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인연의 브런치 인드라망을 넘실넘실 따라가며 여러 작가님들의 글을 읽는 것이 슬슬 습관이 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연고 작가님의 <보구씨의 평범한 하루>를 읽게 되었다. '평범'이라는 단어가 눈에 확 들어왔다. '평범'은 동아시아 전통 패러다임을 대표하는 키워드 중의 하나다. '조화 調和'가 유가 사상을 대표하는 단어라면, '평범'은 도가道家 사상을 대표하는 단어다.
너무 반가웠다. 그 당시 무연고 작가님은 '보구씨의 평범한 하루 이야기'를 8편 올려주셨는데 단숨에 읽었다. 읽자마자 댓글로 엄지 척! b.b.감탄의 마음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고의 진리를 글감으로 포착한 것도 그렇거니와, 평범하고 담담한 필체가 더욱 인상적이었다. '평범'은 말과 글로 옮기는 순간 뭔가 '비범'해지기 쉬운데 작가님은 여전히 쉽고 친근하고 평범한 목소리로 평범을 이야기한다. 필력의 내공이 장난이 아니시다.
여기에 우리 동아시아 옛 현인들의 '평범'이 더해진다면, '보구씨의 평범한 하루'는 작가님의 필력과 만나 더욱 뿌리 깊은 지혜의 나무로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고단한 삶의 여정에 지친 나그네들의 영혼이 편하게 쉬어가는 따스한 쉼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에 이야기의 또 다른 주인공들이 떠올랐다. 재잘재잘 아기 참새, 노오란 국화 아가씨, 뭉게뭉게 구름 아저씨, 곱디고운 노을 할머니, 지팡이 짚고 가시는 땅거미 할아버지... 작가님이 그런 보구씨의 이야기를 쓰신다면 동화처럼 멋진 이야기가 탄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필자가 왜 그런 글감들을 생각하게 되었는지 알려드리고 싶었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다. 작가님의 창작에 작은 도움이라도 된다면 큰 행복이겠다.
생각해보기
먼저 <생각해보기> 시간이다. 심심풀이 땅콩 삼아 아래의 질문에 답변해 보시길. 난센스 퀴즈가 아니다.
1. 다음 중 중국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주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① 유가儒家 ② 불가佛家 ③ 도가道家 ④ 도교道敎 ⑤ 기독교
2. '도가道家'와 '도교道敎'는 같은 것일까요? 차이가 있다면 어떤 걸까요?
3.'도가道家'와 '도교道敎'의 내용을 대표하는 한자 어휘는? 각자 네 글자. 고등학교 때 배우셨을 듯.
별유천지비인간
왜 산에서 사느냐 물으시는가?
빙그레 웃음으로 대답하니 마음이 한가롭다.
복숭아꽃 흘러 흘러 저 물 따라 어디로 가는 걸까.
여기는 별천지, 인간세상 아니로세.
問余何事棲碧山, 笑而不答心自閑. 桃花流水杳然去, 別有天地非人間.
이백李白의 유명한 시 <산중문답 山中問答>이다. 별유천지비인간이라는 말은 바로 이 시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경지가 있다. 하나는 "빙그레 웃음으로 대답하니 마음이 한가로운" 내면의 세계, 도가의 경지다. 또 하나는 "복숭아꽃 흘러 흘러 저 물 따라 어디론가 흘러가는" 신선의 세계, 도교의 이상향이다. 중국 동진東晋시대 도연명陶淵明(365~427)의 <도화원기 桃花源記>에 기록된 '무릉도원'을 노래한 구절이다.
내 몸의 터럭 하나와도 바꿀 수 없다
'도가道家'와 '도교道敎' 이야기부터 해보자.
처음에는 졸려도 잠깐만 참고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시라. 금방 재밌어진다.
