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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녀 K Jun 07. 2023

10. 감정 쓰레기통

K 장녀는 동네북

지화자 여사의 최종 항암 치료와 방사선 치료가 끝나고 6개월 후, 두 번째 정기 검진 시기가 다가왔다. 이제 지 여사의 머리카락은 빠지는 것보다 새로 나는 게 더 많았다. 화장실을 같이 쓰는 장녀 K는 엄마의 회복을 누구보다 먼저 알았다.


하루종일 침대 아니면 거실 소파에 몸을 뉘었기에, 햇볕을 쬐지 못한 지 여사의 피부색은 하얗다 못해 파랬다. 항암 부작용에도 살아남은(?) 옛 머리카락은 마치 헤어피스를 드문드문 붙인 것마냥 덜렁거렸다.


"엄마, 나 가끔 다니는 청담동 미용실 부원장님이 커트를 잘하시는데, 새로 나는 머리카락에 맞춰 한번 잘라보는 게 어때? 이번 기회에 멋지게 숏 커트 어때? 지금은 보기에 너무 이상해."


"야, 한 올도 너무 아깝다야. 좀 있어봐. 좀 나아지면 염색도 하고 머리도 한번 해야지."



"엄마, 돈 모자라서 헤어피스 붙이다 말고 도망 나온 사람 같아."


"그래? 엄마가 아파서 그런 거지. 너는 하여튼. (까르륵)"


지 여사는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에 무척 민감했다. 머리가 휑해지는 것을 변기에 앉을 때 느끼는 고통만큼이나 쓰라려했다.




평소 자신의 병을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유쾌하게 넘기던 지화자 여사. 하지만 어느 포인트에서 서운해하고, 예민한 환자로 바뀌는 지를 장녀 K는 도통 알 수 없었다. 쾌활한 성격이지만, 지 여사는 아픈 후로 때때로 다른 사람으로 돌변했다. 하루는 남편에 대한 서운함과 분노, 하루는 세월의 무상함에 대한 슬픔, 어떤 날은 돌아가신 외할머니 이야기로 눈물지었다. 딱히 답도 없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장녀 K는 엄마 대신 하던 집안일을 멈추고 작업실로 도망가고 싶었다.


‘엄마의 살아온 날들에 대한 기억은 행복보다 슬픔이 많은 걸까? 엄마는 왜, 자신의 삶이 행복하지 않다고 슬퍼하나? 이 모든 게, 다 아빠 때문일까?’


엄마의 하소연을 듣다 보니, 문득 '이런 게 간병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 여사가 바깥 출입을 안하고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지 여사와 장녀 K 둘만이 무거운 정적을 버틸 때가 많았다. 지 여사의 분노와 후회가 뒤범벅된 눈물 어린 탄식에, 장녀 K 또한 어쩔 수 없이 울적했다. 엄마가 늘상 큰 딸에게 쏟아부은 '나쁜 남편'에 대한 이야기는 장녀 K로 하여금 아빠와의 기억을 현실보다 나쁘게 만들었다.


장녀 K도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기왕에 엄마가 아파버린 이 시점에서 엄마와 아빠 둘 사이가 좋은 게, 무엇보다 자식들에게 위로가 되고 안심이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는 지금 많이 아프다. 화장실을 갈 때마다, 방사선에 익어 버린 살갗에서 피가 나온다고 한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장녀 K는 다정하게 엄마를 케어할 힘이 나지 않았다. 암이라는 질병은 장녀 K를 비롯해 온 가족을 엄마의 공간에 빠져들게 하였다. 그 누구도 정신적으로 암을 극복하고 홀로 설 수 없었다.



장녀 K의 마음은 작업실을 비우는 시간만큼이나 불안에 쪼그라들었다. 그러나 엄마의 암보다 장녀 K의 고통이 클 수는 없다. 장녀 K가 무의식적으로 조급하게 굴면, 지화자 여사는 생색을 내는 것이냐며 서운해했다.


“너, 일 있으면 나가. 이렇게 하는 거, 나 필요 없어.”


“엄마 밥 먹는 거 보고 나간다고.”


“지금 안 먹을 거야.”


“엄마, 밥 먹는 것까지가 치료잖아.”


“너 편하라고, 지금 밥 먹으라고? 니 속마음 알았으니까, 이제 나가. 꼴도 보기 싫다야.”


장녀 K도 약이 올랐다. 밥투정으로 엄마가 자신에게 화풀이하는 게 분명하다. 기회가 될 때마다 사설 요양보호사를 부르자고 했다. 하지만 엄마는 요양보호사를 몇 번 써보고는 극구 싫다고 했다. 자주 오는 이모들과 장녀 K가 번갈아가며 자신의 식사 준비를 하면 된다는 것이다. 사실 몇 번의 푸닥거리로 이미 장녀 K는 기운이 쏙 빠졌다.


장녀 K로 하여금 더 화가 치밀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매일 옆에서 간병하는 자신에게는 실시간 감정 쓰레기나 몽땅 퍼붓고, 어쩌다 동생 효주가 얼굴이라도 비추면 그렇게 미안해했다. 기쁨이를 두고 어떻게 왔냐고. 장녀 K는 일찍이 작업실에서 숙식을 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아픈 엄마와 싸울 수도 없으니 속병이 날 지경이었다.




예약된 진료 날짜가 닥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장녀 K와 지 여사는 잔뜩 긴장한 채 함께 병원에 갔다. 이번에는 일주일 전에 했던 CT촬영과 피검사 자료를 토대로 담당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지 여사의 상태를 듣는 날이다. 먼저 방사선 담당 의사 선생님을 만났다.


"사진 상으로는 암 덩어리가 보이지 않네요, 여기 보이시죠? 아무것도 없어요. 만져지지도 않고요. 치료가 몸에 잘 맞고 있네요.”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너무너무 듣고 싶었던 말이에요."


엄마가 안도하며 큰 소리로 우셨다. 장녀 K는 순간 깜짝 놀랐다. 그동안 숨을 안 쉬고 있던 자신을 발견하고, 처음으로 진료실 안의 공기를 힘껏 끌어마셨다. 어느새 마스크 안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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