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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깎이 미술사학도 Dec 10. 2019

부석사 천왕문

단순해 보이는 축대와 무시무시해 보이는 사천왕의 비밀

당간지주를 지나서 1분 정도 걷다 보면 저 멀리 건물이 한 채 보인다. 어느 정도 규모 있는 사찰이라면 하나씩 있는 천왕문이다. 천왕문은 사천왕을 모시고 있는 문이다. 

사천왕이란 무엇일까? 부처님이 계시는 수미산의 동서남북 네 방향을 각각 맡아서 지키는 수호신이다. 원래는 고대 인도의 종교에서 모셨던 귀신들의 왕이었으나, 불교에서 이를 흡수해 수호신으로 만들었다. 불교에서는 이들이 불교에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수호하는 존재가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동방지국천왕, 남방증장천왕, 서방광목천왕, 북방다문천왕이 있으며 각기 수많은 권속을 거느리고 있다. 원칙대로라면 사찰의 동서남북 각 방향마다 한분씩 사천왕을 모셔야 하지만, 그럴 경우 공역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이렇게 하나의 천왕문에 네 분을 모신다. 


천왕문 앞으로 많은 계단이 놓여있다. 계단이 너무 많은 거 아니냐 불평할지도 모르겠다만, 천왕문 이후로도 수없이 많은 계단을 올라야 한다. 이 정도는 준비운동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할 것이다.

잠깐, 사천왕을 만나려고 계단을 오르기 전에 잠시 옆으로 이동하여 축대를 살펴보고 가는 것이 좋겠다. 이 축대는 그냥 대충 막 쌓은 축대가 아니다. 얼핏 보면 돌의 크기가 제각각이라 되는대로 막 쌓은 것 같지만 돌들이 빈틈없이 단단하게 맞물려 있고 전체적으로 네모 반듯한 모양의 석단을 이루고 있다. 치밀하게 쌓은 것이다. 고구려, 백제와의 치열한 항쟁을 하면서 익힌 성 쌓기 기술이 이곳의 석축에도 사용된 듯하다.  



옆에서 보았을 때도 마치 성벽을 쌓은 것처럼 반듯하다. 전면에 있는 큰 돌들은 앞뒤로 상당히 길어서 쉽사리 빠지지 않을 것 같다. 뒤에 생긴 빈틈도 사이사이에 작은 돌을 끼워 빈틈없이 메웠다. 상당히 치밀하게 잘 쌓은 석축이다.


표면의 큰 돌은 세로 방향으로 깎은 흔적이 눈에 띈다. 정으로 내리쳐서 거칠게나마 다듬은 듯하다.

이 석축은 단순히 잘 쌓았다는데 의미를 둘게 아니라, 그 모양에서도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돌들이 결합한 구조를 하고 있는데 이는 수없이 많은 중생들이 얽히고 섥켜 살아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들 중에는 고귀한 진골 귀족도 있을 것이고, 비교적 부유한 백성도 있을 것이며, 나라를 잃고 차별받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도 있을 것이다. 


이런 갖가지 모습의 중생들이 모여서 네모 반듯한 석단을 만들었는데, 이는 화엄경에서 이야기하는 원융무애*의 정신과 일맥상통하며, 의상대사가 화엄일승법계도에서 설명한 "일즉다 다즉일"의 개념과도 상응한다. 또는 통일된 신라사회가 구성원 간의 대립 없이 서로 화합하여 발전해 나가기를 기원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이렇게 단순해 보이는 석단에 그토록 놀라운 뜻이 담겨있다니, 놀랍지 않은가? 솔직히 말해서, 이걸 놓치고 곧바로 무량수전으로 가는 사람들이 더 놀랍다. 대도시에서 먼 이곳까지 힘들게 왔는데 무량수전만 보고 가는 것은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 살다 보면 별 기대도 안 했는데 횡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석축이 바로 그런 경우가 아닐까?

*원융무애 : 모든 존재가 서로 방해됨이 없이 일체가 되어 융합한다는 불교의 이상적인 경지



이제 석축을 보았으니 사천왕을 보러 가보자. 천왕문에 들어가면 양 옆으로 두 분씩 사천왕이 모셔져 있다. 동쪽에는 동방지국천왕과 남방증장천왕, 서쪽에는 서방광목천왕과 북방다문천왕이 계신다. 각각 지물을 들고 있는데, 사찰마다 그 지물이 조금씩 달라서 어떤 사천왕을 표현한 것인지 애를 먹는다. 경전에도 이렇다 할 기준이 될 근거가 없어서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그나마 북방다문천왕은 보탑과 깃대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는 게 일반적이다. 왜냐면 그가 사천왕 가운데서도 대장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법을 상징하는 탑을 들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어떤 사찰은 친절하게 사천왕마다 이름표를 붙여준 곳도 있다. 어린애도 아닌데 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사천왕도 자존심이 있는데 그건 약간 오버 아닌가 싶다.


"무량수전에 말 걸다"라는 책에 부석사의 사천왕이 소개되어 있는데, 거기서 나온 대로 한번 읊어보도록 하겠다. 비파를 들고 계신 분은 동방지국천왕이다. 휘하에 음악의 신 건달바를 거느리고 있어서 그런지 비파를 들고 있다.


칼을 들고 계신 분은 남방증장천왕이다.


한 손에는 용을, 다른 한 손에는 여의주를 든 분은 서방광목천왕.

아까 언급했던 대로 보탑과 깃발을 들고 계신 북방다문천왕.


사천왕들은 하나 같이 전부 발 밑에 악귀를 깔고 앉아 있다. 재밌는 것은 무게에 짓눌려 고통스러워하는 악귀도 있지만,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용을 쓰는 악귀도 있다는 점이다. 그런 것을 보면 우리네 사는 모습이 그대로 투영된 것 같아서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불교미술학자이신 자현 스님의 책에서 본 내용인데, 한반도 남쪽 지역의 사찰과 북쪽 지방의 사찰에서 보이는 악귀의 모습이 다르다고 한다. 남부 지방은 주로 왜구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고 북부 지방은 주로 만주족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민중들의 아픔이 사천왕상 악귀에 반영된 셈이다. 부석사의 천왕문은 현대에 들어와 복원된 것이라 잘은 모르겠는데 대머리가 많은 것으로 봐서 왜구의 모습이 많이 반영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도 별로 악의는 없어 보이게 생겼는데, 저렇게까지 심한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전생에 무척 나쁜 짓을 많이 했을지도.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사천왕과 그 밑에 깔린 악귀들을 보면서 나 자신이 착하게 살고 있는 건지 잠시나마 반성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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