많은 사람이 '도가'와 '도교'를 혼동한다. 심지어 중국문학을 전공한다는 분들도 그 둘을 비슷비슷한 것으로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 아니다. '도가'와 '도교'는 한 글자 차이지만 호리지차毫釐之差(터럭 하나의 차이)가 천리지차千里之差라고,그 실체를 알고 보면 차이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정 반대다.
먼저 '가家'와 '교敎' 사이에도 큰 간극이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가家'는 삶과 우주의 원리에 대해 깨달음을 얻은 스승을 중심으로 모인 가족적 모임이다. 따라서 사상, 학문의 성격을 띠게 된다. '교敎'는 집단화된 '종교'다. 그 스승의 제자 중의 한 명이 대규모의 집단을 이끄는 교주가 되면,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스승을 신비화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해석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유가와 유교도 그렇고 불가佛家와 불교佛敎 사이에도 커다란 간극이 존재한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권위가 필요한 자'들은 '권위 있는 스승'인 공자를 팔아먹고, 노자 장자와 석가모니를 팔아먹고, 하나님과 예수를 팔아먹으며 우리에게 복종을 강요한다.
그 차이가 가장 심한 것이 도가와 도교다. 유가와 유교,불가와 불교는 맥락이 이어지기라도 하는데, 도가와 도교는 아예 아무런 상관도 없다. 그 실체를 들여다보면 극과 극으로 오히려 정 반대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반대라는 말일까?
'도가'는 '노장老莊 사상'을 말한다. 춘추시대(BC 8C~ BC 403) 노자老子가 남긴 《노자》라는 책과, 전국시대(BC 403 ~ AD 221)의 장자莊子가 남긴 《장자》라는 책에 담겨있는 사상을 묶어서 이르는 말이다. 그 핵심 사상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네 글자 맞죠? ^^) 인류가 공동으로 지향해야 하는 그 어떤 정신적 경계다. '무위자연'이 무슨 뜻일까? 그게 이야기의 핵심이다. 그러나 오늘은 이야기의 흐름 상, 먼저 '도교'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도교'는 민간의 토종 신앙이다. 주로 정치적 모순이나 사회의 타락과 부패, 전쟁 등 환란이나 자연재해 그리고 세상살이에서의 좌절과 불만 등이 극심할 때 그 모습을 드러냈다. 진시황이 서불徐市(서복 徐福)을 시켜 동방의 삼신산에 가서 불로초를 구해오라고 한 것도 일종의 도교적 패러다임이라고 하겠다.
그런 민간 신앙이 대규모 집단으로 뭉치게 된 것은 후한後漢 말엽 장릉張陵(34~156?)이 오두미도五斗米道를창설한 것이 최초다. 비슷한 시기에 장각張角이란 자도 태평도太平道를 세웠는데 머리에 누런 띠를 두르고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소설 《삼국지》에도 등장하는 이른바 황건적黃巾賊의 난이다.
'도교'에는 여러 유파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송나라 때에는 왕중양王重陽의 전진파全眞派가 있었고, 태극권을 창시한 장삼봉張三奉의 무당파武當派도 있었다. 그들의 핵심 사상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불로장생 不老長生'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신선 사상'이며, 줄여서 말하면 '선 仙'이다. 신선이 되고자 하는 것이 도교의 목표인 것이다.
도가: 무위자연 無爲自然
도교: 불로장생 不老長生
그런데 생각해 보시라. 누가 불로장생을 하고 누가 신선이 되겠다는 이야기일까? 온 천하 사람들을 모두 신선으로 만들겠다는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 무협소설에서는 그럴듯하게 포장했지만 결국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온 천하가 망하고 나라가 망하더라도 상관없다. 나 혼자서만 불로장생하고 나만 신선이 되면 된다. 나를 두목으로 따르고 줄 서서 폴더 인사하며 충성을 맹세하는 조직의 구성원에게는 약간의 비결을 전수하며 혜택을 주기도 한다. 극단적인 위아주의爲我主義요, 자기 중심주의 논리다.
