을 좋지 않지만 땀이 몸에 더덕더덕 묻어있다는 느낌 때문에 목욕탕으로 갔다. 내가 자주 가는 목욕탕에는 노인들이 많다. 대부분 ‘달 목욕권’을 끊어 건강을 챙기는 사람들이다. 그런 모습에 익숙하여 목욕탕 분위기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아주 어린 꼬마가 내 옆에 앉아있다. “몇 살이고?” 물었더니 “7살” 한다. 감회가 새롭다.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필자는 목욕은 추석, 설 명절에만 하는 줄 알았다. 실제로 소죽솥에 물을 데워 명절 2일 전에 목욕했다. 소죽솥 바닥은 뜨거워 발을 디디기 힘들고 상반신은 추워 감기 걱정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중학교까지는 그렇게 목욕했다. 고등학교를 대구에 진학하면서 대중목욕탕에 처음 가 보았다. 모두 벗은 몸으로 목욕탕을 활보하는 모습이 신기했다. 목욕을 할 수 있는 날도 일요일뿐이었다 자취방에서 샤워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몽정하고 씻지를 못해 당황했던 기억은 아직도 잊어버리지 못한다. 내가 아파트를 장만하고 샤워 시설이 갖추어지기 전까지는 일주일에 목욕 가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행사였다.      

 우리나라 목욕문화를 살펴보자. 고구려인들이 깨끗하게 씻고 한족은 때가 많아 ‘떼 놈’이라 불렸고 신라시대는 불교의 영향으로 목욕 문화가 발달했다고 한다. ‘목욕재계(沐浴齋戒)’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종교적 의식을 실행하기 위해 목욕한다는 뜻이다. 고려시대에는 ‘서긍’이란 사신이 1123년 「고려 도감」이란 책에서 고려시대 목욕문화를 소개한다. 출타할 때는 반드시 씻고 가고 하루에도 몇 번 목욕했으며, 개성의 개울에서 남녀 혼욕을 했다고 한다. 고려 중엽부터 성리학의 영향으로 조선 시대에는 알몸으로 목욕하는 것을 선비들이 자제했다고 한다. 주로 부분적 씻기가 많았다고 한다. 손 씻기, 세수하기, 뒷물하기, 등목하기 등이다. 1년에 5번은 전신욕을 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래도 왕들이 온천을 중심으로 목욕 문화가 발달한 문헌이 보인다. 일제 치하에 일본인들이 조선 사람이 씻지 않아 냄새가 나고 상투에 이가 많아 단발령과 함께 공동 목욕탕을 장려하였으나 백성들의 반발로 쉽게 정착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식적인 최초의 대중탕은 1924년 평양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1960년대 들어서 공동주택이 생기면서 개인 샤워 시설이 등장한다. 지금은 모든 주거지에 필수적 시설이 샤워 시설이지만, 1970년대 자취하면서 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샤워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이런 생활 방식은 199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신혼살림 시절에 나는 방 한 칸에 연탄 부엌 딸린 집에 살면서 찬물로 머리만 감고 출근하고 겨울에는 연탄불에 데워진 온수로 머리만 감고 출근했다. 그래도 젊은 시절이라 몸에서 악취는 풍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요즘은 하루만 씻지 않아도 내 몸이 근질거려 참을 수 없다. 인간의 몸이 상황에 맞게 잘 적응한다는 느낌이다. 샤워 시설이 잘 갖추어진 주택이 많아졌지만, 목욕탕 문화는 더 번성한다. 대형시설을 만들어 복합적인 문화 공간으로 만든다. 침실, 오락장, 운동기구 설치, 이발소, 맛 사지 시설, 사우나 시설을 가미하여 단지 몸을 씻는 목욕문화에서 휴식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취업하려고 서울 자주 갈 때 사우나에서 자고 깨끗이 씻고 면접을 가 본 경험이 있었다. 온천이 많은 일본이 우리나라보다 목욕 문화가 발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우리나라 사우나 문화와 ‘이태리타월’이 일본으로 수출했다고 하니 우리나라 목욕 문화가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딸만 있는 아버지가 가장 부러운 일이 아들과 목욕 가는 집이라고 한다. 지금이야 아침, 저녁으로 씻으니 ‘때’가 많이 나올 일 없지만, 아들과 일주일에 한 번 목욕 가서 등 밀어주고 오는 일이 아주 기분 좋은 일이었다. 아들과 목욕탕에 가서 등 밀어주고 출출한 배를 우유나 빵을 먹으면 부자지간 사이가 돈독해지니 보기 좋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어린 아들이 목욕 가기는 싫어했지만, 우유 한 잔과 빵을 먹고 좋아했던 일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 일이다. 나는 우리 아버지의 알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염(殮)할 때 아버지의 알몸을 처음으로 보았다. 아버지와 목욕을 한 번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욕 때문에 부부간에 싸움도 가끔 한다. 식구 4명이 차를 타고 온천탕에 가서 남자 둘, 여자 둘이 각각 남탕, 여탕을 갔다. 남자는 길어야 1시간 조금 넘으면 마치는데 여자들은 기본이 3시간이다. 그래서 아들하고 2시간을 배회하다 인내의 한계를 느끼고 목욕하고 나오는 아내에게 일갈한 적이 있다. 


 목욕탕을 나오면서 인구절벽이란 말이 실감(實感)이 난다. 불과 10년 만에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낀다. 일반 가정에서 잘 설치된 샤워 시설이 있어 아버지와 목욕탕 갈 일이 적다손 치더라도 목욕탕에는 젊은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어린 아들과 손잡고 목욕 오는 젊은 사람이 보기가 너무 좋다. 우리 아들도 빨리 장가가서 할아버지와 손자가 목욕탕에 갈 수 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려 본다. 실현 가능성이 얼마나 될지는 미지수지만.      

                                     2022. 11. 22 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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