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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룹LOOP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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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안 Nov 10. 2022

룹(LOOP)

#5


  딱히 입장권으로 당장 무엇을 할지 정해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엄연히 존재했었던 그 뭔가에 나는 매료되었다고 봐야 했다. 녹슨 철제 상자에는 묵은 시간의 냄새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원룸 바닥에 통을 탈탈 털어 가며 퍼질러 놓으니 참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입장권과 - 제목, 연, 시, 금액이 기재된 - 발행 숫자들이 신기하게 시간을 돌려놓았다. 바닥에 깔린 입장권은 몇천 장이 아니라 족히 만 장은 넘어 보였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많은 입장권을 모은 걸까? 아니 그리고 왜 이걸 버리지 않고 모아 둔 것일까? 우표 수집은 발행된 곳과 날짜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니 오래 묵힐수록 돈이 되지만 철 지난 영화 티켓은 딱히 경매로 팔리지도 않는데 굳이 왜?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시간들이 압축되어 수많은 입장권으로 바닥에 깔려 있었다. 대부분의 티켓은 구겨져 있었고 인쇄된 부분들이 번져 있기도 했다. 입장권 중 몇백 장은 관람한 티켓이었다. 다른 티켓들과의 공통점이라면 연도와 시간대, 영화 제목이 같은 티켓들이 각각 2장씩이었다. 즉 한 사람이 두 장씩 구입했던지 아니면 두 사람이 한 장씩 구입했다는 말인데 티켓을 구입한 사람이 영화를 너무나 좋아했다면 지금의 이 티켓들은 마땅히 사용되어야 했다. 몇백 장을 제외한 티켓들은 뜯긴 흔적들이 거의 없었다. 영화 티켓을 샀으나 영화관에 들어가지 않는 영화마니아? 말이 되지 않았다.

 12평의 원룸에는 이제 더 쟁여 놓을 물건들이 없을 정도로 꽉 차 버렸다. 창고나 작업실이 따로 없기에 이 모든 공간이 작업실이고 창고였다. 호기심을 갖고 당근 마켓이나 을지로 주위 상가를 찾아 소재가 될 만한 것들을 모았지만 그렇다고 이 쌓인 물건들이 모두 작품 소재가 되지는 않았다. 앞에 몇 번을 실패하고 던져 버린 결과물이 구석에서 나에게 버림당한 서러움을 안고 째려보는 듯했다. 짧게, 깔끔하게, 죽을 수 있었으나 어쩌다 운이 없어 나에게 걸려들어 구질구질한 산소 호흡기를 달고 고통스럽게 수명을 연명하는 것 같았다. 돈이 없기에 스위스로 보내 안락사를 시켜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좁아터진 이 방에 갇혀 전시에 나갈 수 없는, 살아도 사는 게 아닌, 그럼에도 죽을 수도 없는 작품이 된 거였다. 이번 입장권은 5번째로 시도하는 작품이었다. 이 친구만은 어떻게든 살려야 했다. 이것마저 실패하면 나의 졸업은 유예되고 또 하나의 죽을 수 없는 작품을 만들게 되는 꼴이었다.
  막상 만 장이 넘는 입장권을 원룸 바닥에 펼쳐놓자 펼쳐 놓은 입장권 수보다 더 큰 막막함이 밀려들었다. 그 소년을 만날 때만 해도, 이 녹슨 철제 박스를 가방에 넣어 올 때만 해도, 여러 아이디어가 솟구쳤지만, 무더기로 펼쳐 놓자 구터분한 냄새에 어찌할 바 모르는 내가 입장권과 세트로 퍼질러 있었다. 소년이 정확한 장수를 모른다고 해서 일단 손으로 세어 보기도 했다. 암산이 자꾸 버벅대자 어깨와 손가락에 이어 뒷목마저 아파졌다. 그 소년이 세는 것을 포기했다는 말이 그냥 흘린 말이 아니었다. 두 손에 입장권을 가득 담아 냄새를 맡아 보았다. 단순히 구터분한 냄새라고 치부했지만 종이마다 야릇한 냄새들이 배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불빛에 반사를 시켜 보기도 하고, 에라 모르겠다며 낙엽처럼 수천 장의 입장권을 뿌려 보았다. 아래서 위로 뿌려 보고 식탁 위에 올라가 뿌려 보았다. 그때 분분히 떨어지는 입장권 사이로 메케한 먼지가 흐릿한 영상처럼 코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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