그런 도교의 생각 패러다임을 깔끔하게 정리해 놓은 말이 있다.
내 몸의 털 하나를 뽑아서 온 천하를 이롭게 하자고? 싫다! 절대 안 한다!
"拔一毛而利天下, 不爲也! " 《맹자孟子 · 진심盡心 상上》
전국시대의 사상가인 양주楊朱(BC 440? ~ BC 360?)라는 자가 한 말이다. 극단적인 이기주의의 발로다. 그런데 그 당시 민초들은 그런 말에 혹해서 그를 따랐단다. 그 현상을 깊게 탄식하며 맹자가 자신의 저서에 기록해 놓은 말이다. 아무튼 이 말이 도교 패러다임의 출발이었다. (네이버 지식사전에는 노장사상의 일단으로 발전시켰다고 나오는데, 도가와 도교의 엄청난 차이를 인식하지 못한 오류다.)
재미있는 것은 그 모든 도교의 유파들이 공통적으로 노자老子를 교조敎祖로 모셨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노자가 남긴 《노자》라는 책을 자신들의 경전으로 삼고 이름을 《도덕경 道德經》으로 바꿔버렸다. 아니, 이런 사기꾼들! 노자가 그런 극단적 이기주의를 가르쳐줬다고?별것도 아닌 위장이었지만 어리석은 민중에게는 썩 잘 먹히는 전술이었다. 공정과 상식을 부르짖으면 손바닥에 임금 왕 자를 써서 보여줘도 당선되지 않는가! 차제에 학계에서의 공식 명칭은 《도덕경》이 아니라 《노자》라는 것을 뽀나스 상식으로 알아두자.
아무튼 노자와 장자의 '무위자연' 사상과 도교가 추구하는 '불로장생'은 완전히 다르다.
어떻게 다를까? 힌트: 평범.키포인트는 거기에 있다.
그러나 서두르지는 마시라. 먼저 도교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불로장생 이야기부터 해야 한다.
도교의 도사들은 대체 어떻게 신선이 되고 불로장생을 하겠다는 이야기였을까?
크게 세 가지 방법이 있었다. 첫째, 토납법吐納法.
1974년 호남성湖南省 장사長沙 마왕퇴馬王堆 3호 한묘漢墓에서 출토된 《도인도導引圖》(左)와 그 복원도(右)이다. 그런데 저런 동작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으신가? 그렇다. 중국에 가면 새벽 인근 공원에서 저런 동작으로 태극권을 수련하시는 양반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기공氣功을 하는 장면이다. 요새는 우리나라에서도 명상법으로 많이 활용하는 모양이다. 그 모든 것을 통칭해서 '토납吐納'이라고 했다. 요샛말로 하자면 '호흡呼吸'이다. 여러 가지 자세와 방법으로 체내의 노폐물을 내뱉고(吐, 呼) 대자연의 신선한 정기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행위(納, 吸)다. 도인導引, 단전호흡丹田呼吸 등등 여러 가지 명칭과 방법이 있었다. 불로장생, 신선이 되고자 하는 첫 번째 방법이었다.
둘째, 연단술鍊丹術. '연鍊'은 '제조한다', '단丹'은 '단약', '신비의 영약'을 말한다. 즉 '연단술'이란 불로장생 할 수 있는 신비의 영약을 제조하는 기술'이라는 뜻.
위진남북조 시대에 이르자 점차 실크로드가 열리고 서방 세계의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중국의 권력자와 지식인들은 그중에서도 요상한 화학 물질을 어찌어찌 제련하면 황금도 만들 수 있다는 연금술鍊金術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권력자들의 관심은 황금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황금이야 얼마든지 있는 것, 관심사는 오로지 불로장생이었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진시황도 불로초를 구하지 못해 결국 비명에 죽지 않았던가. 그런데 서방세계에서 건너온 최신 과학의 힘을 빌리면 황금도 제련해 낼 수 있다는데, 혹시 신선이 될 수 있는 신비로운 영약을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수많은 황제와 지식인들이 각자의 비법으로 신비의 영약을 직접 만들어 먹었다. 그 결과가 어찌 되었을까?
