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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녀 K Jun 14. 2023

11. 원망의 늪

딸은 천덕꾸러기

별일 없는 것이 행복인지 몰랐다. 견디기 힘든 일이 생기면 그때가 돼서야 평화로운, 어쩌면 단조롭고 무료한 일상의 소중함을 깨우친다. 장녀 K는 반년 동안 이어진 엄마의 투병 생활에 밍밍했던 지난날들이 꿈만 같다. 엄마 지화자 여사가 건강을 완전히 찾는다 해도, 자신은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기 어렵다는 생각이다.


장녀 K는 작업실에서 홀로 사브작 거리던 시간이 그리웠다. 언제나 다음 전시를 준비하며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 모든 게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직장 생활에 아이까지 키우며 엄마의 밑반찬을 준비해 오는 동생 효주에 비하면 처지가 좀 나은 편이었다. 장녀 K 또한 엄마를 위한 시간을 더 내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엄마가 자신과 동일시하여 아무 생각 없이 이일 저 일을 요구할 때면, 참아왔던 분노의 '버튼'이 눌러져 폭발 직전까지 갔다.


“니 속 마음이 어떤지 다 알았어.”


“그런 게 아니잖아. 아빠가 엄마에게 서운하게 할 때마다, 왜 나한테 화를 내고 난리야?”


“내가 언제!”


‘언제나!’


속에서 악! 소리가 난다. 예민해진 지 여사가 옆에 있는 장녀 K를 난도질하면, 장녀 K 또한 마음속 깊이 가라앉혔던 감정의 찌꺼기들이 소용돌이치며 올라온다. 지 여사가 그저 한바탕 울고 싶어 찔러대는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장녀 K도 사람이다. 밑도 끝도 없이 당하면 아픈 것이다.



지 여사는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안쓰러운 이야기를 하다가도 갑자기 남편 이야기로 화를 냈다. 그렇게 해서 울기 시작하면, 급격하게 지 여사의 기력이 빠졌다.


"나 같으면 재발할까 무서워서라도 그만 생각하겠어. 치료라고 생각하고 재미난 예능 티브이라도 봐."


"너, 할 일 있으면 얼른 나가.”


"지금 나갈 거야."


다른 날,


"어제 너네 아빠가 나한테 뭐라는 줄 알아? 자기 친구 중에 암에 걸렸다 나은 누구누구가 위암 수술을 두 번이나 했는데, 아직까지도 멀쩡히 살아있대. 내가 항암 치료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나한테 그렇게 말하는 게 사람이니?"


"그러네. 아빠는 고생은 고생대로 다하고, 말을 참 예쁘게 못 하네."


"니 아빠가 한 번만 더 그렇게 말하면, 그 저의가 뭔지 따질 거야. 대답 똑바로 못하면 가만히 안 둬."


"엄마, 그만 생각해. 아직까지도 아빠를 열렬히 사랑해 주는 사람은 엄마 밖에 없네. 아빠는 왜, 아직까지도 이 사실을 모를까?"


"누가! 너. 빨리 니 볼 일 보러 나가."  


엄마 말을 듣고 있자면, 약이 올라 심장에 열이 찬다. 장녀 K도 어떻게든 대꾸를 해야만 살 것 같았다.  




막내 이모 지말자 여사가 주말에 올라치면, 집안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막내 이모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앞치마를 두르고, 종종거리는 걸음으로 일거리를 찾아서 뚝딱 해냈다. 하루는 엄마 지화자 여사가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음식 손맛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막내 이모는 정작 기억이 없다고 했다. 게다가 집밥이 맛있었던 적이 없어서 과일만 먹었다고 슬그머니 말했다.


지말자 여사는 솜씨를 발휘해, 언니 지화자 여사가 먹고 싶다는 ‘무달적(달전의 경상도 사투리)’을 부쳤다. 달전은 무를 얇게 잘라서 부침가루에 묻혀 부치는 야채전이다. 생긴 모양이 흡사 둥근 보름달이나 반달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장녀 K로서는 생전 처음 보는 음식이었지만, 음식 이름으로는 가장 시적이지 않나 생각해 봤다.



전을 먹으면서도, 지화자 여사는 외할머니가 고생만 하다가 돌아가셨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하지만 지말자 여사는 자신이 외할머니 뱃속에 있을 때, 외할머니가 자신을 죽이려 했던 것만 기억난다고 말했다. 간장을 찾으러 주방에 갔던 장녀 K는 들려오는 자매의 대화에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모.”


“우리 어릴 때 들은 이야기야. 글쎄 너네 외할머니가 앞 집에 살던 일용이 엄마랑 몇 년 동안 한 달 차이로 아기를 셋이나 연달아 낳았대. 근데 일용이 엄마가 아들을 낳으면 우리 집은 딸을 낳고, 일용이 엄마가 딸을 낳으면 우리 집은 아들을 낳고 그랬대.”


“그래서, 외할머니가 자기 뱃속에 있는 이모를 죽이려고 했다고?”


“일용이 엄마가 한 달 먼저 아들을 낳자, 니네 외할머니가 뱃속에 있는 아기가 딸이라 믿은 거야. 그래서 딸 낳기가 싫었던 외할머니가 애 뗄라고 자기 배를 막 주먹으로 쳤다는 거야.”


“오, 세상에. 말도 안 돼. 또 아기의 성별은 어떻게 안다고 그런 미친 짓을 한 거지?”


“배 모양이 다르게 생겼었대. 참, 그때는 왜 그랬겠노.”


가만히 듣고 있던 지 여사가 끼어들었다.


“야, 너 잘못 알고 있어. 그거 내 이야기야. 딸이라고 태어나자마자 아를 죽으라고 엎어 놨대잖아.”


“아니야, 언니. 나 태어나기 전에 엄마가 배를 막 이렇게 때렸대.”



막내 이모 지말자 여사는 애타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배를 때리는 흉내를 냈다. 기억이 서로 뒤엉킨 자매. 신생아 때 이런 이야기를 들은 것도 아닐 텐데 …. 딸이라서 태어날 때부터 환영받지 못했다고, 도대체 누가 알려 줬던 걸까? 장녀 K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자식이 많아서 그때는 다 그랬다는 자매의 푸념에는 뭐라 할 말을 잃었다.


그러려니 하고 숙명인양 받아들인 지화자 여사와 지말자 여사. 장녀 K는 이런 두 자매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장녀 K는 사실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오래전, 미국에 1년 정도 연수를 가기 전에 잠시 병원으로 찾아뵀던 게 마지막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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