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부석사는 지금과 같은 모습일까?
미술사 공부를 하려고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를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부석사의 옛 모습이 담긴 사진을 다운받게 되었다.
이 사진들을 보니 부석사의 사세가 상당히 기울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국가적으로 불교를 숭상했던 고려와는 달리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운 조선에서는 지배계층이 사찰에 많은 후원을 해주지 않았다. 그런 탓에 사찰들은 오랜 시간을 여성들과 민중들의 시주로 버텨왔다. 통일신라나 고려와 다른 조선만의 독특한 불교미술이 발전한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국운은 쇠퇴하였고, 자연히 백성들의 경제력도 약화되었다. 조선후기들어 잠시나마 활기를 띠었던 불교 역시 침체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부석사 역시 그런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 같다. 정조대까지는 크고 작은 불사가 꽤나 있었는데 19세기 들어서는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가지고 있던 목각탱을 문경 대승사로 넘기고 조사당의 수리비용을 받은 일이나, 범종루의 종이 사라진 것 역시 이러한 사회적 배경의 연장선 상에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부석사는 태백산 사고의 관리를 맡게 되어 그 비용을 대고자 범종을 처분했다고 추정되고 있다).
사진을 보면 주위에 나무가 하나도 없고 밭으로만 되어 있는데 이런 탓에 여름에 큰 비가 오면 산사태가 발생하거나 흙더미가 떠내려오는 일이 많이 발생했을 것이다. 석단과 건물 주변이 흙과 돌로 지저분한 것을 볼 수 있다.(사진11-1, 11-2, 11-3)
무량수전을 보면 1916년의 보수 전과 후의 모습을 알 수 있는데, 보수 전의 모습은 많이 훼손된 상태이다. 건물 자체는 괜찮아보이나 기단을 보면 돌들이 많이 뒤틀려 있다. 계단은 특히 무너진 정도가 심하여 계단으로 쓸 수 없을 정도이다. 석등의 지대석도 돌이 많이 어긋나 있는 상황이라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태다. 어칸쪽 계단과 석등 주변으로는 토양이 많이 침식되어 바닥에 묻혀 있던 돌들이 드러나 있다. 아마 처음 석단을 만들고 기초를 다질때 사용했던 것들이 아닌가 싶다. 사진으로만 보면 상황이 너무 심각하여 폐사된 절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사진11-4)
지금과 다른점은 외부 포벽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저자리가 단순히 황색의 흙으로 채워져 있는데 보수를 하면서 원형을 살리지 못한 탓이다. 서까래나 창방, 공포에는 단청의 흔적도 많이 보인다. 기둥에는 주련이 붙어있다(사진11-5).
내부를 보면 마룻바닥이 깔려있는 현재와 달리 전돌이 깔려있는 모습이다. 아미타불 역시 관리가 안되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데, 뒤퉁수 쪽의 나발에는 이상한 오물이 잔뜩 묻어있고, 미간의 백호 장식 역시 빠져있어서 허전해 보인다.(사진11-6)
무량수전 동편에 있는 삼층석탑은 피사의 사탑마냥 기울어 있는데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게 없는 상황이다. 하층기단은 떠내려온 흙에 완전히 파묻혀 버렸고 상층기단의 우주와 면석은 분리되어 속에 채워넣은 자갈들이 튀어나오려 하고 있다. 그 옆에 있는 화사석 빠진 석등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사진 11-7)
조사당도 상황이 삼각하다. 얼핏보면 폐가가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기왓장이 죄다 들떠 있어서 언제 떨어질지 모른다. 재밌는 것은 이 당시에도 선비화 주위로 울타리가 처져 있다는 것이다. 당시에도 잎을 따가는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아들을 낳고자 했던 당시 여인들의 간절한 염원이 느껴진다. 내부를 보면 의상대사 소상 주위로 스님 진영이 두점 보인다. 청허당 휴정 스님과 송운당 유정스님의 모습인데 도난 당했다고 한다. 외부 포벽을 보면 무량수전처럼 그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사진11-8, 11-8-1)
현재 부석사 동편을 보면 원융국사 비가 서있는데 사진으로 보면 당시에는 거의 폭격을 맞은 것처럼 훼손되어 있다. 귀부 위에 비신이 널부러져 있고 이수도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고 있다. 주변에는 또 다른 비석의 이수인지 옥개석 모양으로 생긴 조각이 방치되어 있다.(사진11-9)
그리고 동쪽 폐사지에는 현재 범종루 앞에 있는 3층석탑과 자인당에 모셔놓은 석불 3구가 있는데 탑은 절반이상 파묻혀 있으며 석불은 광배가 바닥에 떨어져 있고 대좌 역시 아랫부분이 흙에 파묻혀 있는 상황이다. 또 다른 석불은 광배가 부러져 있으며 지권인을 한 손도 박살나 있다.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다른 석불은 목이 잘린 상태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다.(사진11-10, 11-11)
그랬던 무량수전이 수리 후 이렇게 정비되었다(사진11-12).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마당에 나무가 심어져 있다는 것이다. 마당을 비우는 우리의 전통적인 조경과는 거리가 멀다. 일본인이 관여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무야 뽑아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공포 주위로 그려져 있던 단청과 기둥의 주련들은 사라지고 말았다. 이때의 상태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복원을 하고 싶어도 흑백 사진이고 화질이 선명하지 않은 탓에 원래의 모습을 알기 어렵다. 정말이지 아쉽다.
조사당도 이렇게 수리되었다. 역시 단청과 그림은 사라졌다.(사진 11-13)
사진을 통해 부석사의 옛 모습을 살펴보니 일제강점기 당시 부석사의 상황이 매우 심각하여 보수공사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임을 알 수 있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복원을 하는 과정에서 그 원형을 살리는데 충실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런 점은 반면 교사로 삼아서 앞으로 문화재 관리를 해나가는데 참고삼아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