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꿈에 효녀 되기는 없었다.
지 여사는 ‘엄마 잃은 아이'처럼 장녀 K를 따라나섰다. 지 여사와 장녀 K, 단둘이서 여행을 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장녀 K에게는 동생 딸인 여조카가 하나 있다. 왕기쁨이라는 이름처럼 집안에 기쁨을 주는 존재이다. 하지만 아이가 어느 정도 크자 더 이상 할머니 지화자 여사를 찾지 않았다. 지화자 여사는 서운해했고 장녀 K는 둘만의 여행으로 지 여사 자신을 챙기는 시간을 갖게 하고 싶었다.
낯선 여행지에서 지 여사는 늘 생기가 넘쳤다. 습도가 높아 밖을 돌아다니는 것을 꺼려하는 제주의 여름 낮. 기력을 찾으려는 듯, 지화자 여사는 서귀포 수도원의 넓은 정원을 혼자 하염없이 걸었다.
"여기 참 좋다. 공기가 달라. 정원의 꽃을 누가 관리하는지 너무 좋다."
사람들과 마주치는 걸 극도로 꺼려한 지 여사. 인적이 드문 수도원 안에서 엄마가 마음의 평화를 찾은 것 같아 장녀 K도 마음이 놓였다. 이제야 장녀 K는 서울서 짊어온 자신의 일거리에 집중했다.
사람이 마르면 키도 줄어드는지, 아픈 지화자 여사의 뒷모습은 갈수록 쪼그매졌다. 장녀 K는 엄마가 자신의 이름으로 불려진 날보다 엄마 또는 누구의 부인으로 산 세월이 더 길다는 게 새삼스레 슬펐다. 순간 장녀 K도 엄마의 암에 자신도 책임이 있다는 마음이 들었다.
수도원에서 하루 중 유일하게 수사님들을 마주치는 때는 공동식당에서의 아침식사 시간이다. 장녀 K는 새벽미사를 마치고 오신 수사님들과도 인사를 나누지 않는 지화자 여사를 보고 무안했다. 더욱이 만에 하나 수사님들에게 밥투정이라도 하면 어떡하나 장녀 K는 조마조마했다. 이게 뭐람. 고생을 사서 하는 기분이었다.
지화자 여사에게 수도원에 머무는 혜택은 마치 당연한 것 같았다. 수도원이 호텔도 아닌데, 은연중에 불만을 표시하는 지 여사의 행동은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슬슬 지 여사에 대한 서운함이 화로 바뀌고 있었다.
수도원은 기도에 집중할 수 있도록 Wifi 이용이 제한되어 있었다. 장녀 K는 마음을 다잡고 wifi가 잡히는 수도원 로비에서 마감이 임박한 그림 원고를 그리고 있었다. 핸드폰 등 현대문명의 이기를 불편하게 쓰는 것이 고요를 만드는 데 필요불가결의 요소임엔 틀림이 없다.
이른 저녁, 잠시 그곳에 머물던 한 수녀님은 로비에서 일하고 있는 장녀 K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느새 장녀 K는 수녀님을 붙들고 하소연했다. 처음 만나는 분이다. 하지만 ‘참 효녀네’라는 말 한마디에 장녀 K는 무너졌다. 최근 한 달 동안 겪었던 일들에 대한 마음속 깊이 숨겨둔 이야기를 수녀님께 꺼냈다. 암은 어쩌면 엄마가 자초한 것이라고.... 잘 지내는 손녀 걱정, 바뀌지 않는 남편에 대한 미움. 제주 수도원에서 조차도 그대로라고. 장녀 K가 없는 시간을 쪼개어 같이 있는 것에 아무 생각이 없다고.
"엄마도 속으로는 효정 씨에게 고마워할 거예요."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걸 바라지 않아요. 제 인생의 목표에 효녀는 없어요. 겨우 이제 나로 살기 시작했는데, 엄마가 아파버리니까 모든 게 멈췄어요."
"아니에요. 속으로는 고마워하실 거예요, 그리고 저도 엄마를 위해서 기도할게요."
수녀님도 건강 문제로 요양 차 그곳에서 쉬고 계셨다. 잘 모르는 분에게 나 자신의 감정 쓰레기를 버린 것 같아 죄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