당나라 황제 20명 중의 절반 이상이 자기가 직접 만든 그 영약을 복용한 후... 꼬로록~~~ 그대로 신선이 되어 하늘나라로 올라가셨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수은 복용설) 연단술은 엄청난 부작용을 낳고 수많은 인명을 앗아갔지만, 그 대신 후세 중국의 화학과 의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화약과 로켓도 발명했고, 신비로운 효과를 지닌 묘약들이 비전秘傳으로 전승되기도 했다. 연단술이 후세에 미친 긍정적 효과였다.
연단술은 불로장생의 신선이 되고자 하는 두 번째 방법이었다.
세 번째 방법은 방중술房中術이었다.
《소녀경素女經》은 그 비법이 담긴 도교의 경전이었다. 20여 년 전, 고등학생 필독도서 목록에 이 책이 끼어 있어서 난리가 난 적이 있다. 알고 보니 어느 고등학교 여선생님이 음란서적인 줄 모르고 추천했는데, 위에서 살펴보지도 않고 목록에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물론 고등학생이 읽기에는 부적절한 책이다. 그러나 '음란서적'은 아니다. 브런치에서 설명하는 건... 음, 좀 거시기하긴 하네. 워, 워~ 애들은 가라, 애들은 가!
아무튼 성행위를 통한 기氣의 운공으로 연년익수延年益壽 불로장생, 신선이 되고자 하는 세 번째 방법이었다는 것 정도로 알아두자. 땅, 땅, 땅! 통과!
참, 하나만 더 알아두자. 흔히 알려진 것처럼 여성을 비하하고 무시하는 차원의 이야기는 아니다. 남녀를 막론하고 권력 있고 돈 많은 기득권자들이면 누구나 이 방중술의 비법으로 젊어지고자 했다. 당나라 때는 여성도 많은 남성을 '사귀는' 시대였음을 뽀너스 상식으로 알아두자. 신라 선덕여왕 때 여성 권력자였던 미실美室을 생각하면 된다.
방중술은 불로장생의 신선이 되고자 하는 세 번째 방법이었다.
무릉도원, 신선 세계의 주민이 되어라
또 하나의 방법이 있었다. 주로 권력 없고 돈도 없고 머리에 든 것도 별로 없는 가여운 민초들이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할 것 같은 유토피아의 낙원을 찾아내어 아예 그 신선 세계의 입주민이 되는 길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낙원’의 모델은 ‘무릉도원 武陵桃源’이다. 후세의 모든 동아시아인에게 ‘이상향’의 대명사로 각인된 바로 그곳이다. 먼저 ‘무릉도원’을 최초로 소개하고 있는 동진東晋시대 도연명陶淵明(365~427)의 <도화원기 桃花源記> 전문을 읽어보자. 원문은 인터넷에서 쉽게 검색이 가능하므로 생략한다.
진晉나라 태원太元 연간의 일이다. 무릉武陵 땅의 한 어부가 물고기를 잡느라 배를 타고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였다. 양쪽 강가에 끝없이 펼쳐진 복숭아 꽃밭이 나타났다. 다른 나무는 없었다. 오로지 복사꽃뿐이었다. 싱그러운 꽃잎이 바람에 어지러이 날리고 있었다.
황홀경에 빠진 어부는 끝까지 가보고자 자꾸만 배를 저어 나아갔다. 복숭아 꽃밭이 끝나고 물길이 끊어진 곳에 도착하자 산이 나타났다. 자그마한 동굴이 있었다. 빛이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배에서 내린 어부는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동굴의 입구는 겨우 사람 하나 다닐 만큼 매우 비좁았다. 그러나 수십 걸음 안으로 들어가자 눈앞이 탁 트였다. 드넓은 땅에 가지런한 집들이 나타난 것이다.
