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오생 Aug 08. 2024

08. 여백의 즐거움 (3)

달마의 수염과 왕유의 여백

이 글을 읽는 즐거움을 좀 더 만끽하고 싶으시면 아래의 글을 먼저 읽어주세요.

특히 두 번째 글은 꼭 읽으셔야만 전체적인 맥락을 제대로 파악하실 수 있습니다.

<06. 여백의 즐거움 (1)> & <07. 여백의 즐거움 (2)>


전편의 마지막 장면


송나라 8대 황제 휘종 조길趙佶은 고금동서의 모든 임금 중에서 가장 뛰어난 예술가였다. 그는 종종 과거 시험 제목으로 시 구절을 내주고, 그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그중 가장 유명한 시험 제목으로 아래와 같은 두 개의 시 구절이 전해진다. 물론 과거 시험을 본 시기는 서로 다르다.


( 1 ) <깊은 산에 묻힌 절 深山藏幽寺>

( 2 ) <꽃을 밟고 돌아오니 말발굽이 향기롭다 踏花歸來馬蹄香>


여기서 돌발 퀴즈!


일등으로 합격한 그림은 각각 어떤 모습이었을까?

여러분이라면 위의 제목으로 어떤 구도의 그림을 그리실 것인가?


기억나시죠? ^^

생각해 보셨나요? 많이 생각해 보셨나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얼마나 생각해 보셨나요?

그렇게 생각하시니까 어떤 현상이 일어나던가요?

자, 오늘의 이야기, 시작합니다. ^--^



달마 얼굴에 수염 없는 까닭은



장원급제를 한 그림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안타깝게도 그 그림은 오늘날에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전해지는 에피소드를 통해 화폭의 구도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짐작할 수는 있다. 먼저 ( 1 ) 번 문제부터.


( 1 ) <깊은 산에 묻힌 절 深山藏幽寺> :


절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그저 스님 한 명이 계곡으로 물 길러 나온 모습만 있었을 뿐. 생각해 보시라. 스님이 물을 길으러 나왔으니, 필경 어딘가 근처 깊은 곳에 절이 파묻혀 있을 것 아닌가.


( 2 ) <꽃을 밟고 돌아오니 말발굽이 향기롭다 踏花歸來馬蹄香> :


정말 어려운 문제다. '꽃을 밟는' 주체는 누구일까? 뒤에 '말발굽'이라 하였으니 아마도 '말'일 듯. 말이 꽃밭을 지나온 모양이다. 그런데 '돌아오니'라고 하였으니 ①지금 말의 주인이 귀가하는 것 같고,  ②꽃밭을 지난 시점은 '현재'가 아니라 '과거'인 듯. ③그러니까 화폭에는 '말'과 '말의 주인'만 등장할 수 있을 뿐, 꽃밭이 나오면 안 된다는 이야기.


결정적인 난관은 '향기'다. 꽃밭도 그리면 안 된다니,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향기를 대체 어떻게 시각적으로 묘사한단 말인가! 뒤늦게나마 힌트를 드릴까? 힌트는... 선덕여왕! 앗, 너무 많이 드렸나? ^^;;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장원급제한 그림에는 말을 타고 귀가하는 누군가의 뒤로... 한 무리의 나비가 쫓아가고 있었단다. 왜? 말발굽에 묻은 꽃에서 풍겨 나는 진한 향기에 취한 나비들이 그 말을 따라가고 있다는 이야기. 크~~ 발상이 너무 멋지다.


이 꽃에는 향기가 없겠군요. 당나라 사신이 가져온 모란꽃그림을 보고 선덕여왕이 모란에는 향기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맞혔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선덕여왕은 어떻게 짐작했을까? 꽃에는 나비가 있게 마련인데 그 그림에는 나비가 없으니 필경 향기 없는 꽃일 것이라고 짐작했다는 이야기. 그 모티프(motif)를 역으로 생각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다.




그 후 그 제목과 그 에피소드를 모티브(motive)로 삼아 수많은 사람들이 그림을 그려 보았단다. 아래는 중국 포털 사이트 바이두에 올려진 것들 중에서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소오생이 고른 그림이다. 둘 다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어쩌겠는가. 능력의 한계가 있으니 직접 그릴 재주는 없고. 언젠가 AI로 그려보면 어떨까 싶다. 여러분이 머릿속에 그려보신 것은 어떠하신가? 누군가 꼭 멋진 그림을 올려주셨으면 참 좋겠다.

(좌) <깊은 산에 묻힌 절 深山藏幽寺>. (우) <꽃을 밟고 돌아오니 말발굽이 향기롭다 踏花歸來馬蹄香>. 그림의 키포인트는 나비다. 말발굽에 묻은 향기가 얼마나 강한지 나비들이 그 냄새를 맡고 따라오는 그림이 장원급제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모두 작가 미상.




