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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힐데 Jan 10. 2023

그 어르신, 노년의 뜨란

슬기롭게 늙어가기

  코로나로 재작년 이어 작년엔 더 한가한 추석명절이었다. 구순의 시부는 환갑 지난 아들과 동거 석 달째 맞는 첫 추석, 비로 성묘를 하지 못할까 싶었는데 오후 비 그치자 산소로 발걸음 한 부자, 지혜로운 동거 생활을 시부는 부모님(나에게는 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다), 두 형님과 4년 전 소설에 작고하신 시모께 일일이 고하셨다.


  환갑 지난 아들은 밤새 꿈속에서까지 떨어지는 밤 줍다 밤을 꼬박 샜다며 밤 줍기가 가을 소일거리가 되었었다. 추석 명절날 누가 행여 밤 주워 갈까 새벽부터 발길 재촉하는데 두두둑 내리는 가을비에 마음만 요란스러웠다. 그 등쌀에 못 이겨 우산 받쳐 들고 밤 줍기 행차, 우리가 첫 손님인지 밤밭이 따로 없었다. 93세의 시부는 며느리와 식탁에 앉아 아들이 주워온 산밤을 깠다. 살아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당신의 밤 까는 칼을 들고 일체가 되었다. 밤이라야 어떤 것은 엄지손가락 보다 조금 더 크지만 깎기에는 매한가지다.


  계절의 교훈은 겸손이다. 땅 아래부터 시작한 봄은 가을에 땅에서 결실을 맺게 한다. 농익은 가을하늘이 아무리 유혹해도 말이다. 충북 영동 가리 네거리에 하얀 집, 서울과 부산의 경부철도 441.7km의 220km 지점이라 당호가 ‘어중간’, 부자가 거처하는 시공간이다. 작은 하천과 구 도로 건너에 철길이 있다. 그 철로 너머 옛 도로가 있어 동네의 역사를 말해 준다. 남편은 그 철로 너머 보이는 종중산, 경주 김 상촌공파 선산인, 백마산을 바라보며 자신을 이 땅에 있게 해 준 할아버지와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이야기를 매양 한다. 후손들이 자신을 잊지 않게 하려는 게 분명하다. 그 옛 도로에 밤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그 밤 맛을 이제야 알았으니, 늦게 배운 도둑이 밤샐 줄을 모른다고 우리 부부는 매주 새벽부터 밤 줍기에 돌입했다. 그런데 개미 서너 마리 붙어서 가장 토실한 밤의 흰 살을 핥고 있는 게 아닌가! 개미를 털고 주워 담으려는 순간 개미가 말을 건다. “그 두꺼운 껍질 겨우 볏겨 냈고만…,” 아뿔싸. 자연이 준 것을 자연과 함께 해야 는게 이치거늘 욕심의 그늘을 보니 그냥 담을 수 없다. 주변 개미들이 오가는 길 찾아 밤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발아래 주변을 돌아보니 내가 밤 무더기를 밟고 있었다. 저녁 식탁에서 새벽에 주워온 밤 이야기를 하다가 아들의 “그 밤나무가 할아버지가 심으신 거라면서요?”라는 말 곁에 시부는 “아닌데? 아니여” 연거푸 하셨다. 그러시면서 밤나무 맞은편 묵은점 안 동네에서 아버님은 스무 살까지 사셨다면서 그간 한적한 시골, 산골 마을의 변화함을 전하셨다. 당신 스무 살에서 지금 93세의 길 위에서 당신은 그대로인데 하시면서.


  시부는 다음 봄에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어중간에 있는 규, 중간이, 까미, 개 3마리가 싼 개똥을 페인트통에 차곡차곡 모아 놓았다. 이 부식물을 거름 삼아 어중간 주변에 호박을 심어 집 주변을 온통 노랑 호박꽃을 피울 요량이었다. 나는 그 원대한 계획 앞에 그 꽃 피면 배경 삼아 함께 사진 찍어야겠다 했다. 건강한 백세는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닌 듯하다. 아버님의 뚜렷한 자기주장 속에서 절제를 보며 남편은 전한다. 자기주장과 절제가 백세의 비법이라고.


   모두가 갈 수밖에 없는 길, 늙음에 대하여 생각하니 나는 어느 계절에 속하는 것일까? 억지 부려보면 한여름을 지나 늦여름을 고집하고 싶다. 당신이 보여 준 길 위의 여정에서 참 생각도 많아지고 숙연해진다. 4년 전 흰 눈이 내리는 소설에 어머님 먼저 보내 드리고 주변 정리를 하셨더랬다. 거실의 큰 TV는 먼 조카에게 주고, 주방 그릇은 1인 생활에 필요한 것만 제외하고는 모두 정리했다. 이불과 옷가지도 마찬가지로 정리하셨지만 외아들과 합가 할 때 보니 트럭 반을 넘긴 이삿짐이 되었다. 이삿짐 중 옷가지와 세면도구를 제외하고는 다 불필요하지만, 외아들인 남편은 버릴 때 버리더라도 당신 섭섭하지 않게 모두 어중간으로 끌고 왔었다. 짐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시부는 손수 버려야 할 물건들로 나누시며 “이것은 내가 더 쓰다 버리자”하시며 어머님과 아파트 베란다에 놓고 두 분이 앉아 차를 마셨던 의자는 챙기셨다.


  그리고 봄이 왔다. 이젠 이상기온이라는 말도 식상하다. 어중간 수선화 아직 생생한데 여름 꽃의 여와 화왕이 활짝 피어 여기저기 자태를 뽐낸다. 못자리는 아직인데 이팝나무 꽃도 피었구나. 정신줄 잘 잡아야겠다. 주말부부 그 역도 노역이지만 요양원에 자원봉사도 가닐 판에 그래도 어디까지는 해야 할 일이다. 어중간 도착하자마자 그릇가지 꺼내 퐁퐁 풀고 설거지를 했다. 깔끔하기만 하시던 아버님의 설거지 요령이 눈에 띄었다. 접시며 냄비를 휴지로 대충 닦아 넣고, 아들은 94세의 아버지 눈치 보며 간간이 아니한 듯 정리했다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나 이만큼 살아보니 잘 보이지도 않지만, 그런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으니 대충 해도 되더라.” 환청이 들렸다. 아! 그 어르신들도 젊어서는 깔끔 대장이셨을 터, 지금도 매주 화목은 목간을 다녀오시니, 또 얼마나 정정하신가! 앞마당 풀을 어찌나 깔끔하게 정리해 놨는지…, 지난해 겨울부터 개의 그것 모아 호박 심어 거름하고…. 담장밖 풀밭 덮을 호박씨를 심어 싹을 틔워놨다. 다섯 중 셋은 쌍떡잎으로, 하나는 머리갓 들어 올리고 하나는 땅이 갈라져 있다. 또 다른 곳에 길 넘어에선 셋 중 셋이 쌍떡잎으로 의기양양한 것이 발아율 100%다.


  이쯤 해서 미리 변명해야겠다. 아그들아! 지금의 나를 기억해 주렴, 그리고 내가 나이 먹거든 나에게도 젊은 날이 있었단다.


  여보게! 보이지 않는다고 대충 하지 마세나. 훔친 곳도 한 번 더 훔치고, 손끝 감각 무뎌졌지만 생각의 손끝 감각을 더 키우세나. 그래야 노년이 풍요로울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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