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너머에 있는 존재

어떻게 전화를 받는 건지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by ZW

전화번호는 여러 숫자를 조합해서 만들어지지만, 때로는 같은 숫자가 반복되거나 비슷한 조합이 이어지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어떤 전화번호는 조합이 독특하다는 이유로 주목받는다.

혹시 어릴 때 특이한 전화번호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전화를 하면 건너편에서 평범하지 않은 존재가 답신을 한다고 알려졌던 전화번호들이 있다. 바로 귀신과 악마의 전화번호다. 4444-4444나 666-6666 등 불길하다고 알려진 숫자 4와 악마의 숫자라고 알려진 666 등, 이 숫자들로만 이뤄진 전화번호가 크게 유행을 탔던 기억이 있다.

어떻게 귀신, 혹은 악마가 답신을 하는 것이 가능할까?



#숫자의 나열

4는 동양의 죽을 사死와 발음이 같아서 꺼리게 되었고, 666은 성경의 요한계시록의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라는 구절에서 등장한다. 불완전한 숫자이며 악마의 숫자라고 불린다. 이러한 미신이 존재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4와 666의 조합에서 불길한 일이 일어나는가? 만약 어떤 사람이 4나 666으로 조합된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생에 일어나는 불길한 일들은 모두 전화번호의 탓일까?


전화번호가 같은 숫자만으로 구성되는 경우는 정말 드물긴 하다. 애초에 9종류밖에 없으니까. 그러면 다른 숫자들로 이루어진 전화번호는 어떨까? 1111-1111, 2222-2222, 3333-3333... 마지막 9999-9999라는 전화번호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걸까? 똑같이 한 가지의 숫자만으로 이뤄진 전화번호지만, 4와 6에 비해 덜 이상해보일지도 모른다. 숫자에 의미를 부여해서 전화번호에까지 귀신을 씌우는 것은 과하지 않나, 싶다.


#전화 너머에 있는 존재의 수고스러움

만약 정말 이 전화번호들이 귀신이나 악마가 소유한 전화번호이며, 전화를 걸었을 경우에 받는 것도 귀신이나 악마라면? 그들은 매일마다, 매 시간마다 무척 바쁜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한때 유행했을 무렵, 이런 괴담에 관심을 가진 어른들은 물론이고 괴담에 환호하는 어린 학생들이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건다. 돈을 받고 전화 응대를 하는 서비스직도 크고 작은 고충들과 피로를 느끼기 마련인데, 귀신과 악마라고 해서 크게 다를까? 끊임없이 걸려 오는 전화를 받으며 계속 같은 공포와 불길함을 전달해야 한다. 심지어 휴일도, 휴식시간도 없다. 언제 걸려올지 모르는 전화를 위해 24시간 내내 대기하고 있는 일은 그들에게도 가혹한 상황이 아닐까?


그렇다고 이 귀신과 악마들이 24시간 연중무휴 콜센터를 운영하고 있을 리는 없다. 귀신과 악마들이 단체로 사무실 같은 풍경에 모여 앉아서 교대로 전화 응대를 하는 모습을 생각해 보자. 돌아가면서 전화를 받고, 휴식을 취하며, 모여 앉아 있는 광경은 너무 회사 같은 풍경이지 않을까? 산 사람에게 전화 응대를 하는 일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우르르 모여서 다니는 건지 웃길 뿐이다. 게다가 앞서 말했듯 24시간 연중무휴 귀신/악마 콜센터다. 보수는 제대로 지급하나? 지원하는 귀신이나 악마가 있기는 할까? 나 같으면 진작에 도망치고도 남았을 것이다.


#실체 없는 존재가 전화기를 소유할 수가 있나

전화기는 실체가 있는 물건이다. 확실하게 만져지고,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다. 전화는 이 전화기를 이용해 음성을 전기 신호로, 다시 전기 신호를 음성으로 바꿔서 전달하는 기술이다. 그런데 이것을 실체 없는 이들이 소유하고, 이용할 수 있을까? 악마야 빙의니, 고유의 신체를 가지고 나타나니, 하며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귀신은 어렵지 않나? 빙의는 귀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의 그전화번호를 가지고 있는 인물을 골라서 빙의해야 전화를 사용할 수 있다. 너무 번거롭지 않은가? 게다가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4와 6만으로 된 전화번호 주인을 찾아낼 것인가?


전화기를 어찌어찌 소유했다고 쳐도, 어디에서 전화를 받는지도 중요하다. 주변에 사람이 다니거나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에서 전화를 받는 귀신이 있다. 그러면 전화를 건 사람은 건너편에서 들리는 일상적인 소리에, 이것이 허구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아주 조용하고 귀신 혼자만 있을 수 있는 곳을 찾아가는 것도 번거롭다. 설령 그런 곳에서 전화를 받는다고 한들, 전파가 안 터질 정도로 으슥한 곳이면 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게다가 전화기 배터리며, 전화선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것들은 반드시 산 사람의 손길이 닿는 곳에서나 해결할 수 있다. 귀신이 배터리 충전도 하고 없던 전화선도 만들어낼 것 같지는 않으니까. 귀신 콜센터도 참 번거롭고 귀찮은 직업인 것 같다.


지금 와서는 터무니없는 괴담이라는 것은 알지만, 굳이 전화를 걸어보기는 또 꺼려진다. 괴담이 돌아다닌 것도 몇 년째니, 너머에 있을 귀신이 슬슬 질리고도 남았을 무렵 아닐까? 내가 전화를 하지 않으면 24시간 연중무휴 콜센터 귀신과 악마들도 쉬는 것이니, 나름대로 그들을 배려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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