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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Jul 23. 2024

06. 여백의 즐거움 (1)

왕유, <향적사를 찾아서> 감상

향적사는 어드메쯤 있는 걸까?

구름 덮인 봉우리 자꾸만 올라간다.

울울창창 숲 속엔 오솔길도 없는데

깊은 산 어디선가 들려오는 종소리.


시냇물은 날카로운 바위에서 흐느끼고

햇빛은 푸른 솔가지 사이에서 차가웁다.

어스름 저녁 텅 빈 연못 구비에서

조용히 참선하니 스러지는 백팔번뇌.


不知香積寺, 數里入雲峰.

古木無人徑, 深山何處鐘.

泉聲咽危石, 日色冷靑松.

薄暮空潭曲, 安禪制毒龍.


- 왕유王維, <향적사를 찾아서 過香積寺>

  



바야흐로 무더위가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계절이다. 

우리 동방의 옛 선인들은 이맘때쯤이면 왕유王維의 이 시를 떠올리곤 했다.


천성泉聲열위석咽危石하고, 일색日色냉청송冷靑松이라.


기암괴석 사이를 흐느끼듯 소리 내며 흘러가는 계곡 물소리. 푸른 소나무 가지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햇빛은 차갑기 그지없다. 청아한 목소리로 낭송하며 그 장면을 떠올려보시라. 제아무리 찌는 듯한 삼복더위라도 그 즉시 시원하게 날아가버리는 것 같으니, 왕유의 문학 작품 감상이야말로 바로 곧 최고의 피서避暑였다.


하지만 이 시의 매력은 단순히 무더위를 식히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 작품 속에는 오묘한 삶의 철리가 숨어 있다. 그게 뭘까? 소오생 버전으로 이 시의 가치와 의미를 제대로 한번 감상해 보자.




작가와 작품 세계



먼저 작가 왕유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왕유(A.D. 701~761. 일설에는 699~761)는 누구인가? 중국 역사상 가장 빛나는 황금 시기의 가장 대표적인 시인 중 한 명이다. 그 시기가 언제일까? 당나라 6대 황제 현종玄宗개원元(713~756) 시기다. 흔히 '성당盛唐 시대'라고 부르는 이 시기는 비단 정치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의 황금기이기도 했다. 특히 '문학', 그중에서도 '시詩'가 크게 융성했다.

※ 당시唐詩의 흥성

청나라 강희 연간에 편찬한 《전당시 全唐詩》에 수록된 당나라 시인은 무려 2,300여 명. 현전 하는 작품은 약 50,000 편이나 된다. 290년 당나라(618~907) 역사에 등장했던 그 숫자가 그 이전의 수천 년 역사에 명멸했던 그것보다 서너 배도 넘는 엄청난 규모다. 그중에서도 최고 정점에 달했던 시기가 바로 성당 시대였다.


우리도 잘 아는 시선詩仙 이백李白(701~762), 시성詩聖 두보杜甫(712~770)가 바로 그 성당 시대를 대표하는 문인이다. 하지만 아시는가? 그 당시에 가장 먼저 각광을 받은 인물은 이백이나 두보가 아닌 바로 왕유였다는 사실을! 이백과 두보는 과거 시험에 계속 낙방하였지만, 왕유는 약관 스무 살에 장원 급제하여 화려하게 장안의 상류사회에 진출했다는 사실을 그대는 아시는가?

※ 당시唐詩의 흥성 원인 - 과거科擧

당나라 때 '시'가 융성한 이유는 오로지 과거 시험 때문이었다. '인간'의 신분은 크게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으로 나뉜다. 옛날 그 신분은 개인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이미 선천적으로 결정되어 있었다. 지배계층의 신분은 권문세가權門勢家로 세습되어 내려왔던 것이다.