기름진 전답과 아름다운 연못, 뽕나무와 대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두렁길이 이어진 곳에서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가는 사람, 농사짓는 사람들이 입은 옷들은 바깥세상에서 사는 여염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어린아이 노인들을 막론하고 모두 행복하고 즐거운 표정이었다.
어부를 발견한 그들이 깜짝 놀라 몰려들어 어디서 왔느냐며 질문을 퍼부었다. 어부가 일일이 답해주자 집으로 데려가 술을 마련하고 닭을 잡아 식사를 대접했다. 소문을 들은 마을사람들이 몰려와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들이 말했다.
“진秦나라 때 조상님들이 전란을 피해서 들어왔다오. 처자들을 데리고 마을사람들이랑 세상과 담을 쌓은 이곳에 들어온 후로 한 번도 바깥에 나간 적이 없지요. 그래서 바깥세상이랑 완전히 두절된 게요. 그나저나 요즘 바깥세상은 어떻수?”
그들은 위진魏晉 시대는 물론, 한漢나라가 있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어부가 일일이 아는 바대로 답변해 주자 모두들 놀라워했다. 마을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집으로 어부를 초대하여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 며칠 동안 묵은 어부가 이별을 고했다. 그중 어떤 이가 말했다. “바깥사람들한테 여기 이야기는 하지 말아 주시구려.”
어부는 바깥에 나오자 배를 타고 왔던 길을 돌아가며 곳곳마다 표시를 해두었다. 그리고는 고을 원님을 찾아가서 자신이 겪은 일을 아뢰었다. 원님은 즉시 어부에게 사람을 딸려 보내 표시해 둔 곳을 찾게 하였으나 끝내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남양南陽 땅의 유자기劉子驥라는 고결한 선비가 그 이야기를 듣고 기뻐하며 그곳을 찾아가고자 하였으나, 끝내 결실을 보지 못하고 병을 얻어 죽었다. 그 후 아무도 그곳으로 가는 길을 묻는 이가 없었다.
이 글에 등장하는 ‘무릉도원’의 특징은 무엇일까? 첫째, ‘절경絶境’이다.우리는 흔히 아주 아름다운 풍광을 보면 '절경'이라고 감탄한다. 그러나 원래 ‘절경絶境’이란 '외부 세계와 완전히 차단된 공간'을 뜻한다. 평범하지 않다. 둘째, 전쟁과 갈등이 없다. 원래 인간 세상이라면 갈등과 전쟁이 없을 수 없다. 인간은 욕망의 동물, 모순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전쟁과 갈등이 없는 곳이라면 평범한 곳이라고 할 수 없다.
셋째, 무릉도원은 시간이 멈춰버린 곳이다. 무릉도원의 주민들이 기억하고 있는 바깥세상은 아직도 몇백 년 전에 머물러 있었다. 시간의 흐름을 구태여 인식할 필요가 없는 것, 그것이 ‘무릉도원’의 삶이다. 시간이 멈춘다면 당연히 불로장생하게 된다. 그러나, 이 세상에 과연 그런 곳이 존재하고 있을까?
그 당시 사람들은 있다고 믿었다. 이 세상 어딘가에는 반드시 그런 곳이 있다고 믿으며 너도나도 그곳을 찾아 헤맸다. 신선 세계를 찾아 헤매는 그런 풍조를 '돌아다닐 유遊', '신선 세계 선仙', '유선 遊仙'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유선' 풍조가 그 당시에만 있었을까? 아니다. 오늘날 우리도 그 '무릉도원'을 찾아 헤매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필자였다.
