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 기간에 나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내가 쓰러진 일을 두고 보이는
사람들의 전혀 다른 반응이 재미있었다.
첫 번째는 답답할 정도로 착하게 살더니
공짜는 없는지 죽음도 피해 가더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젊은 나이에 갑자기 쓰러지는 것을 보니
착하게 살아도 아무 소용이 없더라는 것이었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사람들은 같은 현상을 보고도 전혀 반대되는
다른 반응을 하면서 기존에 자기가 살아온 방식과
지켜가고 싶은 신념을
더욱 단단하게 강화시키는 듯했다.
이타(利他) 심이든 이기(利己) 심이든
영리한 개인주의든 옳고 그름을
흑백의 논리로 단정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세상은 몇몇 사람의 이기심이나 이타심에 의존해서
좌지우지되지도 않을뿐더러 우리의 선행이 없이는
멸망하거나 멈추어 버리는 곳도 아니며
평범한 이들의 작은 선행이 없이는
약자들이 다 굶어 죽거나
외롭고 슬퍼서 시들어버리는 결핍된 곳도 아니다.
또한
신(神)도 자기가 일일이 다 보살피지 못하는
중생을 위해 우리의 배려와 사랑을 구걸하는
존재가 아니며 우리의 자비심이 없이는
세상의 운영이 곤란한 존재도 아니다.
다만
데이비드 호킨스가 <모든 생명에 대한 선의>라고
표현한 대전제가 생명체와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가장 중요한 법칙이 되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시간을 넘나들며 진리의 형태로 드러나거나
표현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신의 보복이 두려워서
선(善)을 강요받는 존재도 아니며,
신에게 행운을 구걸하기 위해
타인을 구제해야 하는 서글픈 존재도 아니다.
마음의 울림이 있어 나누고 보니
받는 이에게도 도움이 되고
주는 이도 행복해지더라 하며
먼저 경험한 이들이 서로를 배려하고 살자고
안내하고 독려하는 것뿐이다.
절대적인 불행이든 상대적인 결핍이든
상처에 대한 집착이든
자신의 고통이나 외로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감사하며
더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을 보살피며
서로 나누고 살자고 권하면
어떤 이들은 신기하게도 그럴 수 없는 이유와
그러기 싫은 온갖 핑계 뒤에
습관적으로 숨어 버린다.
외로움이든 상처이든 결핍이든
자기 자신에게만 몰입하는 것으로는
인간의 아픔이 치유되지 아니하며
세상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내는 것으로만
진정한 치유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데일 카네기는 <인간 관계론>에서
그 이유를
타인의 결핍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관심이
자기 자신의 고통에 몰입하는
집중력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치유의 단계로 나아갈 숨 고르기가 이루어지고
반복되던 부정적인 감정이
환기(換氣)되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상처받은 인간의 온전한 치유가
이기(利己)가 아니라 이타(利他)에서 시작되고
완성된다는 것은
인간 존재의 심오한 아이러니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다 가진 사람도 위를 올려다보며
자신의 입장을 견주면 만족을 할 수가 없고,
반대로 어떠한 결핍을 가진 사람도
아래를 내려다보며 자신의 처지를 감사하면
견디지 못할 것도 없고
베풀지 못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자들은
나누는 이와 받는 이가 따로 있지 아니하며
나눈다는 마음조차 가질 필요가 없고
베푼다는 의식조차 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가르침은
나눔에 대해 전혀 마음을 열지 못하는 사람들이
타인을 보살피는 것을
묵묵하게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함부로 할 수 있는 수준의 조언은 아니다.
선행을 떠벌리고 광고하는 사람과
순수한 선의로 사랑을 권하는 사람은
동기도 목적도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 모든 순환을 볼 수 있는 것이 통찰이고
그것의 선(善) 순환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지혜이며 무엇을 선택했든지
습관적으로 실천하며 살아낸 것이
카르마 즉 업(業)이 된다.
업(業)을 지배하는 사람이 되라고 한 가르침은
이런 알아차림이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생명체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무한히 반복되는 이 모든 과정을 아울러
진리라고 하며 그 핵심이 되는 원리가
사랑과 자비라고 배워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