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 중, 고 내내 공부를 못했다.
대학을 못 간 부모님은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실 수 없었다. 우리 집은 초등학교 때만 이사를 열 번 이상 다닐 정도로 어려웠다.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중학교 때 학원을 갈 수 있었지만 수업이 이해가 안 되었다.
나는 부산의 한 인문계고에서 최하위권을 유지했다. 공부가 싫어 도망간 곳은 음악이었다. 하루 종일 음악만 들었다. 긴 고3이 끝나고, 내 수능 성적은 학급에서 2등이었다. 물론 뒤에서부터다.
졸업 후 입학한 곳은 아주 먼 전라도 시골에 있는 4년제 사립대학이었다. 정원미달로 인한 합격이었다. 부산 사람들은 당연히 그 학교의 이름도 위치도 모른다. 난 공부 못해서 쫓겨나는 듯한 현실이 참담했다.
당연히, 동기들에게 신입생이 된 설렘과 자부심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대학생 타이틀을 얻기 위해 모인 열등생의 집합소 같은 느낌이었다. 아이들은 친해지면 하나같이 공부 못해서 여기서 만났다며 서로를 비아냥 거리며 놀았다.
그러다 고향 부산에 갔던 어느 날, 개인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갔다가 여의사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학교 어디 다녀?"
"XX대요..."
"어디라고?"
한 번도 보도 듣지도 못한 학교 이름에 몹시 당황하셨다. 순간 병원 공기가 싸늘해졌다.
'내가 묻지 말아야 할 질문을 했구나'하는 당혹한 표정의 얼굴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엄마는 내가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하셨는데, 세상 사람들은 나를 소중하게 여겨주지 않았다.
자책하는 동기들, 불편한 시골환경, 사회의 무시 혹은 동정하는 눈빛들은 내 가슴을 후벼 파는 듯했다. 그 의사 선생님의 당혹한 눈빛은 분노의 기폭제가 되었다.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인가?'
'사람들은 대학으로 사람을 이렇게 까지 업신여기는 것인가?'
나를 존중하지 않는 세상에 대해 굉장히 분개했다.
'내가 보여 주고야 말겠다.'
'나를 무시하던 그 눈빛을 바꿔 버리겠다.'
굉장한 에너지가 무시받았던 그 자리에서 나왔다. 그렇게 바로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부터 2학년 편입 준비를 하게 되었고, 최선을 다했으나 수도권 대학교 5군데를 시험을 보고 전부 떨어졌다.
낙심해서 집안에 박혀 지내다 군대를 가려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군대로 도망가려는 아들을 못마땅히 여기고 억지로 2학년을 등록하게 하셨다.
수업을 받으며 한두 달 지나니 실패의 상처가 아물어 갔다. 그래서 다시 3학년 편입을 도전키로 마음먹는다. 말 그대로, 내 육체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공부과정에 아무 미련이 없었다.
합격...
2년 간의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가장 가고 싶었던, 최선이라 여겼던 곳에 합격했다. 눈물이 울컥 나올 것 같았다. 절박했던 목표가 이루어졌다. 적어도 부산에서 나를 대학으로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게 되었다.
이 경험으로 인해 나는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드러나는 노력의 실체
나 역시 뭔가가 잘 안 된다면 그 사람의 노력이 부족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머리도 좋지 않은 내가 상위권 학교를 간 것을 보면 노력 말고는 설명이 안되었다.
하지만 책을 읽다가 이러한 생각이 변하게 되는 계기가 있었다. 미국 10개 명문대를 동시에 합격하고 하버드에 간 박원희 씨, 교육기업을 창업하여 수천억 원의 자산가가 된 현승원 의장 등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네가 뭐 할 수 있겠냐는 식의 사회의 무시를 견딜 수 없었다"
이분들의 인터뷰나 책을 보면 이런 표현들이 공통적으로 등장하곤 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존감이 높았고, 무시를 참지 못했다. 나 역시 무시를 견딜 수 없어 노력을 해본 터라 공감이 되었다.
