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지 피와 철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프로이센의 농업 시스템은 서부 독일이나 서부 유럽의 다른 국가들과는 핵심적인 차이가 있었다. 프로이센이 아닌 독일을 포함한 유럽 국가들에서 귀족들은 땅의 대부분을 소유하고서 땅을 빌려주고 임대료나 농부들에게 소작료를 받았다.
비록 중세부터의 관습으로 인해 어느 정도 농노제의 상태가 있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농부들은 상당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고 특권을 향유하였으며, 점차적으로 자신의 토지와 시민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었고 또 그렇게 하였다. 서방에서 농부들은 지역사회의 핵심적 부분을 형성했다.
지주들은 다른 모든 부분에서의 퇴보 탓에 여가 속에서 문화를 발달시켰다. 그래서 이 지주들의 문화가 다른 것들 사이에서 삶의 문명화된 특성이 되었고, 예의 범절, 사상과 예술의 개선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된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센의 융커는 여가를 즐기는 인간이 아니었다. 융커는 오늘날 공장의 관리자가 그렇게 하는 것처럼 자신의 넓은 토지를 관리하느라 힘들게 일했다. 융커의 땅 없는 노동자들은 사실상 노예들로 취급받았다. 자신의 거대한 부동산 안에서 융커는 절대적인 군주였다.
서방에서 그랬던 것과 같이 큰 도시나 상당한 중간 계층 어느 쪽도 존재하지 않았다. 바로 도시와 중간 계층이라는 요소는 문명화된 영향을 주어서 융커의 신경을 건드리고 짜증나게 할 수도 있었다.
반면에 서방의 문명화된 그랑 세뇌르 (대영주를 말한다 - 역자 주) 와 달리 융커는 무례하고, 횡포를 부리는 지배자이고, 거만한 종류의 인간이었다. 문명이나 문화적인 요소가 없이 공격적이고 잔인하며 우쭐대기 좋아하는 자만한 성격에 편협한 사로를 가졌던 것이다. 예를 들기 조금 좋은 경우를 찾는다면, 몇몇 독일 역사가들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사적인 생활에 주목했는데, 바로 가장 성공적인 융커의 삶이었던 것이다.
"피와 철"의 이 사도는 1866년과 1817년에 거의 천 년간 지속되어 왔던 분열된 독일에 무력으로 끝장을 가져다 주었고, 영방국가들의 연합체를 대 프로이겐으로 대체했던 정치적인 천재였다.
물론 이 철혈재상이 만든 체제는 프로이센의 독일이라고 불릴 수도 있었다. 비스마르크의 독특한 창조물은 우리가 우리 시대에 알고 있는 독일이었다. 거의 한 세기 동안 유럽과 세계의 문제아이자 그 속에 재능있고 활력 있는 국민을 포용하고 있는 국가이다.
이 주목할 만한 남자와 카이저 빌헬름 2세 그리고 마지막으로 히틀러가 군사 카스트와 많은 수의 기묘한 지식인들의 조력을 받아서 권력과 지배에 대한 욕망, 억제되지 않는 군사주의에 대한 열정, 민주주의과 개인의 자유에 대한 경멸 그리고 권위와 권위주의에 대한 갈망을 자주 반복함으로써 머리 속에 심어주는 것에 성공했다.
그러한 마법 주문 속에서 이 나라는 1945년 봄에 히틀러의 몰락과 함께 겉보기에는 파괴되었을 때까지 위대한 높이로 떠올랐고 몰락했다가 다시 떠올랐다. - 어떤 확신을 가지고 말하기에는 아마도 너무 이른 것일지도 모른다.
1862년 프로이센의 수상이 되는 날에 비스마르크는 선언했다.
"이 날의 위대한 문제들은 결의와 다수결을 통해서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 그것은 1848년과 1849년의 남자들이 저지를 실수였다. - 그러나 오로지 피와 철로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정확하게 비스마르크가 문제를 해결하고자 계속 사용하였던 방식이었다. 거기에 약간 외교적인 수완을 발휘한 점이 더해지기는 하고, 자주 기만적인 종류의 것이었기는 했지만 말이다. 비스마르크의 목표는 자유주의를 파괴하고 보수주의 권력을 북돋우는 것이 될 것이었다. - 즉, 융커들, 육군 그리고 황제 - 그리고 로스트리아에 맞서서 프로이센이 지배 권력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독일에서 뿐만 아니라 가능하다면 유럽 전체에서 마찬가지의 권력을 손에 쥐는 것이었다.
"독일은 프로이센의 자유주의를 추구하지 않는다."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의회의 국회의원들에게 말했다.
"하지만 프로이센의 힘을 추구한다."
비스마르크는 먼저 프로이센 육군을 증강시켰고 의회가 추가 자금 지출을 위해 투포하는 것을 거부하자 단순히 자신의 돈으로 예산을 증가시켰으며 마침내 의회를 해산시켰다. 강화된 육군으로 비스마르크는 세 개의 연속적인 전쟁을 치루었다.
첫 번째는 1864년에 덴마크와 싸운 전쟁으로 슐레스비히 공국과 홀슈타인 공국을 강탈해서 독일의 통치 아래에 집어 넣었다.
두 번째는 1866년에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으로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되는 결과를 낳았다. 오스트리아는 수 세기 동안 독일 국가들 가운데 첫 번째 가는 국가였지만 마침내 독일 문제들에서 배제되었다. 비스마르크가 이제 창설하는 작업을 계속했던 북독일 연맹에 오스트리아는 참가가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