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함께 감상해 본 왕유王維의 <향적사를 찾아서 過香積寺>에 대해서, 여러 작가님들께서 댓글로 의견을 제시해 주셨다. @바람꽃 작가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향적사를 떠올리는데 전 문득 벨기에 동화 파랑새가 생각났네요.
파랑새를 찾지만 사실 파랑새는 바로 우리 곁에 있다는.
마테를링크 M. Maeterlinck (1862~1949)의《파랑새 L'Oiseau bleu》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행복을 준다는 파랑새를 찾아서 모험을 떠난 틸틸과 미틸. 하지만 그들 남매는 그 어디에서도 파랑새를 찾지 못하고 낙심하여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이게 웬 일? 알고 보니 자신의 집에서 기르고 있던 그 새가 바로 파랑새 아닌가!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게 아니야. 바로 우리 곁에 있어." 동화가 가르쳐주는 명쾌한 교훈이다.
<향적사를 찾아서 過香積寺>도 유사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점이 있다. 비슷한 면은 무엇이고 다른 점은 무엇일까? 다시 한번 시를 감상해 보자.
파랑새와 향적사의 차이는
향적사는 어드메쯤 있는 걸까?
구름 덮인 봉우리 자꾸만 올라간다.
울울창창 숲 속엔 오솔길도 없는데
깊은 산 어디선가 들려오는 종소리.
시냇물은 날카로운 바위에서 흐느끼고
햇빛은 푸른 솔가지 사이에서 차가웁다.
어스름 저녁 텅 빈 연못 구비에서
조용히 참선하니 스러지는 백팔번뇌.
不知香積寺, 數里入雲峰.
古木無人徑, 深山何處鐘.
泉聲咽危石, 日色冷靑松.
薄暮空潭曲, 安禪制毒龍.
묘하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향적사를 찾아 나섰단다. 그리고 더 이상 향적사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이 없다. 그저 구름 덮인 봉우리로 올라가고 울창한 산속으로 들어간다. 급기야 숲 속에서 길을 잃었는데 어디선가 종소리만 들려온다. 벌써 어스름 저녁이 찾아오고 있다. 누구라도 마음이 조급해질 순간이다.
그런데 시인은 도리어 연못가에 주저앉아 차분한 마음으로 참선을 한다. 눈을 감으니, 날카로운 바위를 휘감으며 흘러가는 물소리가 인간 세상 위험한 순간마다 흐느끼는 울음소리 같다. 깨달음의 눈을 뜨니, 찌는 듯한 현상세계의 뜨거움도 푸른 니르바나 nirvāna의 소나무 가지 사이에서 청량하게 다가온다. 독버섯처럼 마음을 괴롭히던 번뇌가 조용히 스러진다.
'향적사'를 '파랑새'로 바꿔도 대체로 들어맞는 것 같다. 파랑새를 찾아 나선 틸틸과 미틸처럼 시인도 향적사를 찾아 나선다. 시인은 마음속에 깨달음의 평화를 얻고, 틸틸 남매는 자기 집에서 파랑새를 발견한다. '행복'은 바로 우리의 마음속에 있다는 이야기일까? 아무튼 일견 해서 《파랑새》와 상당히 유사해 보인다.
다른 점은 무엇일까? 서양 미술 전공자이신 @노인영 작가님은 또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중국화나 한국화에서 여백은 마치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여유처럼 느껴집니다. 분주한 그리고 여백이 없는 서양 회화와 큰 차이를 보이죠. 서양미술사를 공부하면서도 여백이 있는 그림에 본능적으로 반가움을 가지게 됩니다.
서양 미술을 전공하는 작가님이 이렇게 말씀해 주시니 너무 반갑고 감사하다. 그렇다. 차이는 바로 '여백'이다. 마테를링크의《파랑새》를 그림에 비유한다면, 화폭 전체에 '파랑새'가 꽉 들어차 있다. '파랑새'로 시작해서 '파랑새'로 끝난다. 결론적으로 주인공 남매가 찾아낸 '파랑새' 역시 집에서 기르고 있던 현상 세계의 새였다. 어디까지나 눈에 보이는 현상 세계의 이야기인 것이다.