그런데...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아니, 진짜 중요한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혹시 어떤 분은 '정답'을 맞추고 좋아하실 지도 모르겠다. 크크크 역시 난 천재야.

또 어떤 분은 은근히 속이 상하실 지도 모르겠다. 아 모야 짜증 나네?

또 어떤 분은 예전부터 '정답'을 알고 계셨는지도 모르겠다. 으흐흐 난 다 알고 있지롱~


그런데 여러분, 달마 얼굴에 수염 없는 까닭은 알고 계시는가? 엥, 이건 또 무신 허튼소리? 궁금하신 분은 꼭 읽어보시라. <달마 얼굴에 수염 없는 까닭은> ☜클릭. 아주 아주 중요한 내용이니 꼭 읽어보셨으면 좋겠다. 음... 근데... 아무래도 귀차니즘에 빠지신 분들을 위해 내용의 일부를 다시 소개해 드리는 게 낫겠다. ^^;;


------------------------

영화 《아제 아제 바라아제》를 보면, 주인공 순녀(강수연 분)가 머리를 깎고 계戒를 받으며 달기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노 비구니가 말한다. "저기 저 벽에 걸린 달마의 얼굴을 보아라. 저 달마의 얼굴에는 왜 수염이 없느냐?" 순녀가 잠시 울음을 멈추고 바라보니, 뭐야, 왕방울 눈에 산도적처럼 생긴 험악한 얼굴... 고슴도치 수염이 하나 가득이네? 그런데 왜 수염이 없냐니... 그때 노 비구니가 다시 말한다. "이것이 네가 평생 풀어야 할 숙제이니라."


소오생이 그린 달마도. 예전에 이 그림을 본 어떤 작가님이 까르륵 웃으셨다. 호호, 이렇게 개구진 달마는 처음 봐여. 얼마나 크게 웃으시던지, 그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

 

소오생도 '학문'에 관한 수업을 시작할 때면, 언제나 맨 첫 시간에 같은 질문을 던져놓고 말한다. "여러분은 평생 안 하셔도 됩니다. 이번 한 학기 동안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인터넷 검색은 절대 금지라고 했더니만 나중에 들으니 그런 말을 들으면 더 궁금해져서 더 검색했단다. 근데 그래봤자 수염은 있는데 답은 없더라, 그래서 더 답답해졌노라, 성화가 이만저만이 아닌지라 학기말이 되면 부득불 그 수염을 깎거나 뽑게 된다.

------------------------


동아시아의 공부하는 학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유학자이든 불자佛者이든 도사이든 간에 모두들 '무념 · 무상 · 무아'의 경지를 최상의 결과로 여긴다. '나'의 존재마저도 잊어버린 채 아무 생각이 없는 그 맑은 경지에 들어서야만 불현듯 커다란 깨달음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명상도 하고 참선도 하는 거란다.


문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곳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으려면 오히려 백팔번뇌, 온갖 잡생각들이 일시에 다 쳐들어오기 마련이라는 사실! 무념 · 무상 · 무아는커녕 자칫 절세의 무공을 연마하다가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진 무술 고수처럼 크나큰 부작용에 시달릴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의 선인들이 사용한 비법이 있었으니, 바로 '수일守一'이었다. '수일'은 '한 가지만 지킨다'라는 뜻이니, 곧 '한 가지만 골똘히 생각한다'라는 뜻. 즉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하다가는 오히려 역효과가 나니까, 그 이전 단계로 먼저 한 가지 생각에 정신을 집중한다는 이야기다. 옛말에도 '정신일도精神一到 하사불성何事不成', 정신을 하나로 집중시키면 못 이룰 일이 없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저기 저 달마의 얼굴에는 왜 수염이 없느냐?" 그 질문에 몰두해도 마찬가지다. 달마 얼굴 수염, 얼굴 수염, 수염, 수염, 수염...... 계속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다 보면, 어느 순간, 수염마저 잊어버리고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멍~ 때리게 된다는 이야기. 그 순간이 바로 곧 무념무상, 여백의 시간이라는 뜻.


그 순간이 피곤에 지친 우리의 대뇌가 잠시 활동을 멈추고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라는 뜻이다. '달마의 수염'은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된 주인공 순녀가 속세에 대한 잡념을 버리고 여백의 경지로 들어갈 수 있도록 노 비구니가 던져준 한 가지의 생각거리, 즉 '화두話頭'였다.


