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 집에 딱 두 가지가 동이 났다.
차에 넣을 기름과 주식량인 쌀.
집 앞 주유소를 갈 때마다 여전히 긴장하고 동태를 살핀다. 몇 달 전, 어떤 직원에게 돈을 뜯길 뻔했던 기억 때문이다.
멕시코 주유소에서는 타이어 공기압을 체크하고 바람도 넣을 수 있다. 저번에 그 직원은 뜬금 타이어 마개가 3개 정도 부족하다며 자기에게 70페소를 지불하면 끼워주겠다고 했다.
실컷 운전 잘하고 다녔는데 바퀴 마개에 문제가 있다니 이게 무슨 소린가. 그냥 돈을 지불했다간 넋 놓고 당하는 것 같아서 '남편과 상의해 볼게요.'라고 말하고 자리를 떠났다.
그 이후로 갈 때마다 그 직원만 피했다. 오늘도 다른 직원과 마주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Puede ponerme 300 pesos de gasolina verde?"
(초록색 경유(일반 경유)로 300페소 넣어주시겠어요? )
주유를 하고 카드 결제를 했는데 직원이 미소를 띠며 내게 다가와 말했다.
"시스템에 문제가 있어서 카드결제가 안 됐어요. 현금을 내셔야 해요."
지갑을 보니 딱 280페소가 있었고 20페소가 부족했다.
우선 그에게 280페소를 줬다.
"집이 여기 앞이니 얼른 20페소 가져올게요."
"다녀오면 얼마나 걸리세요?"
"15분 안에 올 거예요."
"네, 그럼 다녀오세요."
직원과 대화를 마무리하고 얼른 차를 돌려 집으로 향했다.
어쩌면 직원은 내게 큰 신뢰가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다시 돌아올 거라는 보증도 없는데 집에 다녀오라고 한다.
'우와, 신기하다. 이렇게 믿고 보내주다니. 얼른 현금을 가져와서 그 신뢰에 보답해야지.'
집에 간 김에 돈도 챙기고 날씨가 좀 쌀쌀해서 옷도 더 따뜻하게 챙겨 입었다.
그러던 와중 뭔가 싸한 기분이 들었다. 당장 은행 어플을 열었다.
주유소에서 300페소가 결제된 것이 아주 정확하게 찍혀있었다. 씩씩 거리면서 주유소에 도착했다.
아까 본 직원의 미소는 온데간데없고 다소 굳은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창문을 열고 이렇게 말했다.
"내 돈 돌려주세요."
전에 배운 공손한 표현의 스페인어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내 돈 주세요."
카드결제한 내역도 캡처해서 보여줬다.
그러자 그는 "la caja, la caja.(계산대, 계산대)"라고 했다.
글쎄. 우선 내 짧은 스페인어와 눈치로 파악하자면, 이따가 현금수납기 열면 내 돈을 주겠다는 말인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손에 현금을 두둑이 쥐고 있었는데도 바로 주지 않고 뜸을 들였기 때문이다.
아무 말하지 않고 그를 가만히 응시를 했다. 그러자 그는 손에 있는 돈을 마침내 내어주었다. 내가 아까 현금으로 지불한 200페소와 20페소가 4장이 있었다.
300페소, 한화로 2만 1천 원. 큰돈은 아니지만 외국인을 상대로 자꾸 시험대에 오르는 기분이다 보니 결코 잃고 싶지 않았다.
멕시칸 친구에게 말하니 주유소에서는 카드를 쓰지 말고 현금을 쓰라고 한다. 직원들이 카드 번호를 외워서 쓰는 불상사가 간혹 생긴다고 했다.
오후에는 쌀을 사서 들어왔다. 남편은 무거운 쌀포대를 지고 있었다. 나는 얼른 열쇠로 문을 열었고 서로 집으로 먼저 들어가라고 실랑이하던 끝에 결국 내가 먼저 들어왔다. 남편도 뒤이어 들어왔다.
티브이도 보면서 쉬다 보니 밤 10시다. 이제 잘 준비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들리는 '똑똑똑.'
밤중에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쿵.' 심장이 순간 내려앉았다.
그리고 복도에서 "¡Las llaves! (열쇠요!)"라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남편과 나는 마음을 졸이며 문을 열었다.
좀 전에 집에 급하게 들어오느라 열쇠를 빼지 않고 그대로 두고 온 것이다.
들어온 이후로 몇 시간 동안 우리 집 열쇠와 차 열쇠가 주렁주렁 밖에 매달려 있었다는 걸 우리 층 이웃이 알려준 것이다. 모르고 그냥 잤다면, 그날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Muchas Gracias. (정말 감사합니다.)"
이웃에게 연신 고마움을 표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잠을 청했다.
컴컴한 방,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 일을 생각해 보았다.
같은 하루, 너무도 다른 두 명의 멕시칸
한 사람은 내게 불신과 실망을, 다른 한 사람은 작은 배려, 고마움, 그리고 안도감을 주었다.
내가 살아가는 멕시코의 오늘, 그 속에서 느끼는 양면성.
기쁨, 행복, 따뜻함 때로는 작은 상처와 안 좋은 기억들을 지닌 채로 살아가지만,
행복이 내 삶의 전체가 될 수 없고, 안 좋은 기억들 조차 나의 전부가 될 수 없다는 걸 배워간다.
오늘 이곳에서의 하루를 긍정적인 기운이 깃든 날로 기억하기로 했다.
내일도 두려움과 감사가 함께하겠지만, 결국 감사하는 삶이 크게 채워지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