그러다가 당나라 때 과거 제도가 등장했다. 그야말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권문세가 출신이 아니더라도 지배계층에 속할 수 있단다. 과거에 합격하기만 하면 일약 신분이 바뀐단다. 시험과목은 무엇일까? 당나라 때는 오로지 '시'였다. '시'만 잘 쓰면, 밟아 죽여도 그뿐이었던 피지배계층이 갑자기 지배계층으로 신분이 바뀐단다. 지렁이가 이무기도 아니고 용이 되어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다니, 어찌 '시'가 융성하지 않겠는가! 세계 역사상 가장 찬란한 '시'의 황금 시기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 합격하기란 하늘의 별따기! 극소수의 인원만 선발하기 때문에 경쟁률 자체가 치열했는데, 거기에 더하여 부정과 비리가 난무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과거에 합격하려는 온갖 추잡한 풍토가 생겨났으니, 이를 '악착齷齪'이라고 한다. '악착같다'는 말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가난한 말단 벼슬아치의 가정에서 태어난 왕유가 소년 시절부터 장안의 상류 사회에 진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순전히 그의 천부적인 예술 재능 때문이었다. 9살 때부터 멋들어지게 시를 지었다는 미소년 왕유는 미술과 음악에도 빼어나고 게다가 춤까지 잘 추었단다. 아무렴, 모름지기 천재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아무튼 장안 귀족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천재 예술가 왕유는 급기야 그 뒷배로 장원급제까지 하고 순풍에 돛 단 듯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어디 그리 쉬운 법이던가. Easy come, easy go! 청년 왕유는 나이 스물둘에 소소한 사건에 연루되어 산동 지방의 미관말직으로 귀양을 가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가 다시 장안에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6, 7년 후. 중앙 정단에 복귀한 것은 다시 6년이 더 지난 뒤였다. 4, 5년 간의 산동 생활과 2년 여에 걸친 숭산嵩山에서의 은거 생활을 거쳐 장안으로 돌아온 왕유는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반관반은 半官半隱! 후세인들의 평가처럼 그는 절반은 관직 생활, 절반은 은거 생활을 즐겼다. 종남산 기슭 망천輞川이라는 곳에 별장을 짓고 사람들과 거의 내왕을 하지 않았다는데, 집안에 가재도구라고는 오로지 다구茶俱와 약탕관, 낡은 책상, 그리고 밧줄로 엮은 침상이 전부였다고 한다. 그리고 30 대에 아내와 사별한 후에는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지내며 명상과 사색만을 즐겼다.


그가 이렇게 변한 것은 오로지 독실한 불교 신도였던 어머니의 영향이다. 그는 이름부터가 특이하다. 이름은 '유維'. 자字는 '마힐摩詰'. 둘을 합하면 '유마힐維摩詰'이다. 유마힐이 누구인가? 고대 인도의 재가在家 신자로 불경에도 등장하는 부처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존재 아닌가. 그 이름이 우연히 지어졌겠는가? 필경 어머니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이다.


단 한 번의 귀양생활. 그러나 독실한 불교 가정에서 자랐던 그는 그 딱 한 번 인생의 쓴맛을 보면서 삶이란 일장춘몽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달았던 모양이다. 삶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후세 사람들은 선승禪僧처럼 이렇게 온종일 명상과 사색에 빠졌던 왕유를 '시불詩佛'이라고 불렀다. 시선詩仙 이백, 시성詩聖 두보와 거의 동등한 위치에 자리매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왕유가 후세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예술 장르는 '시'가 아니라 '그림'이었다. 그 시 세계의 수준이 낮다는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그만큼 중국화中國畵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중국화는 소오생의 전공도 아니고 잘 알지도 못하니 대충 언급하고 넘어가는 수준에서 살펴보자.


※ '동양화 東洋畵'에 대하여

우리는 흔히 '동양화'라는 말을 많이 한다. 일제 잔재의 매우 잘못된 언어다. 전문가에 의하면, 한중일 삼국의 전통 그림은 공통점이 별로 많지 않고 저마다의 특색이 강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마땅히 한국화, 중국화, 일본화라고 구분해서 불러야 한다. 혹은 소재별로 산수화, 인물화, 조충화鳥蟲畵 등으로 불러야 한단다.

서울대 동양화과에서도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단다. 그래서 학과 명칭을 '한국화과'로 바꾸려고 하지만 서양화과의 이의 제기로 바꾸지 못하고 있단다. 두 학과를 하나로 통폐합해야 해결될 문제인데 그 역시 쉽지 않다고 한다.

'동양'은 명나라 때 '서양'에 대칭하여 중국인이 만든 한자 단어다. 원래는 '동쪽 아주 먼바다' 또는 '동쪽 아주 먼바다에 있는 나라', 즉 '일본'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동양'을 '일본'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그러다가 19세기 메이지유신 당시에 일본이 서양학(소위 신학문)을 받아들일 때, 서구의 West & East라는 단어를 서양/동양으로 번역한 것이다. '동양'은 자신들이 동방세계의 주인임을 자처한 이데올로기 언어다. 그 어휘의 밑바탕에는 정한론 征韓論, 즉 한반도를 자기네 것으로 만들겠다는 군국주의 패러다임이 깔려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스스로 '동양인'임을 자처하고 이 단어를 계속 사용한다면, 그것은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인정하고 '일본인'이 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동양'이 아니라 '동방'이 옳은 표현이다. East & West는 동과 서, 또는 동방/서방으로 번역해야 한다. 동방예의지국, 동방견문록...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우리도 그렇게 '동방'이라는 어휘를 사용했던 사례가 무수히 발견된다. 지리학적으로는 '동아시아'라는 명칭을 사용하면 된다.  


