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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그라미 May 15. 2024

그 남자

그대여 이겨다오...

전화기 너머로 신호음이 울린다. 아마도 그는 이번에도 전화를 받지 않을 것이다. 알면서도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기다려 보았다.

“여보세요.”

그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하고 나지막했다.

순간 등줄기에서 땀이 흘렀다. 마음을 차분하게 가다듬었다.

“나야. 잘 지냈어?”

“응, 어쩐 일이야?”

“부탁이 있어서 전화했어.”

그가 물었다.

“뭔데?”

“나 그림책을 한 권 내고 싶은데 네가 그림을 좀 그려줬으면 해서. 너 스케치할 때 쓰던 그 거친 펜 느낌이 필요해.”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가 아프다고 이야기 안 했나? “


9년 전 그 남자와 마지막 통화를 했다.

그 남자는 내 대학 동기로 나보다 두 살이 많다. 내 인생 돌아가고 싶은 10분의 주인공이다. 서울에 살던 시절 인연인지 우연인지 집 앞 마트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10년 만의 의도되지 않은 만남이었다. 둘은 가까운 카페에 앉아 살아왔던 이야기, 지금 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이웃사촌으로 가까이 지냈다.

이웃사촌이라고 포장했지만 마음속에는 다시 보고 싶었던 미련이 있었을 것이다.


그 남자는 직장 생활을 1년 만에 그만두고 조각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대학원에서 미술로 전공을 바꾸었고 큰 대회에서 입상도 했다고 한다. 멋있었다.

오다가다 차를 마시고 가끔은 맥주도 한 잔 기울이며 사심을 꼭꼭 숨긴 이웃으로 잘 지냈다. 큰 아이의 입학식에는 책가방을 선물했고, 나도 크리스마스 그의 가족들에게 케이크를 선물했다. 사심은 나만의 감정이었을는지도 모른다. 그에게 그 어떤 표현도 하지 않았고 그도 마찬가지였다.


이사를 하면서 그와 멀어졌고 9년 전 통화에서 몸이 좀 좋지 않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통화를 할 수는 없었다.

아주 가끔 건강이 걱정되어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나의 기억에서도 그는 점점 사라졌다.


그가 많이 아프다는 말에 놀라서 일 이야기를 더 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어디가 아픈데? “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 파킨슨병이야. 9년 됐어. “ 그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눈물이 흘렀다. 아니 펑펑 쏟아졌다. 그 남자가 너무 가여워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럼 지금 움직이는 건 어때? “ 울음을 꾹꾹 눌러 담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약효가 점점 떨어져서… 그림은 그려 줄 수 없을 것 같아.”

“너 어떡하니. 아프지는 않니?”

내가 이성의 끈을 놓쳐버렸다. 엉엉 소리를 내며 길바닥에서 미친년처럼 울었다.

“그래도 내 글 한 번만 봐줄래? 정교함이 필요하지는 않아. 꼭 한 번 봐줘. “

”그래. 잘 생각해 볼게. “ 부정의 답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내가 너 한 번만 보면 안 될까? 딱 한 번만. “ 지금 이 말을 용기 내서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내가 보여주고 싶지 않아. “


그의 마음을 생각하니 내 요구가 무리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에게 짧은 원고를 보냈다.

아직 그 남자는 답장이 없다. 거절을 한다 해도 이해할 수 있다. 아니 아마 거절할 것이다.


내 기억 속에 그 남자는 작고 단단한 체구에 구릿빛 피부, 치아가 단정하고 미소가 아름다운 남자였다. 운동을 잘하고, 작품 앞에 앉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예술가였다. 그의 지금 모습을 상상하지 않으려 한다.

하루하루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있는 인생이란 어떤 마음일까?

아버지의 부재로 어린 시절이 불행했던 그가 아들을 바라보며 얼마나 깊은 한숨을 쉬고 있을까? 아들 바보 내 친구가 불쌍하다.

의학이 발달해 살 수 있지 않을까? 내 친구는 좀 더 버틸 수 있겠지?

마음이 요동친다.


다시는 볼 수 없겠지?

부디 그의 의지로 움직일 수 있는 날이 좀 더 오래가기를, 고통스럽지 않은 마지막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그가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니 소리 내어 울기를 바라야 하나? 무엇을 기도해야 할까?


한 때 정말 사랑했던 그 남자의 마지막을 내가 더 이상 떠올리지 않기를 바란다.

그의 부고를 내가 전해 듣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찬란했던 10분에 만족했어야만 했다.

그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어야 했다.

한동안은 마음이 많이 아프고 눈물이 흐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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