1976년 어느 초여름 날. 그때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무릉도원을 꿈꾸기 시작했다. 적막의 오후. 지리산 깊은 계곡 절벽 끝에 불일폭포가 걸려 있었다. 텅 빈 산, 장마 틈을 비집고 나온 햇살이 폭포의 물보라 위에서 무지개를 만들고 있었다. 그때였다. 부스럭 풀숲 헤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바위 뒤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길게 땋은 댕기머리, 까무잡잡 수염, 베옷에 짚신 차림의 청년이었다. 지리산 청학동에 파묻혀 산다는 그 청년의 돌연한 출현은 나로 하여금 문득 시간의 블랙홀에 빠져 몇 백 년 전의 조선시대로 날아온 게 아닌가 착각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때부터 나는 무릉도원을 찾아 헤맸다.
잠시 엉뚱한 이야기 하나. 필자가 대학생 때는 중국 지도만 가지고 있어도 국가보안법 위반이었다. 중국 땅 어디에 뭐가 있는지 가르쳐주지도 않았고 배울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교수가 되고 나서 드디어 중국 지도책을 구했다. 매일같이 깨알 글씨의 한자가 새겨진 지도책 위에서 가상 여행을 다니는 일은 삶의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탄성을 질렀다. 중국 호남성湖南省 동정호洞庭湖 서남쪽 방향에 무릉武陵 도원桃源이라는 지명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아니 그럼, 무릉도원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말인가? 은밀한 욕망이 싹텄다. 그리고 1996년 5월, 그 옛날 동진 시대 사람들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신선 세계의 땅, 무릉도원을 찾아갔다.
무엇이 있었을까? 아무것도 없었다. 그곳에 있는 커다란 도연명의 조상彫像에는 그가 거기서 은거생활을 했단다. 뻥이다. 그런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도화원기>에 나오는 그 어떤 광경과도 들어맞는 곳이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유토피아를 그리워하는 인간의 노스탤지어를 노린 상술만이 존재할 뿐.
도연명은 <도화원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말했다. “그 후로는 아무도 그곳으로 가는 길을 묻는 이가 없었다. 後遂無問津者” 그 말이 무슨 뜻이겠는가? 세간에 나도는 무릉도원에 대한 헛소문을 기록하고 난 후,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으니 찾아 헤매지 말라” 그런 충고를 덧붙인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나는 도연명의 충고를 무시하고 무릉도원을 찾아갔던 것이다. 여러분은 어떠하신가?
오늘날 중국의 도교 사원에 가면 온갖 신령님이 다 모여 산다. 옛날부터 받들어 모시던 도교의 신령님들은 물론이요, 공자님 맹자님 석가모니와 여러 부처님들, 그리고 기독교의 하나님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각자 자기 좋아하는 온갖 신령님(?)들 초상화를 여기저기 걸어놓고, 그 앞에서 신나게 두 팔을 앞뒤로 흔들면서 빠이빠이(拜拜), 중국식 절을 하며 간절히 소망을 비는 광경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무슨 소망일까? 위기에 처한 인류의 지속 가능성을 고민하며 가난한 백성 죽어가는 세상을 살릴 수 있도록 해주소서... 그렇게 소망하는 걸까? 그럴 리가 없다. 그들은 오로지 돈 많이 벌게 해 주소서, 오래 살게 해 주소서, 남이야 망하든 말든 우리 아들 합격하게 해 주시고, 세상이야 망하든 말든 나는 부자 되게 하고 출세하게 해 주고 모든 욕심 채우게 해 주소서... 그렇게 소망한다. 그게 도교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중국에서 제일 영향력이 큰 것은 유가도 아니고 불가도 아니고 도교 패러다임이다. 그게 중국만의 이야기일까?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기독교를 믿든 불교를 믿든 무엇을 믿든 자기만의 행복을 비는 기복祈福 신앙은 샤머니즘이다. 도교적 패러다임인 것이다.
21세기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행하는 문화의 트렌드는 무엇일까?
