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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룹LOOP 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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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안 Nov 10. 2022

룹(LOOP)

#8

 딱히 뾰족한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이 소재 저 소재를 접목하면 할수록 정작 손에 잡혀 일이 진행되지 않았다. 친구의 도움으로 몇 달 작업실로 쓸 화실로 작업 소재들을 옮겼어도 집중도는 여전히 떨어졌다. 몇십 년을 모았다는 입장권에는 몇십 년만큼의 뭔가가 나를 자꾸 끌어당겼다. 그렇게 매몰차게 돌아섰는데 이제 와서 무엇을 얻으러 시도하는 것도 우스운 꼴이었다. 디지털 매체를 접목시키는 것은 색다를 게 없었다. 여러 작품에서 응용하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참신하면서도 색다른 위트가 필요했다.
  23살의 나는 부푼 기대만큼 현실의 고배를 마시고 있었다. 졸업 작품 전시에서 그동안 숨겨 놓은 내 기량을 마음껏 펼쳐 보여야 하는데 이것 조금 저것 조금 손대다 전시일은 5개월도 채 남지 않았다. 수천 장이 넘는 티켓을 어떤 것과 결합할지를 생각해 보았다. 티켓을 일일이 스캔해 종이를 빠르게 넘겨 그림이 움직이듯이 보이는 스토리 북처럼 만들어야 할까, 아니면 석고의 모형에 이 티켓들을 같이 넣어 조각을 해야 할까. 당시의 개봉한 영화 타이틀,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이 찍힌 날짜를 가지고 뭘 어떻게 해야 할까. 방점을 찍듯 이거다 싶은 게 필요했다. 귀에 확 꽂히는 대단한 히트 곡은 아니어도 적어도 전주만으로 한 번의 힐끗한 시선을 가져올 수 있는 뭔가가 필요했다. 더 이상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 티켓을 더미처럼 쌓아 놓고 발로 차 버렸다. 단지 종잇조각일 뿐이었다. 종이에다가 날짜를, 영화 제목을, 시간을, 그려 넣은 거였다. 라면 냄비 받침으로 쓰이는 그런저런 책들과 다름없는 구겨진 종이⋯. 하지만 왜? 의문을 조금이나마 덜려면 그 노인이 왜 입장권을 그토록 모았는지, 그의 서사가 필요했다. 나는 소년에게 차단한 계정을 풀었다. 한 달이 다 돼 갈 즈음, 나는 소년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소년이 가르쳐 준 장소는 P 극장 앞이었다. 할아버지를 거기 가면 만날 수 있다고 말했는데 혹여 소스를 얻으러 갔다가 이 노인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 나는 거듭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저녁 시간에 노인이 거기서 무얼 하는지는 소년은 일러 주지 않았다. 지난번 입장권을 돌려주지 않아 그 노인은 나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게 뻔했다. 노인의 마음을 어떻게 얻어야 할지, 내 졸업 작품 얘기를 듣고 더 성질을 부릴지도 몰랐다. 자신이 애써 모은 입장권을 기껏 졸업 작품에 쓴다고 하면 말이다. 이래저래 답답한 마음에 저녁 공기마저 답답하게 여겨졌다. 극장 옆 골목길에 들어서자 익숙한 냄새들이 머리카락과 얼굴에 배어들었다. 이 극장을 한두 번 왔던 기억이 났다. 과 동기들 몇 명과 몇 년 전에 〈토이 스토리 4〉를 보러 왔었는데 지하철로 바로 연결돼 편리했었다. 또 가족들과 근처에 밥을 먹고 영화를 보러 왔을 때 요즘엔 잘 볼 수 없는 네온사인 간판도 꽤 그럴싸하게 눈에 띄었었다. 극장 지하에서 유명 배우들의 친필 사인을 일일이 확인했던 순간도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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