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 마약 중독자? 강간범? 그게 뭐가 중요해?
로젠베르크는 그무렵 디트리히 에크하르트를 만나 그를 통해 히틀러를 소개 받았다. 그리고 히틀러에게 감명을 주었던 로젠베르크는 1919년 말에 나치당에 입당을 하게 되었다. 하긴 명문 대학의 건축학부에 입학하는 것을 허락 받지 못한 남자를 실제로 그곳에서 학위를 수여 받은 남자가 감동을 주리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또한 히틀러는 로젠베르크의 이른바 "학업"이라는 것에 크게 감명을 받았고 이 젊은 발트인이 유태인과 볼셰비키들에 대해 증오를 품고 있는 점에 대해서도 좋아했다.
1923년도 연말이 되어갈 무렵 에크하르트가 죽기 조금 전에, 히틀러는 로젠베르크를 포엘키셔 베오바흐터의 편집장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정리되지 않고 완전히 대충대충인 이 남자를 계속 지원해 주었다. 히틀러는 이 스스로도 혼란스럽과 얄팍한 "철학자"를 나치 운동의 지적인 멘토이자 대외 정책의 최고 권위자 중의 하나로 여겼던 것이다.
루돌프 헤스 처럼, 헤르만 괴링 역시 전쟁 후에 어느 때인가 표면적으로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뮌헨에 왔다. 그리고 괴링 또한 아돌프 히틀러의 개인적인 마법 아래에 놓여 그에게 매혹되었던 것이다. 독일 제국의 가장 위대한 전쟁 영웅들 중 하나이자, 명성이 자자한 리히트호펜 전투기 전대의 마지막 지휘관이며, 푸르 라 메리테 훈장의 수훈자로 독일 최고 등급의 훈장을 받았던 괴링도 이렇게 해서 히틀러의 부하가 되었던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사회로 돌아온 괴링이 깨달은 것은 대부분의 퇴역군인들보다 평화기의 시민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훨씬 더 힘들다는 것이었다. 괴링은 잠시 동안 덴마크에서 화물기의 조종사가 되었다가 이후에 스웨덴에서 같은 일을 했다. 어느 날 괴링은 스톡홀름에서 좀 떨어진 거리에 있는 에릭 폰 로젠 백작의 사유지로 비행기를 조종해서 날아갔다. 백작의 저택에서 손님으로서 머무는 동안 스웨덴의 최고 미인들 중 하나인 구성이 포크 남작부인이며 로젠 백작부인의 여동생인 카린 폰 칸트초프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아주 약간의 어려움이 닥쳐왔다. 우선 카린 폰 칸트초프는 간질 환자였으며 결혼한 유부녀로서 여덟 살짜리 아들이 있었다. 하지만 칸트초프는 사랑을 위해 자신의 결혼을 해소할 수 있었었고, 이 용감하고 늠름한 젊은 조종사와 결혼했다. 상당한 규모의 지참금을 가지고 와서 새 남편과 뮌헨으로 왔고, 거기서 훌륭하고 화려하게 살면서 괴링은 대학에서 취미 삼아서 학문에 조금 발을 들여놓았다.
하지만 오래 가지는 않았다. 괴링은 1921년에 히틀러와 만났고, 나치당에 입당했으며, 당 금고에 관대하게 (그리고 히틀러에게도 개인적으로 많은 돈을 제공했다.) 거액을 기부했다. 나치당원이 된 괴링은 자신의 지칠줄 모르는 에너지를 룀이 돌격대를 조직하는 것을 돕는데 쏟았다. 일 년 뒤인 1922년에 괴링은 돌격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런 유명 인사들에 더해서 이보다는 덜 알려진 인물들이 엄청난 수가 입당했다. 다만 더 많은 수의 도덕적으로 불미스런 자들이 당 독재자 주위의 모임을 형성했다. 리스트 연대에서 히틀러의 선임 부사관이었던 막스 아만은 거칠고 무례하며 상스러운 인물이었지만 또한 유능한 조직자이기도 했다. 아만은 당과 당 기관지 포엘키셔의 사업 관리자로 임명되었고, 양쪽 모두의 재정에 빠르게 안정을 가져다 주었다.
히틀러는 자신의 전속 경호관으로 울리히 그라프를 선택했는데,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로서 도축업자의 도제이자 명성이 자자한 싸움꾼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법정 사진사"로서 수년 동안 히틀러를 촬영하도록 허가 받은 유일한 남자로 하인리히 호프만을 지명했다. 호프만은 한쪽 다리를 저는 남자였는데 그 충성심은 마치 개 같았고 이점은 도움이 되는 것이었는데 마침내 백만장자가 된 것이다.
또다른 히틀러의 최애 싸움꾼은 크리스티안 베버로 말 거래업자이며 뮌헨의 지저분한 싸구려 술집의 문 앞을 지키는 보초 노릇을 이전에 했었고, 음탕한 술꾼이기도 했다.
이 무렵 히틀러의 가까이에 대가온 이는 헤르만 에세로 히틀러와 경쟁을 할 수 있을 만큼 연설 실력이 뛰어났으며 포엘키셔 베오바흐터에 기고한 유태인을 헐뜯는 기사들은 당 기관지의 앞면을 장식하며 당원들의 편협하고 광신적인 정신 세계를 이끄는 역할을 했다. 에세가 자신의 여주인의 관대함에 기댄 덕분에 잠시 동안 잘 살았다는 점에 관해서는 비밀로 하지도 않았다. 악명높은 협잡꾼으로 심지어 같은 나치 당원이라 하더라도 자신에 거슬리게 될 경우에는 "폭로하겠다"라는 위협에 의지하면서, 에세는 나치당 속의 나이 많고 그나마 더 품위 있는 자들에게 너무나 혐오스럽게 대했기 때문에 참다 못한 이들이 에세를 당에서 추방할 것을 요구했다. 여기에 대해 히틀러는 공개적으로 쏘아 붙였다.
"나는 에세가 비열한 악당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아는 또한 에세가 나에게 도움이 되는 한 최대한 그를 붙들 것이다."
이것은 히틀러가 자신의 가까운 협력자들 거의 모두에게 취했던 태로였다. 그 작자들이 얼마나 어두운 과거를 가졌든지 그것은 상관 없이 - 아니 사실은 현재도 그렇게 구린 구석이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살인자들, 메춘업자들, 동성애자 변태들, 마약 중독자들, 혹은 그냥 평범한 무뢰한들이 모두 히틀러 자신의 목적에 적절하게 역할을 하기만 한다면 그 점에서는 차이가 없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