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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룹LOOP 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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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안 Nov 10. 2022

룹(LOOP)

#2

꽃바람이 목덜미를 스치며 지나갔다. 그 아이가 앉은 벤치에 앉아 녹슨 철제 박스를 천천히 열어 보았다. 고무줄로 묶인 입장권을 대충 손가락으로 튕겨 봐도 한 묶음에 수백 장은 족이 넘어 보이는 입장권이 저마다 다른 색깔로 나를 쳐다보았다. 시간의 궤적에 묵은내가 구릿하게 풍겨 왔다. 득템했다는 즐거움을 만끽하러 녹슨 케이스를 지그시 끌어안아 보았다. 졸업 작품을 준비하다 보면 원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다가도 곧잘 본인의 역량을 뛰어넘는 재미있는 작품들이 생긴다는 또라이 교수의 말까지 떠올랐다. 군데군데 찌그러져 녹슨 틴 케이스를 가방에 조심스럽게 집어넣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벚꽃 잎들이 말간 햇살 속에서 응원을 아끼지 않는 것도 같아 발걸음은 성큼 인도를 내디뎠다. 하얗게 피어오르는 구름처럼 마음이 마냥 부풀어 올랐다.

  몇 달을 시틋하게 보내다 보면 의욕이고 기대고 몽땅 사라져 버린다. 특이한 교수인 건 몇 학기 수업을 통해 익히 알았었다. 이렇게 말하는 건 순전히 내 열패 의식이라고 볼 수 있지만 조소과의 대부분 학생이 또라이라고 결론지었기에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었다. 좀 더 접근해 말하면 프렌치 감성에 절어 있는 또라이였다. 그는 유학 시절을 그리워하는지는 몰라도 프랑스 미술이나 영화에 등장한 인물의 대사들을 종종 인용했는데 이번에는 넷플리스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시즌에 꽂혀 있었다. 그는 크루아상이나 샴페인이라고 말해도 될 것을 굳이 샴퍄뉴~ 크와상~이라고 비음에 전 목소리로 말했다. 드라마의 대사를 인용할 때도 최선을 다해 프랑스어로 여지없이 주절댔다. 나에게 프랑스어는 그저 달콤한 속삭임으로 들릴 뿐, 그 빠른 세기에 한글 자막을 따라 읽기 바빴다. 그가 프랑스어로 느리게 발음하는데도 나는 여전히 불레 부 당씨?(voulez-vous danser? 나랑 춤을 출래요?)로 달달하게 다가왔다. 우리들의 눈빛을 알아챈 교수는 한국어를 프랑스어 속도로 날름 내뱉고는 스스로 기막힌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여주인공과 그의 연인이 대화하는 것을 듣고 졸업 작품 주제를 정했다는데⋯ 어찌 됐든 교수는 간간이 개인 전시도 여는 촉망 받는 아티스트였고, 특유의 위트가 담긴 작품은 대중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반대로 위트가 없는 우리의 작품은 점수를 받기 힘들었고 리포트조차 풍자와 재미, 위트가 남긴 신선한 작품을 매번 요구했다. 요약하자면 우리 주변에 사라지는, 닳아지는, 잊혀지는 것들을 찾아 작품으로 만들라고⋯ 신선하며 재미있는 작품들을 기대한다며 그가 말을 맺자마자 나는 소재가 안고 있는 주제들이 하나도 신선하지도 재미있지도 않다는 걸 금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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