퓌러의 출현 2

히틀러에게 친구들이 생겨나다

by 꿈많은 미소년

반 유태주의에 관한 주장 때문에 설득력이 좀 떨어지기는 했지만 (히틀러가 유태인처럼 행동하고 있다니!), 히틀러에 대한 고발 내용 그 자체는 대체로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소책자를 출판했다고 해서 히틀러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예상했던 것 만큼 더 나아가지는 못했다. 히틀러는 즉각적으로 공개 집회에서 이 소책자를 쓴 자들을 당내 재판에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그리고 드렉슬러 자신이 이 반란을 부인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두 개의 특별한 당 집회에서 히틀러는 자신의 평화 규약을 당의 결정으로 공표하고 그것을 받아쓰게 했다. 히틀러의 당 내 영향력은 확고했고, 집회에서 당원들은 사실상 히틀러가 가져다 둔 조각상 같았다. 이제 당의 주요 의사 결정을 하던 당 위원회는 해체되고 대신 그 권력은 당수로서 히틀러에게 독재적으로 주어졌다. 창피를 당한 드렉슬러는 당 권력 일선에서 물러나 명목상의 당 명예 대표 역할을 받게 되었지만 곧 허수아비 신세가 되어 잊혀졌다. 하이든이 말한 것처럼, 당의 의회파 반란군 (영국의 1642년~1651년 사이의 내전 당시의 의회파를 말한다. 크롬웰 등의 활약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 역자 주) 에 대한 왕당파 (마찬가지로 영국 내전의 왕당파를 말한다) 의 승리였다. 하지만 이것은 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이 시점에, 즉 1921년 7월에 먼저 나치 당의 법이자 이후 제 3제국을 통치하는 법이 될 "지도자 이론"이 수립되었다. 바로 독일 역사에서 "퓌러"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지도자"는 이제 당을 재조직하는 일에 착수했다. 슈테르네커브로이의 뒷 구석 음침한 방은, 히틀러에게는 "사무실이라기 보다는 장례식장의 관"보다 더 정이 가지 않았는데, 이제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버리기로 되었고, 코르넬리우스슈트라세에 위치한 다른 선술집에 새 사무실을 구했다. 이번에는 더 밝았고 좀 더 제대로 된 방에 가까워졌다. 이 설치 계획에 따라 중고 아들러 타자기를 구매하였고, 금고, 파일 수납용 캐비넷, 가구 전화등을 구입함과 아울러 점차적으로 월급을 지급하는 정규직 비서를 채용하게 되었다.



돈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거의 일 년 전인 1920년 12월에 당은 심각한 부채로 경영난에 시달리는 신문인 포엘키셔 베오바흐터를 인수했다. 이 신문은 반 유태주의 소문거리나 지면에 실으며 일 주일에 두 번 발간되던 것이었다. 신문을 인수할 육만 마르크의 대금은 정확히는 히틀러가 비밀을 고수하고 있었지만, 에크하르트와 룀이 리터 폰 에프 소장을 매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에프 장군은 라이흐스베어에서 룀이 속한 부대의 사령관으로 군의 상관이기도 하면서 자기 자신도 나치당의 당원이었고, 자금으로 모금할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이다. 아마 이 거래에 관해서는 육군의 비밀 기금에서 자금을 조달했을 것이라는 설명이 그럴 듯 하다.


1923년이 시작될 무렵 포엘키셔 베오바흐터는 일간지가 되었고, 그렇게 해서 당의 복음을 그 속에서 설교하는 일간지를 가진다고 하는 모든 독일의 정치 단체들 중에서 필수불가결한 수단을 히틀러가 얻게 된 것이다. 매일 발행되는 정치 신문사를 운영하는 데는 추가적인 비용이 들었고, 이러한 자금은 더 많은 프롤레타리아의 거친 목들과 같았던 이전과는 낯선 원천들처럼 보이는 곳에서 나와야 했다.

부유한 피아노 제조업자의 부인인 헬레네 베흐슈타인 부인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처음 만남을 가졌을 때부터 부인은 이 젊은 선동가에게 호감을 가졌고, 히틀러가 베를린에 방문할 때는 베흐슈타인의 집에 머물도록 초청했다. 그리고 저택에 머무는 동안 파티를 개최해서 히틀러가 자산가들과 만나서 자신의 정치 운동에 거액의 기부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일간지를 운영하기 위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한 금액 중 일부는 핀란드의 번창하는 제지회사의 주식을 소유한 발트인인 게르트루트 폰 자이틀리츠 부인이 부담했다.


1923년 3월에 어머니가 미국인이고 자신의 교양있고 부유한 가족은 뮌헨에서 예술 출판 회사를 소유하고 있었고 본인은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에른스트 푸트치 한프슈텡글은 포엘키셔 베오바흐터가 가진 장기대출을 상환할 수 있도록 당에 천 달러의 융자를 제공했다. 이 미국 달러의 자금은 당시와 같이 인플레이션이 극심했던 시기에 마르크로는 엄청난 액수였고, 당과 그 기관지에는 거대한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한프슈텡글과의 우정은 금전적인 도움 이상으로 확대되었다. 바로 이 싸움꾼에 불과하던 젊은이가 뮌헨에서 당당한 정규 정치가로의 문을 열 수단이 될 수 있도록 후원해 주는 명망있는 가문들과의 협력에서 첫 번째가 되었던 것이다.


푸트치는 히틀러의 좋은 친구가 되었고, 결국 당의 외신 담당 부서의 책임자가 되었다. 괴짜이고 키가 크고 야윈 체격으로 흐느적 거리던 그 남자는 냉소적인 재치가 어느 정도는 자신의 얕은 정신을 보상해 주기는 했는데, 한프슈텡글은 저녁에 여러 곡을 하는 피아노 연주에 관해서는 고도의 기교를 보여주는 거장이었다. 심지어 자신의 친구가 권력을 잡으려 베를린에 온 후에, 퓌러로부터 다급한 소환에 응답할 무리에 가담하는 것을 사양했다. 자신의 피아노 연주 - 정말 격렬하게 쿵쾅대며 연주를 했다 - 그리고 익살을 부리는 광대짓은 히틀러의 기분을 누그려뜨렸고 심지어 피곤한 날에 힘든 마음을 응원하여 기운을 북돋게 해 주었다. 나중에 이 기묘하지만 상냥한 하버드 출신의 남자는, 다른 많은 히틀러의 초기 동지들처럼,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이 나라에서 도망가야만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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