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두 달째. 주말마다 나는 이 작은 공간 안에서 하나의 작은 사회를 만난다. 이곳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곳이 아니라, 다양한 국적과 계층, 그리고 각기 다른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는 교차로다. 나는 카운터 너머에서 그들의 짧은 순간들을 관찰하며, 우리 시대의 풍경을 읽는다.
1. 언어의 지도: 세계에서 온 손님들
내가 일하는 곳은 동탄의 한복판이다. 삼성반도체 공장과 수많은 협력사, 그리고 길 건너 호텔 세 곳. 덕분에 이곳 편의점은 작은 국제공항 라운지 같다. 전형적인 백인 남성과 한국인 여성 커플은 약간 어눌하지만 깍듯한 존댓말로 인사를 건넨다. 아마도 한국에서의 긴 생활을 염두에 둔, 관계의 깊이가 묻어나는 태도일 것이다.
반면, 러시아나 프랑스에서 온 듯한 커플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모국어로 대화하며 물건을 고른다. 그들에게 한국어는 아직 넘어야 할 벽이라기보다, 굳이 넘을 필요 없는 담벼락에 가까워 보인다. 아랍이나 동남아시아에서 온 이들은 짧은 영어 단어나 번역 앱의 화면으로 소통을 시도한다.
이 모든 풍경은 단적인 예일 뿐, 일반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과거 지하철에서 주변을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통화하던 프랑스인이나 중국인들을 떠올린다. 질서와 규칙을 중시하는 독일인들과는 극과 극이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대부분 출장이나 단기 파견으로 온 직장인들이다.
그들은 관광객처럼 들뜨지도, 현지인처럼 녹아들지도 않은 채, 자신들의 문화적 배경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래서 이곳은 진상 손님은 극히 적지만, 대신 흥미로운 문화 인류학의 실험실이 된다.
2. 기억하는 손님, 시험받는 아르바이트생
물론 모든 손님이 쿨한 것은 아니다. 첫 근무 날, 음식물 쓰레기봉투 종류를 몰라 헤맸던 나를 기억하는 한 아주머니 손님이 있다. 4주째 되던 날 다시 마주친 그녀는, 이미 얼굴에 짜증을 가득 담은 채 또박또박 주문을 했다. 그 눈빛은 선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이 녀석, 어디 제대로 하나 보자.’ 솔직히 속으로는 웃음이 났다. 나는 이미 모든 것을 숙지한 상태였고, 그녀가 기대하는 실수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나는 그 손님을 보며 내가 사교육 현장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학부모를 떠올린다. 겉으로는 까다로워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육아와 관계, 그리고 불신 가득한 사교육 시장에서 받은 수많은 상처가 있다. 그들의 날카로움은 어쩌면 또다시 상처받지 않으려는 방어기제일지 모른다. 물론 사장님 입장에서 종량제 봉투 손님은 매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구색용 고객’일 뿐이지만 말이다.
3. 주말 밤의 솔직한 욕망들
주말 저녁이 되면 편의점의 풍경은 또다시 바뀐다. 특히 콘돔 판매량이 눈에 띄게 늘어난다. 대부분 남자가 계산을 하고, 여자는 다른 곳을 보며 얼굴을 회피하거나 먼저 가게 밖으로 나가 있곤 한다. 물론 직접 계산하는 당당한 여성분들도 있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성(性)은 공개된 장소에서 드러내기 쑥스러운 영역이다. 나는 그럴 때면 철저히 계산에만 집중한다. 나의 무심함이 그들에게는 최선의 배려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팔리는 제품은 거의 한 종류로 정해져 있다. 실패의 위험을 최소화하려는, 안전하고 검증된 선택을 선호하는 심리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저녁 6시가 넘으면 같은 건물 회사에서 주말 근무를 마친 직원들이 몰려온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도시락과 컵라면, 그리고 약간의 간식을 함께 사 간다. 가격은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저녁을 챙겨 나가는 그들은 이 편의점의 가장 든든한 매출 기여자다.
호텔이 많은 탓에 주말 밤에는 픽업 주문도 폭주한다. 특히 ‘네이키드 몰트’ 위스키와 탄산수, 간단한 안주로 구성된 하이볼 세트는 불티나게 팔려나간다. 호텔 방에서 간편하지만 근사하게 하루를 마무리하려는 이들의 욕망이, 편의점의 주말 매출을 견인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모든 풍경을 카운터 너머에서 조용히 지켜본다. 언어와 문화, 세대와 계층, 그리고 가장 솔직한 욕망이 교차하는 곳. 편의점은 어쩌면 우리 시대의 가장 정직한 자화상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