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만난 친구들이 있다. 말 그대로 ‘불알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녀석들이다. 각자의 가정이 생기고, 직장이 생기면서 만나는 것도 어려워졌다. 그래도 만나서 술 한잔 하면 매일 만났던 사람처럼 어색하지 않은 것은 소위말하는 ‘불알친구’의 힘일 것이다.
가끔 만나는 술자리는 근황을 묻고는 서서히 과거로 돌아가는 자리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교까지, 그리고 군생활 이야기까지 우리가 함께 하면서 겪었던 이야기들을 두루두루 회상하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서로 사귀었던 사람을 알고 있고, 우리가 가장 창피했던 순간을 함께 했던 사이였기 때문이다. 20년간 우리는 끝도 없이 이런 일을 반복해 왔다. 참 재미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런 친구는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보다는 이젠 더 이상 과거를 회상하며 하는 말들만으로는 재미있지 않았다. 과거의 모습이 이제는 너무 멀어졌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나의 현재 삶의 의미가 더욱 커졌을 수도 있겠다. 남은 직장생활 20년, 내 아이의 진학, 대출금 상환 등 앞으로 닥친 일(책임져야 할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인간관계를 정리하게 되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익숙한 것들과 헤어지는 것이 힘들 줄 알았는데 그리 큰 상처를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 직장과 가정은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단지 내 추억이 사라졌을 뿐이었다. 30년간 만나던 친구를 만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친구들과의 약속은 거의 내가 잡았기 때문에) 내가 연락하지 않으면 연락을 잘 안 하는 친구들이었다. 1년이 지나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결국 이것밖에 안 되는 우정이었구나 후회가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계속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운동을 하다가 무릎전방십자인대가 파열되어 수술을 하게 되었다. 입원 중 생각난 친구들에게 다친 사실을 알렸다. 같은 수술을 20년 전 받았던 친구는 한걸음에 달려왔다. 또 다른 친구는 매일 같이 찾아왔다. 다리를 다쳐 술을 먹을 수 없으니 카페에 가서 커피를 시켜놓고 이야기를 나눴다. 생각해 보니 술이 아닌 커피를 시켜놓고 이렇게 오래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지금까지 서운했던 것, 현재의 상황,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게 되었다. 결국 친구가 하는 말에 어이가 없었지만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너희 들은 왜 연락을 먼저 하지 않았는지?’ 따져 물었을 때 친구의 대답이 기가 막혔다. ‘원래부터 네가 먼저 했잖아.’ 그런데 이 말이 귀찮아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냥 당연한 듯 툭 던지는데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내가 쓸데없이 자존심을 세웠던 것 같았다.
그 후로 서너 번 점심을 같이 먹고 커피를 마셨다. 술을 먹을 때 보다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단순히 웃고 떠들 요량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의 나에 대해, 과거 그리고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게 되었다. 술을 좋아하던 나는 술을 마시기 전에는 사람을 사귀는 것이 어려웠다. 술을 함께 먹어야 친해지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번 일들을 겪으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술을 마시면 솔직해지긴 한다. 그런데 커피와는 다른 느낌의 솔직함이다. 술은 감정의 증폭제라면 커피는 감정의 윤활제쯤이 될 것 같다.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것을 즐겨하지 않지만 가끔 이런 것도 의미가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