중국화中國畵는 성당 시대에 이르러 북종화와 남종화로 구분되어 발전한다. 북종화北宗畵는 정교하고 사실적인 전문 화가의 세계다. 대표적인 북종화인 <명황행촉도 明皇幸蜀圖>를 살펴보자.

위는 전도全圖, 아래 그림은 그 하단 우측 부분이다. 작가는 이사훈李思訓. 일설에는 그의 아들인 이소도李昭道가 그렸다고도 한다. 대북台北 고궁박물원故宫博物院 소장.


남종화南宗畵백묘白描의 수법을 활용하여 산수山水를 그리는 아마추어 화가의 세계다. 그 아마추어 화가의 본업은 무엇일까? 문인이었다. 그래서 남종화를 문인화라고도 한다. 누가 최초로 그렸을까? 뻔하다. 지금 왕유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니 정답은 당연히 왕유 아니겠는가. 그가 프로페셔널한 중국 그림의 세계에 아마추어 문인화의 전통을 세운 최초의 인물이었다.


백묘白描의 수법이란 또 무엇일까. 먹으로 그린 선, 즉 묵선만 활용하여 대상을 묘사하면서 색채를 칠하지 않는 수법을 말한다. 그게 그림에 어떻게 표현이 되는지 아래 그림을 살펴보자. 왕유의 그림은 전부 다 후세의 모사본模寫本이어서 정확하게 비교할 수는 없다. 대체적인 특징만 파악해 보자.

위의 그림은 <장강적설도 長江積雪圖> (일부), 아래는 이 글의 대문 그림인 <눈 내린 계곡 雪溪圖> .


왕유 산수화의 특징은 한 마디로 '여백 餘白'이다. out-line만 그리고 세세하고 소소한 것은 그리지 않으니 그의 그림에는 당연히 여백의 공간이 많다. 눈앞에 나타나는 일시적 현상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삶과 우주를 거시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가치관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묵선으로 out-line을 그린 부분도 채색을 하지 않았다. 또 다른 차원의 '여백'다. 왜 채색을 하지 않았을까? 현상 세계를 눈에 보이는 그대로 묘사하고자 하는 '사경寫景'보다는, '전신傳神'에 가치를 두기 때문이다. 즉, 시의 의경意境을 그림에 도입한 것이니, 이로부터 중국시와 중국화는 하나로 만나게 된다.

'전신傳神'은 무슨 뜻? '전傳'은 '전한다', '신神'은 '정신', 즉 대자연의 내재 정신을 전달한다는 중국예술용어다. 인간은 대자연의 일부이니 마땅히 대자연의 정신을 배우고 따라야 한다는 패러다임의 표현이다. 동진東晉 시대 도연명陶淵明(365~427)의 전원시田園詩를 감상할 때 언급한 바 있다. <17. 울타리 아래 국화꽃 한 송이> 참고.


중국문학사에서는 왕유의 시를 자연시自然詩라고 부른다. 도연명 전원시의 '전신' 특징과 사령운謝靈運 산수시山水詩'사경' 특징을 겸비한 것으로 인정한다. 그 후 대자연을 창작 소재로 삼는 모든 중국시는 왕유 자연시의 이러한 특징을 이어받게 된다.


산수화山水畵도 마찬가지. 왕유는 자연시의 창작 수법을 그림 창작에도 활용하여 문인화文人畵라는 중국 회화의 새로운 전통을 창조한다. 후세 북송 시대 소동파가 왕유를 일컬어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 詩中有畵, 畵中有詩"라고 평하였지만, 왕유 이후 중국의 모든 지성인들에게 있어서 그림은 바로 시였고, 시는 바로 그림이었다. 그리고 그들 시와 그림의 공통점이 바로 '여백'이었던 것이다.


'여백'은 동아시아 전통 패러다임에서 제시하고 있는 또 하나의 가치관이다. 그러나 우리 삶에 어떻게 작용해야 한다는 것인지 이론으로 떠들어봤자 뜬구름 잡기다. 구체적인 작품 감상을 통해 체감해 보도록 하자.




작품 감상



이 시의 제목은 <향적사를 찾아서 過香積寺>다.

