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룹LOOP 03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서안 Nov 10. 2022

룹(LOOP)

#3

신선하면서도 재미있는 것들을 찾아 이것저것 찔러보고 있을 때 과 선배가 소개한 갤러리의 전시는 소재를 찾고도 막막했던 작품의 밀도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했다. 소재를 잘 다루는 작가로 알고 있었지만 직접 전시를 보러 간 건 처음이었다. 공사 현장에서 나뒹구는 철 그물망을 비틀어 다른 색감과 질감으로 바꿔 놓았다. 다른 전시회에서 알루미늄 그물로 조형물을 만든 작품을 본 적이 있었다. 알루미늄보다 더 단단하고 원형이 가진 특징과 변형까지 살려 재해석한 작품은 재질만큼 강렬하게 다가왔다. 물질과 공간을 적절하게 배치할 줄 아는 노련함이 돋보였다. 등을 굽혀 해머를 두드리는 남자의 전체 조형물은 실제 사람의 크기보다 커 보였다. 그물의 자연스러운 암영으로 녹슨 부분을 살려 입체감을 주었고 순간 포착을 살린 동작은 역동미로 탈바꿈했다. 어떻게 보면 컴퓨터 시뮬레이션의 가상 인체가 툭 튀어나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여기 완성된 작품이 손님들을 새롭게 맞이하고 있었다. 단순한 작품이야, 나도 이 정도는 할 수 있겠어, 라고 비아냥거림을 관람 후기에 쓸 수 없었던 이유는 공간을 압도하는 작품의 부피에 있었다. 금방이라도 쏟아부을 것 같은 반짝이는 알루미늄의 메시브함은 마치 내가 두들겨 맞는 느낌마저 주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찬사 어린 시선이 느껴졌다. 차라리 급작스러운 사고로 조형물을 지지하는 지지대가 내 앞으로 엎어져 깔려 죽은 비운의 어린 아티스트라도 되고 싶었다. 소재 찾기에 급급했던 나 자신의 초라한 현실이 대비되어 나를 더욱 오그라들게 했다. 찬사와 감탄이 아닌 사람들의 안타까움이라도 내 생에 얹어진다면 그것으로 나는 꽤 성공한 아티스트가 아닐까.
  7월에 내 작품 면담 차례인데 아직 콘셉트도 미확정인데다 주제도 마찬가지니⋯. 연수에게 졸업을 유예하면 어떨까 하는 절박한 심정을 토로하기까지 했다. 아, 그럼 엄마 아빠에게는 뭐라고 둘러대나? 그러자 담당 교수에게 온갖 원망을 돌리고 싶어졌다. 다른 학교는 졸업 작품에 교수가 주제를 정해 주지 않고 자유롭게 하라고 한다는데⋯. 처음에는 주제의 폭을 좁혀 줘 좋게 여겼는데 좁아진 만큼 더 큰 부담감으로 다가와 그게 딱 좋은 것만 아니었다.
  당근 마켓에서 철제 박스 매물을 봤을 때 필연이라는 단어가 떠오른 건 절박함이 가져다준 귀결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녹슨 박스는 녹슬었던 시간만큼 나를 매료시켰다. 무엇보다도 그 박스 안에 수천 장의 영화 입장권은 내 주머니를 탈탈 털게 만들어도 좋을 만큼 신나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쿰쿰한 입장권으로 무엇을 해야 하나?


이전 02화 룹(LOOP)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