이때 학생들의 반응이 아주 재미있다. "와~! 선생님, 저 맞췄어요! 수염이 있고 없고, 그게 중요한 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걸랑요!" 설명을 듣고 어떤 녀석들은 신이 나서 기고만장이다. 하하, 귀여워라. 하지만 그것도 틀렸다. 답을 맞히고 못 맞히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얼마나 하나에 몰두하여 생각하고, 얼마나 멍을 때려서, 얼마나 평화로운 영혼과 육체의 상태를 누리게 되었는지 그게 중요한 거다.




우리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이 글의 제목이 무엇인가? <여백의 즐거움> 아니던가? 더구나 왕유의 <향적사를 찾아서> 그 시의 경지를 음미하고 있는 중 아니던가? '향적사'는 현상 세계의 듣는 것, 보는 것, 형태와 지식, 말과 뜻 따위의 그 무엇으로도 규정지어지지 않은 '여백' 아니던가. '여백'이란 현상 세계의 그 어떤 형태와 결과에도 얽매이고 집착하지 않는 것 아니던가.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어떤 구도의 그림인지 그 '답'을 맞추고 못 맞추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얼마나 골똘히 생각에 빠져보았느냐, 그게 중요하다. 왕유가 '향적사'를 화두로 깊은 사색과 명상에 빠졌듯이, 우리도 그 '답'을 화두로 삼아 얼마나 정신을 집중해 보았는지 그게 중요하다. 그러다가 마침내 어느 순간, 모든 것이 텅 비어버린 무념무상 ― 피곤에 지친 대뇌가 활동을 멈추고 참된 휴식을 취하는 그 여백의 시간을 가져보았느냐, 그게 중요한 것이다.




삶에 여백을 가져보자.

생각의 여백을 가져보자.


누군가를 사랑하시는가?

아무 생각 없이 사랑해 보자. 텅 빈 마음으로 사랑해 보자.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결과'보다는 '과정'을 더 중시하자는 것이냐고 묻는다. 아니다. 과정과 결과, 행복과 불행, 선과 악... 그런 건 이분법적인 패러다임에서 나온 말이다. 그런 구분과 개념조차도 잊어버리고 텅 빈 마음으로 사랑해 보자.


글쓰기를 사랑하시는가?

아무 생각 없이 사랑해 보자. 텅 빈 마음으로 사랑해 보자. 라이킷, 조회수, 발행, 출간, 베스트셀러, 인기 작가... 그런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텅 빈 마음으로 사랑해 보자.


글쓰기는 허정응신虛靜凝神, 마음을 비우고 정신을 하나로 모으는 과정을 통해 자기 삶의 뼈대를 세워나가는 수양의 시간이요, 여백의 시간이다. 그게 동아시아 글쓰기의 전통 정신이다. 글쓰기는 동아시아 '학문'의 출발이요, 마지막인 것이다.


마무리로 왕유의 시 몇 수를 소개한다.

해설은 화두를 던져주는 것으로 대체하고, 최대한 여백을 남겨놓으려고 한다.

각자 감상하고 음미하며 사색과 상상, 진정한 휴식의 즐거운 여백의 시간을 가져보시라!




<죽리관 竹里館>


그윽한 대나무 숲에 홀로 앉아,

거문고 뜯다가 또다시 장소長嘯를 터뜨리네

깊고 깊은 숲 속이니 그 누가 알겠는가,

밝은 달이 찾아와 서로 함께 비춰보네.

   

獨坐幽篁裏, 彈琴復長嘯。

深林人不知, 明月來照。

그의 시에는 '장소長嘯'란 단어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길게 휘파람 분다'라는 뜻. 그러나 사실 '장소'는 도교 수련 방법 중의 하나다. 육조六朝 시대의 유명한 도사 갈홍葛洪에 의하면, 신선이 되기 위한 도교의 수련 방법으로 크게 세 가지가 있었다. 보정補精, 즉 '접이불루接而不漏'의 방법으로 동녀童女와 교접하는 이른바 '방중술房中術'이 그 첫째요, 불로장생의 기화요초를 구하기 어려우니 만들어 먹자는 '연단술鍊丹術'이 그 둘째다.

그러나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방법은 '행기行氣' 또는 '토납吐納'이라고 하는 일종의 호흡법이었다. 요사이 많은 관심을 끌고 있는 '단학丹學'이나 '기공氣功'이 이에 속한다. '장소'는 당나라 때 유행했던 호흡법의 하나로, 유명한 도사이기도 했던 이백의 시에도 자주 등장하는 단어다.

왕유가 좌선할 때 수일의 방법으로 채택한 것은 선가의 언어를 화두로 삼는 방법도 있었지만 이 같은 도교의 호흡법도 있었다. 젊은 시절 왕유는 소림사 뒷산인 숭산에서 은거하기도 하였는데, 당시 숭산에는 유명한 초련사焦練士가 은거했다니 혹시 그에게 '장소'의 비법을 전수받았는지도 모르겠다.