TV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어떤 프로그램이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가?
첫째, '건강'이다. 최신 현대 의학의 힘을 빌려 인간의 수명은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신비의 명약들이 발명되고 있고, 정신 건강을 위한 요가와 명상 프로그램도 점점 많아진다. 그 옛날 중국인들처럼 불로장생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오래오래 살고, 가능하다면 죽지도 않는 신선의 세계를 꿈꾸고 있다.
둘째, '음식과 여행'이다.'절경'의 아름다운 땅에서 귀한 먹거리로 만든 맛난 음식을 먹는 게 지상 최대의 행복이다. 현실에서 신선 세계를 찾아다니는 현대판 '유선' 풍조다.
셋째, '종교'다. 기독교를 믿든 불교를 믿든 비슷하다. 우리 자식 잘 되라고, 출세해서 성공하게 해달라고 정성껏 기도한다. 출세와 성공? 그게 무슨 뜻일까? 좋은 학교 합격해서 좋은 직장 다니고 월급 많이 받는 것. 그래서 맛난 거 먹고 좋은 곳에 놀러 다니고 남들 위에 군림하는 것, 그렇게 살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말이 좋아 종교이지, 그런 믿음은 '구복求福' 신앙, '기복 祈福' 신앙, 원시 신앙, 샤머니즘이다.
그 모두가 도교 패러다임이다.
도교 패러다임은 평범하지 않다.
공자가 말했다. "열다섯 나이에는 배움에 뜻을 두어야 한다 十有五而志於學" 학생들에게 그 말을 들려주면 십중팔구 반감을 보인다. “꼭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하나요? 난 평범하게 살고 싶걸랑요? 그냥 아무나 되면 안 돼요?” 이효리가 아무나 되어도 상관없다고 그랬단다. 나도 동의한다. '평범'은 가장 큰 진리 중의 하나이니까. 문제는, 그러면서도 열다섯스물 나이의 그들의 욕망은 절대로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 오히려 그 반대다. 어떻게 해서든 최대한 만족시키려고 발버둥을 친다. 어떻게 아느냐고? 나도 그랬으니까. 그게 열다섯스물 나이의 보편적 특성이다. <열다섯 나이에 배워야 할 것은> 참고.
열다섯 나이를 벗어난 대부분의 독자 여러분, 지금은 어떠신가?
평범하게 살고 싶다면서도 정작 우리들의 욕망은 전혀 평범하지 못하다. 남들 이야기가 아니다. 나부터가 그렇다. 욕망 덩어리로 태어난 우리네 인간이 지니는 존재의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삶의 모습이 바로 도교 패러다임인 것이다. 그래서 늘 도가의 이야기를 들려줘야 한다. 도가의 이야기로 늘 나 자신을 살살 달래고 타일러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도가의 이야기란 대체 무엇일까? 요약 정리하면 '무위자연'이란다. 그게 대체 무슨 심오한 뜻인지, 배우려 마음먹으니 미리 현기증부터 나려고 한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쇳소리로 쉽게 열강을 해주어도 뭔 소리인지 들을수록 헷갈린다. 노장 사상을 이십 년 동안 가르치셨다는 대만대학 철학과 교수님도 솔직히 자기도 자기가 무슨 얘기를 떠들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수업 시간에 고백한 적이 있을 정도다.
하지만 겁먹으실 필요는 전혀 없다. 아주 쉽고 재미있게 도가 사상의 핵심을 배우고 익히고 일상생활에서 실천하실 수 있다. 소오생이 잘나서 설명을 잘해드릴 자신이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철학'으로 따지면서 설명하면 설명을 할수록 머리가 아파진다. '철학'이 아니라 '문학'이다. '문학'으로 느끼고 감상하시면 저절로 체득된다. 도연명의 문학 세계가 우리를 따스한 '평범'의 세계로 안내해 줄 것이다. 기대하셔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