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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녀 K May 24. 2023

8. 모정의 세월

의사 선생님의 말 한마디에 울고 웃다.

방사선 치료 기간 중, 병원에서 지화자 여사에게 처방해 준 약이라고는 구토 억제제와 유산균뿐이었다. 매 끼니마다 정성스럽게 잘 차려 먹어 체력을 키우는 일만이 암 환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치료법인 것이다. 유학 생활을 통해 한 끼 한 끼 끼니 때우기에 익숙했던 장녀 K로서는 평소 엄마 지 여사의 까다로운 음식 투정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여하튼 방사선 치료를 시작하자, 지 여사는 참 성실하게 암과 싸웠다. 막내 이모가 공수해 온 콩국수, 남편 김필두 씨가 매일 사온 2+ 한우, 둘째 딸 효주가 싸 오는 밑반찬들을 열심히 챙겨 먹었다. 살기 위해 방사선 치료의 부작용인 구토 증세를 참아가며 꿀꺽꿀꺽 영양을 보충했다. 마치 건포도처럼 쪼그라든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장녀 K는 지 여사의 생에 대한 의지가 아름답게 느껴졌다.


지 여사의 마음에 가득 찬 손녀에 대한 사랑, 이모들에 대한 고마움, 남편에 대한 애증, 자식에 대한 좋은 추억이 투병할 수 있는 의지와 용기를 준 것이다. 장녀 K는 지 여사의 여윈 등을 편지지 삼아 삶의 의지를 불어넣어 준 신께 감사 기도를 올렸다.




방사선 치료를 받고 온 어느 날, 장녀 K는 지화자 여사가 누운 침대 발치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통에 작게 신음 소리를 내는 지 여사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꺼냈다.


"엄마, 만약에 하느님이 엄마를 대신해서 지금 가족 중에 한 사람에게 그 병을 앓게 한다면, 그러라고 하고 싶어?"


"안돼! 우리 가족은 절대 안 돼!" 하며, 지 여사는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장녀 K는 엄마가 겪는 고통의 정도를 이해하고 싶었을 뿐인데 …. 지 여사는 상상만으로도 진저리를 쳤다.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것 같아 장녀 K는 순간 머쓱했다.



드디어 사십여 일간의 피와 살을 말리는 방사선 치료가 끝났다. 곧바로 대장암 전문의의 진료가 잡혔다. 진료를 보려면 먼저 CT를 찍어야 한다. CT 촬영 후, 다시 일주일을 기다려야 촬영한 사진을 본 의사 선생님들의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암이 작아졌을까? 아예 없어질 수도 있나? 여전히 암이 남았다면, 엄마의 체력으로 이 모든 치료 과정을 다시 버틸 수 있을까? 우리 가족 또한 이 지난한 스케줄을 다시 견뎌낼 수 있을까? 나는 어떨까?’


일주일 지난 후, 회사에 반차를 낸 둘째 효주가 지 여사와 함께 병원에 갔다. 대장암 전문의로 우리나라에서 손에 꼽히는 장이상 선생님이 지 여사의 담당의이다. 지 여사가 입원해서 항암치료를 받을 때 회진 의사로 당시 무뚝뚝하게 지 여사를 살피고 갔는데, 지 여사는 의사의 검지 손가락에 껴진 묵주 반지에 괜히 마음이 놓였다고 했다. 하지만 병원을 다녀온 후, 지 여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장이상 선생님은 차가운 표정으로 모녀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앞으로 3개월 후에 다시 결과를 봐야 하겠지만, 잘 관리하지 않으면 항문을 삭제하는 방법을 써야 합니다."


허황된 말로 환자를 안심시켜 주길 바라지도 않았지만, 우리에겐 듣는 순간 폭탄과도 같은 말이었다. 하루에 수 십 명의 중환자를 만나는 직업에서 오는 피로감일까. 의사의 냉정한 말에 지 여사와 딸은 한없이 작아졌다. 명의인 전문의로부터 치료가 먹히지 않으면 '장루-인공 항문'을 달아야 한다는 안내(?)를 들은 모녀는 초라하게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날 저녁, 지 여사의 집에 장녀 K의 이모들이 모였다. 동생 효주의 설명을 들은 지 여사와 이모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막내 이모가 갑자기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동짓섣달 긴긴밤이 짧기만 한 것은

근심으로 지새우는 어머님 마음 ….'


갑자기 용인 이모도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흰머리 잔주름이 늘어만 가시는데 ….

한 없이 이어지는 모정의 세월’


어느덧 한숨만 쉬던 지화자 여사도 노래를 불렀다.


‘아~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이 일듯

어머님 가슴에는 물결만 높네.’


세 자매의 노래가 끝나자, 동생 효주가 오랫동안 집에 고이 모셔뒀던 돌배주를 찾아 꺼내왔다. 이모들은 한잔씩 하면서 엄마가 어느 정도 회복할 때까지 함께 집에 머물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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