* 연사練士 : 도력道力이 높고 수련이 깊은 도사.

왕유의 마음을 먼저 사로잡았던 것은 불교가 아니라 장생불사를 말하는 도교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다가 만년에 들어가면서 점점 불교의 선종禪宗에 깊이 빠져들어간다.



<녹채鹿寨>


텅 빈 산

아무도 없는데

두런두런 어디선가 말소리.


울창한 숲 속

스며드는 노을빛

다시 푸른 이끼 위에 비추인다.   


空山不見人, 但聞人語響

返景入深林, 復照靑苔上

이 시의 '안자眼字'는 무엇일까?

중국시에는 대부분 '안자眼字'라는 것이 있다. '안자'는 작품의 '주제'를 알려주는 키워드와는 다르다. 주제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는 예술적 글자다. 여러 글자가 아니다. 딱 한 글자다. 하지만 이 글자가 없으면 주제가 제대로 부각되지 않는다. 작품 전체가 아연啞然 빛을 잃는 것이다. 그래서 옛날 어떤 문인은 그런 글자를 옥쟁반에 던지면 '땡그랑' 맑고 청아한 소리가 울려 퍼질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시의 '안자眼字'는 20글자 중에서 과연 무엇일까?



<가을밤 홀로 앉아 秋夜獨坐>


홀로 앉아 있노라니

귀밑머리 슬픈데

텅 빈 방에 찾아오는

깊은 밤의 나래

       

비를 맞고 떨어지는 산 과일 소리

등불 아래 숨어있는 풀 벌레 소리                


獨坐悲雙鬢, 空堂欲二更。

雨中山果落, 燈下草蟲鳴


소리. 중국 고전문학과 산수화를 감상하는 키워드...  



<종남별장 終南別業>


중년에는 도교에 심취하여

늘그막에 남산 기슭에 터 잡았다.    

흥이 나면 언제나 혼자서 찾아가네

좋은 경치 찾아내면 괜히 혼자 좋아한다.


中歲頗好道, 晩家南山陲。   

興來每獨往, 勝事空自知。


계곡 물이 끝나는 그곳까지 찾아가 

구름 이는 그때를 앉아서 지켜보네.

우연히 만난 나무 하는 늙은이와

담소를 즐기느라 돌아올 줄 모르네.


行到水窮處, 坐看雲起時 

偶然值林叟, 談笑無還期。


볼드체 부분... 얼마나 오래 앉아 있으면 구름이 일어나는 순간을 포착할 수 있을까. 그렇게 앉아서 바라보면 졸리지는 않을까. 엉덩이나 허리는 배기거나 아프지는 않을까.



<산기슭 가을 저녁 山居秋暝>


비 개고 난 산에는

나날이 짙어가는 가을빛

밝은 달, 소나무 사이에 비치고

맑은 물, 돌 위를 흘러간다

空山新雨後, 天氣晩來秋。

明月松間照, 淸泉石上流。


떠들썩한 대나무 숲

빨래 나간 여인네들 돌아오고

연꽃잎이 움직이니

고기잡이 나간 배가 지나간다.

봄꽃이여, 질 테면 지게나!

나는 이곳에 살며 지내리라.

竹喧歸浣女, 蓮動下漁舟。

隨意春芳歇, 王孫自可留。


나는 왕유의 이 그림 같은 시를 사랑한다. 여기에는 숨죽인 참선의 적막감 대신에, 도연명처럼 전원생활을 사랑하고 즐기는 소박한 삶에 대한 애정이 넘쳐 있다.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숨어 신선이 되기를 꿈꾸고 해탈의 세계를 엿보는 왕유가 아니어서 좋고, 전원의 평범한 이웃들에게 보내는 왕유의 따뜻한 애정의 시선이라서 더욱 좋다. 만년의 왕유는 깊은 산속이 아니라 망천輞川이라는 정겨운 시골 동네에서 살았다.



<새 우는 개울 鳥鳴澗>


인적 드문 곳

계수꽃이 떨어지니

조용한 밤

봄날의 산은 비어 있다

떠오르는 달에 놀라는 산새,

때때로 봄날 개울에서 노래한다.


人閒桂花落, 夜靜春山空。

月出驚山鳥, 時鳴春澗中。


떠오르는 달에 산새가 놀란 이유는 두려움이 아니라 신선함 때문이리라. 매일 밤 떠오르는 달을 보고 그때마다 새롭게 경이로움을 맛보는 시인의 정신적 완숙함이 돋보인다. 집착을 버리자 찾아온 여백의 시간, 깨달음의 세계에서 시인은 산새가 되어 즐겁게 노래한다. 그러자 그 작품 세계의 계절적 무대도 가을에서 봄으로 바뀌어 버렸다.


매거진의 이전글 07. 여백의 즐거움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