여기서 '과 過'는 '지나가다'가 아니라 '찾아가다'의 뜻이다. 국내에 이 시를 소개하고 있는 서적이나 인터넷상의 글에는 오류가 많으니 조심하자. 그런데 이상하다. '찾아가다'는 일반적으로 '심 尋' 자를 쓰는데 왕유는 왜 하필 '찾아가다'라는 뜻으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과 過' 자를 사용했을까?


부지/향적사 不知香積寺 향적사는 어드메쯤 있는 걸까?

수리/입운봉 數里入雲峰 구름 덮인 봉우리 자꾸만 올라간다. 


참으로 묘하다. 향적사를 찾아 나섰다면서 향적사가 어디 있는지 모른단다. 아니,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길을 나섰다는 말인가? 게다가 작품이 끝날 때까지 향적사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일언반구 언급이 없다.


아무튼 시인은 향적사를 찾아 구름 덮인 봉우리를 '수리數里'를 올라간다. '십리十里'면 4km. '수리'라 하였으니 대충 '십리'의 절반이라고 생각해 보자. 경사진 산길 2km라면 그다지 먼 거리는 아니지만, 길을 헤매는 입장에서는 가깝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고목/무인경 古木無人徑 울울창창 숲 속엔 오솔길도 없는데

심산/하처종 深山何處鐘 깊은 산 어디선가 들려오는 종소리.


하물며 고목이 무성한 숲에는 오솔길조차 안 보인다지 않는가. 절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는 비슷한 단서라고는 오로지 '종鐘', 그 한 글자뿐이다. 그것도 깊은 산 어디선가 들려온다는 것이지, 그 종소리가 나는 곳이 향적사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그러니 마음이 더 조급해질 수도 있다. 이 놈의 절은 도대체 어딨는 거야... 투덜거리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천성/열위석 泉聲咽危石 시냇물은 날카로운 바위에서 흐느끼고

일색/냉청송 日色冷靑松 햇빛은 푸른 솔가지 사이에서 차가웁다.


그런데도 시인은 여유롭기 그지없다. 귀로는 기암괴석 사이를 흘러가는 계곡 물소리를 듣고, 눈으로는 푸르른 소나무 가지 사이로 차가운 햇빛을 쳐다본다. 어떤 심정으로 그 소리를 듣고 그 햇빛을 바라보았을까? 길을 헤매서 초조한 마음이었을까? 그럴 리가 없다. 마음이 차분하지 못한데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사람이 흐느끼는 것처럼 들릴 리가 없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햇빛이 차갑다고 말할 리가 없지 않겠는가. 시인은 지금 여백의 휴식 시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박모/공담곡 薄暮空潭曲 어스름 저녁 텅 빈 연못 구비에서

안선/제독룡 安禪制毒龍 조용히 참선하니 스러지는 백팔번뇌.


박모薄暮, 어스름 저녁이란다. 어느덧 날은 저물어가는데 향적사는 여전히 찾지 못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너무나 초조할 것 같은데, 시인은 어떨까? 안선安禪, 텅 빈 연못 구비에 앉아서 편안한 마음으로 조용히 참선을 하고 있다. 참선이란 왜 하는 걸까? 당시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신선이 되기 위해서. 도교의 패러다임이다. <16. 별유천지비인간, 무릉도원을 찾아서> 둘째, 무념무상의 경지에 들어서서 우리의 마음을 괴롭히는 백팔번뇌를 극복하기 위하여. 시인은 어느 쪽일까? 독룡制毒龍이라 하였으니 후자인 것 같다.


그나저나, 향적사는 어디에 있는 걸까? 시인은 왜 향적사를 찾아간다고 하고선 엉뚱한 곳에서 참선이나 하고 있는 걸까? 소오생의 오랜 숙제였다.




2005년의 어느 가을날. 서안 西安(Xi'an, 씨안), 그러니까 옛날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長安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있던 나는, 이 시의 작가인 왕유가 은거했다는 서안 교외의 종남산 終南山을 찾아갔다.

종남산은 서안 남쪽에 약 230km에 걸쳐 동서로 길게 뻗어있는 산맥 이름이다. 2,000m 이상의 고봉이 수두룩하다. 가장 높은 산은 3,771m의 태백산. 서안에 가장 가깝게 위치한 산은 취화산이다. 종남산은 중국의 기후와 지리를 남북으로 구분하는 중요한 표지이며, 역사적으로도 수도권에서 관직을 맡고 있던 지식인들이 쉽게 찾아가서 은거하며 휴식을 취한 곳의 대명사로, 흔히 줄여서 '남산'이라고 한다.

먼저 찾아간 곳은 향적사. 도대체 어떤 곳일까, 너무나 궁금했다. 향적사 주변 풍광은 어떤 모습일까. 내 머릿속은 아래의 왼쪽 그림과 같은 풍광을 그리고 있었다. 독자 여러분도 나와 마찬가지 아니실까? (오른쪽 사진 두 장은 서안 근교의 종남산인 취화산翠華山.)


