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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녀 K Jun 21. 2023

12. 이건 아니야

마음 단디 무라

모든 게 뽀송했다. 외출 후 돌아오면, 언제나 장녀 K의 방안 침대 위에는 빨래가 곱게 개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엄마 지화자 여사가 아픈 후, 뭐든 다 뒤엉키고 엉망이 된 것이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자태를 뽐내던, 엄마의 자랑인 화초부터 시들어 죽었다.



암에 의해 엄마의 고통이 극에 달했을 때, 장녀 K는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었다. 엄마의 눈물 어린 옛 얘기를 듣다 보면, 답답함에 숨쉬기가 어려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정말이지 있었는지 없었는지, 기억도 잘나지 않을 일들을 어찌 그리 잘도 기억하는지.


엄마로부터 일방적으로 화풀이를 당할 때면, 장녀 K는 모두가 잠든 늦은 밤이라도 자신의 작업실로 피신했다. 분이 풀리지 않은 채로 앉아 있다 보면, 평소 필요해서 갖춘 작업실의 물건들조차 버겁게 느껴졌다. 최소한의 물건만을 남겨두고 버리기에 돌입했다. 장녀 K가 괴력을 발휘해 내다 버린 보조 책상 두 개는 작업실에 들여올 때도 기사님들이 겨우겨우 옮길 정도로 크고 무거웠다.


'엄마만 다 나으면, 작업실을 먼 곳으로 옮길 거야.'


장녀 K는 이 모든 게 집과 작업실이 너무 가까워서 일어난 걸로 봤다. 집에서 최대한 멀리 가자고 다짐했다. 그때를 생각해서, 이사에 부담이 없도록 미리 버리는 것이다. 하나하나 부시듯이 분해했고, 그것들의 잔해물을 낑낑거리며 분리배출 장소로 날랐다. 그러자 복어 배처럼 부풀었던 화가 조금씩 가슴에서 새어나가는 듯했다.


장녀 K는 지금껏 부모와 함께 자신의 커리어에 대해 고민을 나눈 적이 한 번도 없다. 엄마의 병은 쓰나미가 되어 엄마는 물론 장녀 K의 삶도 할퀴며 지나가고 있었다. 통제 불가능한,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화가 났다. 엄마가 회복되면, 쉰 만큼 혼자 더 열심히 걸어야만 한다. 장녀 K는 벌써부터 겁이 나고 생각만 해도 힘에 부쳤다.


집에서 나와 멀리 떨어져 살아야만 하는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방사선 집중 치료가 끝나던 지난 초겨울, 엄마 지화자 여사가 갑자기 김장을 하겠다고 나섰다. 이게 무슨 정신 나간 소리. 잘 쉬어도 회복이 될까 말까 하는 걱정되는 판국에 김장이라니.... 말이 안 나왔다. 어찌할 것인가? 그렇다고 장녀 K가 김장을 도맡아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할 줄도 모르고, 할 필요도 없는 상황이었다. 누가 암환자에게 김장을 하라고 하겠는가? 엄마와 연달아 싸우는 것에 지친 장녀 K는 동생 효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효주야, 엄마가 아파서 제정신이 아닌가 봐. 김장한대. 네가 좀 뭐라고 해봐. 나 어제도 엄마랑 한판 했어."


"언니는 같이 사니까 나보다 더 힘들지.... 알았어, 내가 엄마랑 통화해 볼게."


결국 동생이 회사를 안 나가는 주말에 김장을 하기로 했다. 결국 장녀 K가 휴일에 쉬어야 할 동생을 불러들인 꼴이 되었다. 아니, 엄마 지 여사가 회사 일과 집안일에 지친 둘째 딸을 부르기 미안해서 장녀 K를 시킨 것은 아닐까?


"이게 다 내가 먹으려고 하는 거야. 내가 먹을 수 있는 게 있어야지, 사 먹는 음식이 음식이니? 생각만 해도 구역질 난다야. 내가 물김치로 그 항암 구토도 견뎠잖아. 막내랑 용인도 날짜 맞춰 오라고 해야지."


"알았어, 엄마. 이번에는 절인 배추 살 거지?"


"그래야지."


절인 배추는 도착 시간을 맞추기 어렵다고, 엄마 지 여사는 결국 생배추를 샀다. 장녀 K는 기가 막혀 입을 닫았다. 다행히 지 여사는 한창 빠지는 머리에 수건을 쓰고 소파에 앉아 이모들과 동생에게 감독관 노릇을 했다. 장녀 K는 거실에 펼쳐진 김치 공장을 보고 작업실로 향했다.



모두가 돌아간 뒤, 밀린 작업을 마치고 돌아온 장녀 K는 난장판이 된 집안 광경에 화가 치밀었다. 뒷정리를 하다 보니 억울한 마음까지 들었다.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심정이었다. 어찌해야 하나. 누구에게 뭐라 말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장녀 K는 식기 세척기를 폭풍 검색했다.


언제부턴가 장녀 K는 부엌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사실 엄마 지 여사가 일을 줄였으면 하는 요량으로, 장녀 K는 지 여사가 만든 반찬을 가져다 먹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지 여사가 만드는 반찬에 장녀 K의 몫은 없었다. 지 여사가 만든 반찬은 통째로 맞벌이 동생 집으로 옮겨졌다. 따라서 집안 개수대에는 매번 반찬 만들다 남겨진 설거지만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장녀 K는 아픈 지 여사가 자신을 친구나 자매, 혹은 도우미 정도로 여기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한 번은 방사선 부작용으로 기구를 이용한 질 운동에 필요한 콘돔을 사야 하는데, 정작 자신이 안 사고 장녀 K에게 사 오라고 했다. 인터넷으로 구매하면 되는 것을 잊어버리고, 꼭 닥쳐서 장녀 K에게 시킨 것이다. 나이 든 아저씨가 서있는 약국을 피해, 젊은 여성 직원이 있는 점포에서 구매했다. 한꺼번에 여러 박스를 사려니 속은 괜히 찝찝하기만 했는데. 어랏, 콘돔을 사다 주니, 그 민망한 마음을 헤아리기는커녕 비싼 걸 사 왔다고 지 여사가 잔소리를 시작한다.


'이건 아니야. 김효정, 네 마음 단디 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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