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다리를 건너자 협곡이 나타났다.
기대했던 열매가 풍성한 나무는 없었다.
깊고 깊은 상처의 협곡이다.
골이 깊어 들어설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동네 어르신이 아내에게 신권을 부탁했다.
아내는 은행원이었는데, 평소 알고 지내던 어르신이 명절을 맞아 꽤 많은 양의 신권(새돈) 부탁했다. 우리 부부는 평소 그분께 신세 지거나 한 것이 전혀 없었다. 곤란한 부탁이지만 한번 정도는 그려려니했는데, 자꾸 반복적으로 때마다 부탁을 해왔다.
은행에는 신권으로 바꿔달라는 부탁이 많기 때문에, VIP고객에게 한해서 교환해 주고, 일반 고객에게는 신권을 주는 건 보통은 어렵다고 한다.
아내는 이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은행에서 눈치를 보고 신권을 확보하고, 포장하고, 따로 시간을 내서 만나야 하는 여러 가지 번거로운 일을 거쳐야 했다.
나 같으면 바로 거절하고 하지 않을 일을 아내는 꾸역꾸역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했다. 일을 처리하면서 구시렁거리던 아내는 막상 그분을 만날 때는 웃으면서 정말 친절하게 전해주었다.
"회사정책 상 곤란하니 신권교환을 따로 해주는 건 이번까지 만입니다."
나 같으면 이렇게 말하고 진작에 잘라 버렸을 일이다.
친절을 유지해 내는 아내가 대단해 보이기도 했다.
'저렇게 까지 친절한 자세를 유지하다니...'
하지만 가슴 한편이 답답해 온다.
4년 전쯤, 새집으로 이사하고 집들이를 했을 때였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은 4년 전 입주한 새 아파트다. 지인들을 모시고 집들이를 하는데, 어떻게 이렇게 좋은 집을 구했냐는 질문이 나왔다. 집 매수를 주도한 내가 대답하려 하자, 아내는 다급히 내 말을 자르고 이렇게 말했다.
"다 은행 빚이죠... 월급 받으면 이자로 다 나가요. 다 은행 거예요. 은행."
나보다 잘 사는 분들이면 편하게 말할 수 있지만, 나보다 못 사는 분이 물어본다면 당연히 답변을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그게 좀 과하다. 아내는 '필사적'으로 눈치를 본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아파트가 은행 거라고? 빚일 뿐이라고?'
내 나름의 굉장한 고뇌와 노력이 필요했던 집이었기에 아내의 이런 태도가 불만이었다. 아내는 자신의 노력과 감정을 억누르고 상대방의 감정만을 생각해서 말하려 한다.
나와 아이들에게도 자신처럼 자기감정을 억누르고 가족 아닌 타인의 감정을 더 배려할 것을 요구하곤 했다.
당연히 상대방을 배려해야 하는 데 동의하지만, 아내가 인격적이고, 덕이 있어서 그런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왜 저렇게까지 필사적이지?'
이 의문은 아내의 학창 시절의 경험을 듣고야 풀릴 수 있었다.
미움받을 용기가 없는 사람이 있다.
30대 이상이라면 이름을 대면 알만한 여자배우와 아내는 중학교 동창이었다. 이 여자는 무리를 지어 다니는 소위 일진느낌이었다.
이 여자애들은 대화 한번 나눠 본 적 없으면서 아내가 지나가면, " 쟤, 뭐야! 공주! 공주야!" 하면서 조소와 비난을 보내고, 심지어 대장이었던 여배우가 된 그 여자는 아내를 화장실로 불러 욕하고, 머리를 쥐어 박고 하면서 아내를 괴롭혔단다.
아내는 소심하여 선생님이나 부모님한테 이 일을 말하지 못했다. 그냥 끙끙거리고 삭히고 참으면서 중학교를 졸업했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직 중학교여자애들이니 미숙하여 그랬나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흘렸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아내는 학교폭력을 당한 것이다. 여러 명이 아내 한 명을 적대 시 하니 얼마나 위축되고 무서웠을까?
아내는 영문도 없이 미움을 받는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을, 아무 도움 없이 오래 동안 참고 견뎌야 했다. 또 언제 화장실로 끌려갈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같은 반도 아닌 아내에게 그렇게 한 건 질투감정이 아니면 설명이 안된다. 나는 아내가 이쁘장한 편이어서 질투를 했던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질투 난다고 그렇게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을 아내는 이해를 못 했다.
이 일로 인해, 아내는 누구에게든 이유가 없어도 미움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워버렸다.
학창 시절의 무서웠던 이 경험은 성인이 되었어도 강하게 가슴속 깊이 내재되어 있다. 그리고 아내를 필사적으로 미움받지 않기 위해 노력하게 만들었다.
더 큰 문제는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미어캣 같다."라고 했었다. "왜 이렇게 과하게 눈치를 봐서 불편하게 하냐?"라고 했었다.
아내는 할 말이 없었다.
괴롭게 살던 그 소녀가 들었어야 하는 말
당시 터 놓고 자기 사정을 얘기할 수 있는 사람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같이 마음 아파하며 위로를 전했다면, 깊이 파인 상처로 인해 눈치를 많이 보는 사람이 안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제라도 누군가 이 말을 해줘야 된다고 생각했다.
이제라도 어른이 된 아내가 그 소녀에게 찾아가 이 말을 말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네가 그런 일을 당하다니 나도 너무 속상하다. 많이 무서웠지? 넌 잘못 없어. 쟤들, 어려서 질투하는 거야. 다 괜찮아질 거야. 걱정 마! 나는 세상 끝날 때까지 네 편이야! 알지?"
*아빠는 치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