하지만 왕유의 '향적사'는 다르다. 제목에만 등장했을 뿐 처음부터 어디 있는지 모른다 했고 끝내 나타나지 않았으니, 이 시가 그림이라면 향적사는 화폭에 아예 등장하지도 않는 셈이다. 궁금함을 참지 못한 소오생이 실제로 현지를 찾아가 보니, 어라... 이게 웬 일? 향적사는 구름 덮인 봉우리는커녕 나지막한 언덕조차 없는 드넓은 평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왜 시인은 엉뚱한 이야기만 한 걸까. 그에게 향적사는 어떤 존재요 어떤 의미였을까? 어쩌면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하나의 화두요, 방편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을까? @김소이작가님의 말을 들어보자.
제가 최근에 바람꽃님 글에서 등장한 '흙탕물 유리병'을 읽고 반복해서 마음에서 그리고 있었습니다. ( 바람꽃, <흙탕물이 가라앉는 시간> ) 마음에서 그려지는 그것에 눈으로 보려 하면 잡히지가 않았어요.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미끄러지는데... 그 흙탕물을 만지고 냄새 맡는다 생각하니 일정한 거리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로 표현하면 '볼 수 있었다'가 되는데 머릿속에서는 그렇지 않았어요. 그래서 아, 마음으로 보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구나, 뭐로 봐야하나! 라고 제 자신에게 외치면서 불건전하게 분노에 차있...었습니다.
이 글을 읽고서 어렴풋이 알 듯도 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텅 빈 곳에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듣는 것도 보는 것도, 형태도 지식도, 말도 뜻도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마테를링크의 파랑새는 현상 세계다. '파랑새'는 바로 곧 '행복'이며, 눈으로도 보이고 몸으로도 느껴지는 현상 세계의 것이다. 그러나 왕유의 '향적사'는 다르다. 현상 세계일 수도 있지만 아닐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우리가 아는 현상 세계의 '행복'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현상 세계의 듣는 것, 보는 것, 형태와 지식, 말과 뜻 따위의 그 무엇으로도 규정지어지지 않은 '여백'일뿐이다.
'파랑새'와 '향적사'는 비슷해 보이지만 삶의 구체적인 현실에 적용해 보면 큰 차이가 날 수 있다. 현상 세계에 속한 '파랑새'는 자칫 집착이 될 수 있지만, '향적사'는 그 어떤 현상에 구애拘礙 받거나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과 여백의 함수 관계
'여백'이 가장 필요한 곳은 인간관계, 특히 남녀 관계와 부모 자식 관계가 아닐까?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집착'이나 '구속拘束' 쯤으로 착각한다. 특히 20대 초반에 그런 소유욕이 강하게 발현한다. 일단 남친/여친이 되어 사귀기로 하면, 넌 이제 내 거야! 상대방을 자기 소유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자신의 남친/여친이 자기 아닌 다른 이성과 '정답게(?)' 대화를 하는 '꼬락서니'를 용납하지 못한다.
그뿐이 아니다. 자기 모해? 상대방의 핸드폰에 요쌍한 앱을 깔아놓고 하루 종일 남친/여친이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감시한다. 그것도 모자라 하루에도 수십 번 전화해서 행방을 추적한다. 세상에! 연애를 하자는 건지, 범죄 수사를 하자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숨이 막힌다.
결혼을 하면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상대방이 한 눈 팔까 바람필까 하루종일 전화한다. 친구들과 만난다면 바꿔달라고 해서 정말인지 확인한다. 심지어 친구들과의 모임 장소에 직접 찾아와 그 증언의 신빙성을 확인하는 경우도 보았다. 그리고 그걸 '사랑'이라고 주장한다. 오 마이 갓!
자식을 낳으면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행여라도 '자식이 잘못될까 걱정되어' 하루 종일 감시한다. 사랑이란 이름 하에 끊임없는 잔소리로 정신과 육체를 구속한다. 대학의 전공과 미래의 진로마저 부모가 결정하고, 배우자 선택의 자유마저 박탈하며 그걸 '자식 사랑'으로 포장한다. 한 마디로 자식은 자기 소유물이다.
여러분은 어떠신가?
주변에 그런 분 안 계시는가?
의외로 상당히 많다. 어쩌면 우리 자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아야 한다. 붙잡을수록 벗어나고 싶어지는 인간의 묘한 심리를! 그렇게 집착하고 일거수일투족을 구속하면 할수록 도리어 역효과가 난다는 사실을 왜 모르시는가. '그분'들은 말한다. 파랑새는 가까운데 있다고 했잖아. 옆에서 늘 걱정하고 염려해 주는 '나'의 존재 가치를 언젠가 알아줄 거야. 그렇게 강변한다. 가짓부렁이다. 자기기만이요 자기 욕심일 뿐이다.