자존감 - 사회적 평가 = 노력의 크기
내가 믿는 나의 가치, 즉 자존감에서 사회적 평가를 뺀 결과 값이 그 사람의 노력의 크기이다. 자세히 설명해 보자.
나는 "복 있고, 존귀한 자"라고 어머니로부터 평생 들었다. 그리고 날 위해 기도하시는 모습을 평생 보았다. 나를 귀하게 여겨 주셨다. 비난하지 않으셨고, 비교하지 않으셨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 주셨다. 만약 어머니가 날 위해 기도하고 격려한 시간들을 시간으로 환산한다면, 전국에서 100등 안에 들 것 같다.
누구든지 이런 사랑을 받고 크면 자신을 부정하고, 비관하기 어렵다. 자존감이 높을 수밖에 없다.
내가 왜 분노했는가? 내면 속에 나는 '존귀한 자, 복 있는 자'이지만 타인의 시선에서는 '모지리'였기 때문이다. 타인이 메기는 나의 가치와 내가 믿고 있는 나의 가치의 간극이 굉장히 컸다. 거기서 충격을 크게 받았다.
그 간극을 인지하게 되면(인지의 시점은 개인마다 다르다), 이를 메꾸기 위해서 더 적극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데, 이를 사람들은 '노력'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자존감이 높으면 간극이 큰 만큼, 노력의 크기가 커지는 것이다.
"내가 뭐 그렇지..."
"다들 그러고 사는 거야..."
"어차피 승자는 정해져 있어.."
혹시 이런 말들을 내뱉고 있는 가? 모두 거짓말이다. 당신은 자신을 속이고, 남도 속이고 있는 것이다. 믿기 힘들겠지만 당신은 절대로 소중한 존재다.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이사야 43장 4절
하지만 자신을 낮게 여기면(자존감이 낮으면), 타인이 무시해도 반응할 마음의 공간이 없다. 잦은 비교와 무시를 수십 년 당하면 낮은 자존감은 자기 자신이 되고, 타인의 비난에 수용적 자세가 된다. 그리고 자책은 일상이 된다.
더 노력했어야 한다고 자책하지 말자.
뭔가 이뤘다고 말하는 자들,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는 자들...
그들은 부모의 경제적 지원도 없고 머리가 나빴어도, 헌신적인 정서적 지원은 충분히 받아왔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의 삶에서 너무도 당연한 그 희생이 자신의 노력의 원인이 되어주었다는 것을 아직도 깨닫지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노력이 먼저가 아니라, 수용적 사랑을 기반으로 한 희생이 먼저였다. 자존감이 낮은 것이 결코 자신을 탓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다.
그러니 인생이 잘 풀려왔다면, 자신의 노력을 칭찬할 것 없다. 귀하게 키워주신 존재에게 감사하자.
인생이 잘 안 풀리고 힘들다면, 자기 탓을 하지 말자.
부모님은 비록 나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셨을지라도 나라도 나를 지키는 것이 현명한 것이 되지 않겠는가?
나를 지키려면 '힘 있는 부모'가 필요하다.
성경은 천지를 하나님이 지었다고 한다. 사람도 하나님이 지었다고 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창세기 1장 1절
그래서 인간의 진짜 아버지는 하나님인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은 오직 믿는 자에게 주어진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복음 1장 12절
이제라도 '능력 있는 아빠(말씀)'를 믿어보면 어떨까?
그동안 약하게 믿었다면 더 세게 믿어 보면 어떨까?
그렇게 한다면,
지난날이 힘들었던 만큼, 앞날의 행복의 농도는 더 짙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나를 격렬히 아끼고 사랑하면, 나는 반드시 잘 될 것이다.
한번 믿어보자.
*아빠는 치료사*
P.S
참고로 저는 우리나라에게 가장 흔한(?) 대한예수교 장로회 신자입니다.
조건 없이 뜨겁게 자신을 사랑하는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