그런데... 아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차에서 내린 나는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가 정말 향적사라고? 누우런 황토 벌판 널따란 평원에 덩그마니 절 하나가 누워 있었다.

서안시 남쪽 황량한 벌판에 위치한 향적사. 당 고종 때인 681년에 창건된 1,350년 역사의 고찰이다.


나는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한참 동안 어리둥절한 채 서 있었다. 천년 세월이 흘렀으니 오솔길조차 없을 정도로 고목이 빽빽했다는 울창한 숲이야 사라질 수 있다 치자. 하지만 구름에 휩싸였다는 그 봉우리는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믿을 수가 없었다.


향적사라는 이름의 또 다른 절이 있는 것일까? 아니다. 향적사는 전 중국에 딱 두 곳. 항주杭州와 이곳 서안, 두 군데밖에 없다. 그렇다면 종남산 어딘가에 있던 이 절이 훗날 여기로 장소를 옮긴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왕유가 엉뚱한 산에 가서 향적사를 찾아 헤맸던 것일까?


한참 동안 추측을 거듭하던 나는 이내 가벼운 탄성을 내질렀다. 깨달음을 얻었다면 건방진 말일까. 하지만 왕유가 던져놓은 그 시의 여백이, 나에게 상상력의 나래를 한없이 펼치게 해주는 효과를 조금쯤은 알 것도 같았다. 그러자 향적사의 위치 따위는 아주 사소한 문제가 되었다. 그래, 까짓 거 따져서 무엇하랴. 그 덕분에 내게 주어진 이 상상의 시간에 마음이 한없이 넉넉해졌다. 여백의 즐거움이랄까.


왕유가 제목에 '심尋 자'를 쓰지 않고, '과過 자'를 사용한 이유도 상상해 보았다. 여기서 '과 過'는 물론 '찾아가다'라는 뜻. 하지만 이 글자가 지니고 있는 이미지는 '지나가다' 아닌가. 그렇다면 시인은 혹시 '과 過'라는 글자를 '찾아가다'와 '지나가다'의 중의법重義法으로 사용한 것은 아닐까. '향적사'는 궁극적인 목적지가 아니라, 하나의 경유지요 방편에 불과하다는 의미를 부여한 것은 아닐까.




다시 20 년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여름이 찾아오면 나는 습관처럼 이 시를 떠올렸다. 어디론가 대자연의 품에 안겨 여백의 시간을 즐기면서 낭랑하게 목소리를 뽑아 이 구절을 읊조리고 싶었다.


천성泉聲열위석咽危石하고, 일색日色냉청송冷靑松이라.


더위를 식히면서 늘 생각했다. 아니, 생각하지 않고 생각해 보았다. '향적사'는 대체 무엇일까. 문득 '향적사'란 바로 우리가 찾는 '행복'이라는 허상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한번 시를 낭송하며 음미해 보니 한 구절구절이 새삼 마음에 와닿는다.  


행복은 어디에 있는 걸까?            

구름 덮인 봉우리 자꾸만 올라간다.       

행복 찾는 숲 속엔 오솔길도 없는데          

깊은 산 어디선가 들려오는 종소리.       


'행복'을 찾아 나선 여행. '성공' 또는 '사랑'을 찾아 나선 여행이라고 해도 좋다. 아무튼 우리는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길을 나서기 일쑤다. 저기 눈앞에 보이는 저 봉우리에 있는 것 같다. 조금만 더 가면 금방이라도 붙잡을 수 있는데... 갑자기 길이 사라져 버린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행복과 성공과 사랑의 종소리가 우리를 더 초조하게 만든다. 남들은 찾은 것 같은데 나 혼자 길을 잃은 건 아닐까.


자, 어떻게 해야 할까. 해답은 후반부 시구에 담겨 있을 터이니 각자 곰곰 음미해 보자.


시냇물은 날카로운 바위에서 흐느끼고   

햇빛은 푸른 솔가지 사이에서 차가웁다.

어스름 저녁 텅 빈 연못 구비에서          

조용히 참선하니 스러지는 백팔번뇌.     


후반부는 '여백'이다. 쉬어감의 공간이요, 재충전의 시간이다. 사색과 명상으로 탐욕과 번뇌에 가득 찬 머리를 비워내는 시간이다. 여백은 채우려 하지 않는 것, 붙잡으려고 하지 않는 것, '향적사'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거기에 해답이 숨어 있다.


< 계 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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