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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룹LOOP 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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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안 Nov 10. 2022

룹(LOOP)

#7

 내 경우에는 기운 빠지게 하는 일은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편이었다. 며칠 전 진우 선배에게 문자를 보냈는데 아무 반응이 없었다. 전화를 걸었는데도 신호는 가도 받지 않았다. 조형 예술대 행정실을 지나가는데 맞은편에 진우 선배와 잘 아는 오 조교가 왼손을 흔들며 웃고 다가왔다. 졸업 작품은 잘 돼 가? 아뇨, 방향도 제대로 못 잡았어요. 이러다 전시 기간에 제출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지금 심정이라면 딱 내년으로 유예하고 싶어요. 그러자 오 선배는 내 오른쪽 어깨를 가볍게 치며 다들 그렇게 하다가 제출하게 돼, 라며 눈웃음으로 격려했다. 가볍게 목례하고 스쳐 지나는데 오 조교는 뭔가 생각이 났는지 나를 향해 돌아보았다. 진우, 프랑스로 유학 간 건 알고 있지? 몰랐다는 게 창피해 엉겁결에 아, 예, 라고 둘러대며 복도를 멍때리며 걸어 나왔다. 전화가 안 된 것도, 문자가 안 된 것도, 그럼 유학? 폰을 꺼내 최근 통화 내역 스크롤을 급하게 내려보았다. 마지막 전화를 건 지가 2주 전이었다. 선배는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 부재중 전화만 남기기엔 머쓱해 많이 바쁘시죠? 시간 되실 때 연락 주세요, 라는 문자를 같이 남겼다. 그날엔 그랬다. 바쁘겠지, 라는 생각이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한 구실이 되었다. 아니 사실, 그편이 더 편했다. 얼마나 작품에 몰두하기에 전화 오는 것도 모를 수 있는지, 작품을 대하는 선배의 몰입이 오히려 부럽기까지 했다. 어쩌다 학교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선배가 작업 중인 작품의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운이 좋은 날엔 과 동기들과 함께하는 술자리에서 선배를 흘끔흘끔 훔쳐보는 것도 내겐 소소한 행복이었다. 선배의 오며 가며 듣던 작품이 드디어 완성되어 전시를 열게 되었을 때 풍성한 꽃다발을 안고 전시장으로 걸어가던 느낌을 잊을 수 없었다. 가장 먼저 도착해 축하해 주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선배의 작품에 머무는 시간에 같이 머물고도 싶었다. 이렇게 유학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 듣게 될 줄은⋯. 더 기분이 잡치는 건 인스타그램에 내 계정이 차단되어 있음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손절 당한 셈? 물론 선배와 내가 섬 타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렇지 차단당할 사이도 아니지 않나? 먼 거리감보다 더 쓰라린 건 그의 마음에 텅 비어 버린, 내가 머물 수 없는 공간마저 차단당한 것 같아 기분이 더러웠다. 그와 나의 관계가 차단이라는 사실에 자글자글 분노마저 끓어올랐다.
  너는 재능이 많아, 어릴 때부터 익히 들어온 말이었다. 어쩌면 그 말에 미혹돼 살아온 나날이었는지 모른다. 그래도 재능이 없다는 말보다는 낫게 들렸기에 그 문장을 심히 확대하거나 과장하며 스스로 갇힌 시간이었을까. 모든 게 아리송하다. 재능이 많은데 재능과는 무관한 작품들이 완성돼 차곡차곡 쌓여 갔다. 졸업 전에 탄탄한 경력과 매 전시마다 각광을 받는 작품들을 보면 나는 언제 저렇게 되나, 하는 은근한 부러움이 없었던 건 아니다. 비슷비슷한 작품들인데 어떤 차이인지 몰라도 상을 받거나 높은 평가를 받는 선배들과 동기들이 눈에 늘어 가는 것을 확인해야 했다. 진우 선배는 여러 번 주목받자 사람들과 손절하고 프랑스로 유학을 가 버렸다. 연수의 이번 졸업 작품은 몇몇 갤러리와 교수에게 이미 낙점이 되었다는 말도 들려왔다. 그렇다고 내가 빈둥빈둥 손 놓고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몇몇 작품전과 갤러리에서 실전 경험을 쌓아 보기도 하고, 나도 저 정도쯤은 할 수 있어, 하고 달려들어도 보았다. 그런데 늘 미묘한 차이가 따라붙었다.
  정당하게 물권을 소유했는데도 부채감이 떠나가지 않는 건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노인의 간청을 뿌리치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나도 썩 편한 것만 아니었다. 무슨 대단한 사연이 있길래 공원까지 나를 불러내 모의해서라도 찾으려고 한 걸까? 그렇게 소중한 물건이었다면 처음부터 관리를 잘하던가. 몇십 년을 모았다는 노인의 말이 짐짓 까끌거렸다. 내 방에서 자유롭게 쏟아지던 영화 입장권들이 갑자기 낱장 하나하나 쇠고랑을 찬 듯 무겁게 느껴졌다. 소재 하나 찾으려고 이러한 일을 겪은 나 자신이 우습게도 느껴졌다. 다른 동기들도 소재 찾는다고 이러한 일들을 겪는 것일까. 아니면 쪽팔려서 말을 안 하는 것일까. 새벽이 오고 있었다. 몇 시간이라도 자야 했다. 암막 커튼을 다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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