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맑고 바람은 친절했다. 태양의 뜨거움을 식혀줄 만큼 적당히 산들산들. 오랜만에 찾은 남편의 텃밭에는 종류를 세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것들이 심어져 있었다. 주말 새벽이면 어김없이 한 시간 거리의 이곳으로 향하던 그의 성실함을 말해주듯 작물들은 예쁘게 잘 자라고 있었다. 내가 밭으로 내려갔을 때도 그 사람은 한쪽에 쪼그리고 앉아 일주일 동안 무성해진 풀을 뽑고 있었다. 누구도 자신에게 말 걸지 않는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것이라 말한 적이 있다. 힘든 일을 하면서도 그 속에서 의미를 찾는 합리적으로 따뜻한 사람이다.
사실 남편이 주말 농사에 집착하는 이유는 노모의 건강과 안녕을 위해서다. 하루가 다르게 노쇠해 가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안타까운 마음을 묵묵히 땅을 가꾸며 달래는 것이었다. 밭일은 핑계일 뿐이고 매주 어머니를 찾아뵙는 것이 그가 밭으로 향하는 진심이다. 그의 진심에 날씨 따위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 30도가 넘는 폭염 뙤약볕아래서 일하느라 쪼그라든 남동생을 보는 그의 누나들은 미련한 짓이라는 말로 걱정하지만, 그가 결정한 성실에 예외는 없다.
그런 그 남자를 존경한다.
타협 없는 모습이 답답하고 미련스러워 보일 때도 있지만 자신이 하기로 결정한 일에 최선과 진심을 다하는 모습은 그 사람의 성품을 잘 보여준다. 어머니를 걱정하노라 내세우지 않고 힘들다 불평하지 않는다. 그냥 자신과의 약속을 지킬 뿐이다.
나는 냄비 같은 사람이다. 쉽게 끓어오르고 금방 지치고 싫증 낸다. 그런 나에게 실망하고 마음에는 돌덩이 하나를 얹고 산다. 게으르고 나약한 인간이라는 자기 비하의 돌덩이. 사람이 변하기란 어렵다.
매일 저녁 군대에 있는 큰아이가 전화를 한다. 그 아이는 모든 면에서 남편과 많이 닮았다. 가끔 아이에게 응석을 부리듯 나의 모자람을 이야기하곤 한다.
큰 아이가 말했다.
“아무것도 계획하지 말고 그냥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실천하지도 않을 계획들을 쌓아놓고 스스로에게 실망하느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 그게 어때서? 엄마는 머리가 너무 복잡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