왕유의 '향적사'는 말한다. 정녕 '사랑'한다면 '여백'을 주어야 한다고. 그러다 한 눈 팔고 바람피면 어떻게 하느냐고? 사고라도 치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론 그럴 수 있다. 속상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최소한 집착하고 상대방을 구속해서 얻는 결과보다는 훨씬 더 바람직한 인간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백'이란 결코 '방임'이나 '무관심'은 아니기 때문에. 따스한 '관심'과 '사랑'이라는 input을 주면서도 그 어떤 output을 요구하지 않는 것, 그것이 여백 아닐까. 이효리도 말했다지 않는가. 성공하지 않으면 어때? 그냥 아무나 되면 어때? 괜찮아. 사고 좀 치면 어때? 기대하지 않고 '관심'과 '사랑'을 주는 것, 현상 세계의 그 어떤 형태와 결과에도 얽매이고 집착하지 않는 것, 그것이 여백이다. 현실적으로도 훨씬 더 효과적이다.
학생들은 종종 내게 묻곤 했다.
선생님은 어떻게 그렇게 행복하세요? 또는... 선생님은 행복하세요?
나는 대답한다.
엥, 행복? 그게 뭔데? 몰라. 생각해 본 적 없어.
행복이란 무엇이고 불행은 또 무엇일까. 그 경계선은 또 어디일까? 아무도 규정해놓지 않았다. 그냥 자기 혼자서 멋대로 생각하고 그 함정에 빠져 허우적댈 뿐. '행복'은 추상명사다. 추상이란 무엇인가? 현상 세계의 듣는 것, 보는 것, 형태와 지식, 말과 뜻 따위의 그 무엇으로도 규정하기 어렵다는 뜻 아닌가.
그렇다면 '향적사'가 대체 뭐지? 궁금하면 '향적사'를 화두로 삼아 깊은 사색에 빠져보시라. 사색과 명상과상상의 시간을 가져보시라.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머리가 텅 비어질지 모른다. 생각이 멈추어지고 번뇌로 가득 찼던 두뇌가 그 순간 텅 비워지는 것. 진정한 휴식의 시간. 그런 것이 '여백' 아닐까.
그래서 왕유의 '여백'은 그 작품 세계의 일관된 주제인 '텅 빈 것', '공 空'으로 이어진다. 오해는 마시라. 그의 '공'은 '허무'와 같은 소극적인 감상주의가 아니라, 양자물리학의 '팩트'를 말하는 것임을 먼저 밝혀둔다. 앞으로 당분간 왕유 작품의 '공'의 세계에 대해서 함께 감상하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자.
여담으로 잠시 북송 시대의 황제 예술가 휘종徽宗 이야기를 좀 해보자. 왕유의 시, <향적사를 찾아서>와 일맥상통하는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다.
송나라 8대 황제인 휘종 조길趙佶은 중국 역사, 아니 고금동서의 모든 임금 중에서 가장 뛰어난 예술가다. 문학과 그림, 서예와 조각, 음악과 춤 등등 모든 예술 부문에 있어서 그야말로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문제는 그가 황제라는 사실, 타고난 성정이 왕유와는 정 반대로 지극히 세속적이었다는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중국 역사에 있어서 가장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는 황제가 된다. 자세한 얘기는 다음 기회에 하자.
휘종은 종종 과거 시험 제목으로 시 구절을 내주고, 그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리게 하였단다. 그중 가장 유명한 제목 두 개가 전해진다.
( 1 ) <깊은 산에 묻힌 절 深山藏幽寺>
( 2 ) <꽃을 밟고 돌아오니 말발굽이 향기롭다 踏花歸來馬蹄香>
여기서 돌발 퀴즈!
일등으로 합격한 그림은 각각 어떤 모습이었을까? 여러분이라면 어떤 그림을 그리실 것인가?
힌트. 그림을 얼마나 잘 그리는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어떤 아이디어로 어떤 구도의 그림을 그릴 것인지 그게 중요하다. 여백의 시간을 드릴 터이니, 그 두 개의 시 구절을 화두로 삼아 사색과 상상의 시간, 진정한 휴식의 즐거운 시간을 가져보시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