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유, <향적사를 찾아서> 감상
※ 당시唐詩의 흥성
청나라 강희 연간에 편찬한 《전당시 全唐詩》에 수록된 당나라 시인은 무려 2,300여 명. 현전 하는 작품은 약 50,000 편이나 된다. 290년 당나라(618~907) 역사에 등장했던 그 숫자가 그 이전의 수천 년 역사에 명멸했던 그것보다 서너 배도 넘는 엄청난 규모다. 그중에서도 최고 정점에 달했던 시기가 바로 성당 시대였다.
※ 당시唐詩의 흥성 원인 - 과거科擧
당나라 때 '시'가 융성한 이유는 오로지 과거 시험 때문이었다. '인간'의 신분은 크게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으로 나뉜다. 옛날 그 신분은 개인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이미 선천적으로 결정되어 있었다. 지배계층의 신분은 권문세가權門勢家로 세습되어 내려왔던 것이다.
그러다가 당나라 때 과거 제도가 등장했다. 그야말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권문세가 출신이 아니더라도 지배계층에 속할 수 있단다. 과거에 합격하기만 하면 일약 신분이 바뀐단다. 시험과목은 무엇일까? 당나라 때는 오로지 '시'였다. '시'만 잘 쓰면, 밟아 죽여도 그뿐이었던 피지배계층이 갑자기 지배계층으로 신분이 바뀐단다. 지렁이가 이무기도 아니고 용이 되어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다니, 어찌 '시'가 융성하지 않겠는가! 세계 역사상 가장 찬란한 '시'의 황금 시기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 합격하기란 하늘의 별따기! 극소수의 인원만 선발하기 때문에 경쟁률 자체가 치열했는데, 거기에 더하여 부정과 비리가 난무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과거에 합격하려는 온갖 추잡한 풍토가 생겨났으니, 이를 '악착齷齪'이라고 한다. '악착같다'는 말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 '동양화 東洋畵'에 대하여
우리는 흔히 '동양화'라는 말을 많이 한다. 일제 잔재의 매우 잘못된 언어다. 전문가에 의하면, 한중일 삼국의 전통 그림은 공통점이 별로 많지 않고 저마다의 특색이 강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마땅히 한국화, 중국화, 일본화라고 구분해서 불러야 한다. 혹은 소재별로 산수화, 인물화, 조충화鳥蟲畵 등으로 불러야 한단다.
서울대 동양화과에서도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단다. 그래서 학과 명칭을 '한국화과'로 바꾸려고 하지만 서양화과의 이의 제기로 바꾸지 못하고 있단다. 두 학과를 하나로 통폐합해야 해결될 문제인데 그 역시 쉽지 않다고 한다.
'동양'은 명나라 때 '서양'에 대칭하여 중국인이 만든 한자 단어다. 원래는 '동쪽 아주 먼바다' 또는 '동쪽 아주 먼바다에 있는 나라', 즉 '일본'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동양'을 '일본'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그러다가 19세기 메이지유신 당시에 일본이 서양학(소위 신학문)을 받아들일 때, 서구의 West & East라는 단어를 서양/동양으로 번역한 것이다. '동양'은 자신들이 동방세계의 주인임을 자처한 이데올로기 언어다. 그 어휘의 밑바탕에는 정한론 征韓論, 즉 한반도를 자기네 것으로 만들겠다는 군국주의 패러다임이 깔려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스스로 '동양인'임을 자처하고 이 단어를 계속 사용한다면, 그것은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인정하고 '일본인'이 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동양'이 아니라 '동방'이 옳은 표현이다. East & West는 동과 서, 또는 동방/서방으로 번역해야 한다. 동방예의지국, 동방견문록...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우리도 그렇게 '동방'이라는 어휘를 사용했던 사례가 무수히 발견된다. 지리학적으로는 '동아시아'라는 명칭을 사용하면 된다.
'전신傳神'은 무슨 뜻? '전傳'은 '전한다', '신神'은 '정신', 즉 대자연의 내재 정신을 전달한다는 중국예술용어다. 인간은 대자연의 일부이니 마땅히 대자연의 정신을 배우고 따라야 한다는 패러다임의 표현이다. 동진東晉 시대 도연명陶淵明(365~427)의 전원시田園詩를 감상할 때 언급한 바 있다. <17. 울타리 아래 국화꽃 한 송이> 참고.
여기서 '과 過'는 '지나가다'가 아니라 '찾아가다'의 뜻이다. 국내에 이 시를 소개하고 있는 서적이나 인터넷상의 글에는 오류가 많으니 조심하자. 그런데 이상하다. '찾아가다'는 일반적으로 '심 尋' 자를 쓰는데 왕유는 왜 하필 '찾아가다'라는 뜻으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과 過' 자를 사용했을까?
종남산은 서안 남쪽에 약 230km에 걸쳐 동서로 길게 뻗어있는 산맥 이름이다. 2,000m 이상의 고봉이 수두룩하다. 가장 높은 산은 3,771m의 태백산. 서안에 가장 가깝게 위치한 산은 취화산이다. 종남산은 중국의 기후와 지리를 남북으로 구분하는 중요한 표지이며, 역사적으로도 수도권에서 관직을 맡고 있던 지식인들이 쉽게 찾아가서 은거하며 휴식을 취한 곳의 대명사로, 흔히 줄여서 '남산'이라고 한다.
왕유가 제목에 '심尋 자'를 쓰지 않고, '과過 자'를 사용한 이유도 상상해 보았다. 여기서 '과 過'는 물론 '찾아가다'라는 뜻. 하지만 이 글자가 지니고 있는 이미지는 '지나가다' 아닌가. 그렇다면 시인은 혹시 '과 過'라는 글자를 '찾아가다'와 '지나가다'의 중의법重義法으로 사용한 것은 아닐까. '향적사'는 궁극적인 목적지가 아니라, 하나의 경유지요 방편에 불과하다는 의미를 부여한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