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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그라미 Jul 17. 2024

오늘 밤만은 그댈 위해서

오후 세 시가 지나면

정희 씨의 숨소리가 거칠다. 나는 결심을 하지 말았어야 .


제주도 지도를 펼쳐보지도 않고 무작정 정희 씨를 차에 태워 나만 따라오면 된다고 큰소리를 뻥뻥 쳤다. 그런데 나는 제주를 사랑하지만 지독한 길치에 지도를 보지 못하는 전형적인 금성 여자다.


제주도 관광에 들뜬 정희 씨는 청바지에 블랙 니트를 세련되게 입었다. 오늘 바른 립스틱은 찐 분홍과 핫핑크. 둘을 적절히 조합한 것이라 설명하면 쉽겠다. 정희 씨의 기분만큼 설레는 색깔이다.


출발은 좋았다. 서귀포 올래시장 근처 호텔에서 중문까지 달려, 보기에도 군침 도는 조식을 우아하게 즐겼다. 올레길 6구간을 가볍게 산책하는 정희 씨는 '좋다. 진짜 좋다.' 연발했다. 수학여행을 나선 소녀 같았다. 국민학교를 졸업한 정희 씨는 수학여행의  추억이 없다.  친구들과 교복을 입은 단발머리 정희 씨가 그려졌다. 짠했다.


그래서 잘 모시고 싶었다. 능력 없이 의욕만 앞서는 리더가 가장 피곤하다는 말은 오늘 나를 위한 말이었다.


 사려니 숲으로 향했다. 침대형 벤치에 둘이 누워 자연이 주는 선물을 오감으로 만끽했다. 뙤약볕에 그을린 정희 씨 피부에서 윤이 났다.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는 엄마에게 지금 이 순간은 얼마나 호사롭고 행복 충만한 시간일까?


우리의 감성은 여기서 끝났다.  예쁜 카페 한 군데를  거쳐 우리가 일출봉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두 시. 배부르게 점심식사를 마치고 입구에 도착하니 오후 세 시였다.


뜨겁고 습했다. 날씨는 환장하게 좋았지만 정상까지 오를 생각을 하니 정희 씨가 걱정되었다. 나이에 비해 건강하다 해도 폭염주의보가 내린 날 오후 세 시는 잔인한 추억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걱정도 팔자요. 니 걱정이나 해라." 눈앞에 펼쳐진 절경에 꼭대기까지의 높이는 보이지 않았나 보다. 앞장서서 걸었다.


나는 가벼운 레깅스 차림에 발걸음도 가벼웠다. 초반 레이스는 좋았다. 중턱에 이르니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얼굴에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려 고운 화장이 얼룩지고 있었다. 청바지는 땀에 들러붙었고 립스틱은 지워졌다.  백 걸음만 가면 정상인데 정희 씨가 멈춰 선다.


 앗! 더는 힘들겠구나.

"엄마, 잠시 쉴..."

"사진 찍으려면 입술을 발라야지." 대단하다, 정희 씨. 그렇게 환한 웃음으로 딱 100살까지만 행복하자, 우리. 내가 돈 많이 벌어서 호강시켜 줄게.


오후  시는 더위에 지쳐 힘들었지만, 여섯 시부터는 시원한 바람이 불 테니까. 내가 정희 씨의 분침이 되어줄 테니  믿고 따라오셔. 지도는 못 봐도 시계는 정확하게 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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