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은 한자로 어떻게 쓸까?
놀랍게도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심지어는 대학 교수라는 양반들도 십중팔구 틀린다.
네? '문' 자를 이렇게 써요? 그분들이 놀라신다. 네? 모르셨어요? 나도 놀랐다.
‘학문’은 ‘學文’이 아니라 ‘學問’이다.
'학문'의 '문'은 '글월 문文'이 아니라 '물어볼 문問'이다. 많은 사람이 '학문'을 '學文', 즉 '글을 배우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아니다! '학문'은 '머리로 글을 배우는 두뇌 활동'이 아니다. 그런 건 '신학문', 즉 서구의 'science'다. 사전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배우고 공부하는 '신학문'을 "존재의 합법칙적 인식과 논리적 객관적 인식 만을 이론적으로 파악하려는 지식 체계"라고 말한다.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사상‧학문〉조항) 어휴, 말만 들어도 골치 아프네. 그러니 공부하고픈 마음이 생기겠는가. 아무튼 그런 건 '학문'이 아니다. '학문'은 그런 개념 정의를 내리고 외우게 하지 않는다. 그 특징을 느끼고 체득하게 한다.
'학문'을 직역하면 '배울 학學', '물어볼 문問', '물어보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해 주면 어떤 녀석들은 낼름 말을 가로챈다. 아하, 질문을 잘하라는 뜻이군요? 하긴 그게 중요하다더라. 그리고는 말꼬리를 붙잡고 꼬치꼬치 따져 묻는다. 아니다. 그러라는 뜻이 아니다. 물어보는 마음가짐을 배우는 것, 겸손하게 가르침을 청하는 것이 '학문'이다.《논어論語‧팔일八佾》에 등장하는 공자의 에피소드 이야기를 들어보자.
공자가 태묘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었다. 그가 모든 것에 대해 물어보자, 누군가가 비웃었다.
“누가 숙량흘의 아들이 ‘예禮’를 잘 안다고 했지? 여기 와서 하나하나 다 물어보던데?”
그 말을 전해 들은 공자가 말했다. “그런 게 바로 ‘예’인 것이다.”
子入大廟,每事問. 或曰:"孰謂鄹人之子知禮乎?入大廟,每事問." 子聞之曰:"是禮也."
제례祭禮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공자였다. 그가 왕실의 사당인 태묘에 와서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단다. 왜 그랬을까? 어떤 자세였을까?
( 1 ) 왜 그랬을까? 공자 자신도 모르는 지식과 정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또는 알고 있더라도 좀 더 정확하게 알고 싶어서. 문답 과정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진리에 대한 간절함이다.
( 2 ) 어떤 자세였을까? 따져 묻는 자세였을까? 그럴 리가 없다. 그랬다면 그 '누군가'가 그렇게 득의양양했을 리가 없다. 한없이 겸손한 자세로 가르침을 청하는 자세였을 것이다. 아마도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물어봤을 것이다. 누구에게 허리를 숙였던 것일까? 특정 인물이 아니다. 진리 앞에서 작아진 것이다.
그러면서 공자는 말한다. 간절한 마음, 작아지는 마음가짐이야말로 진정한 '예禮'라고. '예'의 본질은 형식적으로 인사를 잘하는 게 아니다. 진리에 대한 간절한 마음으로 한없이 자신을 낮추며 끝없이 가르침을 구하는 것이다. '학문學問'이라는 단어는 여기에서 출발했다.
단순 지식과 정보만을 축적한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모른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막 박사 학위를 받고 온 젊은 교수님들은 미안한 말이지만 대부분 천상천하 유아독존,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나, 미쿡 박사라구, 미쿡 박사! 내가 얼마나 많이 아는지 아셔?' 표정으로 말하는 그분들에게 '학문'의 '문'을 한자로 어떻게 쓰는지 묻고 싶다. 건들건들... 인사도 잘 안 한다. 교만하다. 교수 사회의 갈등을 유발하는 원인 중의 하나다. 갑자기 궁금해진다. SKY 명문대를 나오고 사법고시 통과하신 판검사님들은 어떠실까?
사람들은 "머리만 똑똑하고 공부만 잘하면 뭘 하나. 인간이 되어야지." 그런 말을 많이 한다. 그런데 '학문'에서는 '머리만 똑똑한 것'은 '똑똑하다'라고 하지 않고 '어리석다'라고 한다. 단순 지식과 정보를 죽어라 외워서 좋은 성적 받는 것을 '공부'라고 하지도 않는다. '인간'이 되는 것이 진짜 '공부'요, '학문'의 목표다. 어떤 인간? SKY 명문대를 나와서 판검사가 되거나, 외쿡 명문대 석박사 학위하고 가방끈이 긴 사람? 아니다. ‘학문’을 통해 진리의 가없는 바닷가에 도달한 사람, 우주와 대자연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작은 존재인지 철저히 깨닫고 무릎을 꿇을 줄 아는 사람을 말한다.
인간은 “배우고 난 연후에야 자신의 부족함을 알게 된다. 學, 然後知不足.”《예기禮記‧학기學記》 이 경지에 이르면 그 어떤 존재 앞에서라도 상대의 가치를 늘 새롭게 발견하며 머리를 공손히 숙이게 된다. 그것이 공자가 말한 진정한 ‘예禮’의 경지이자 '학문'의 뜻이다. 이 경지에 이르면 저 바다 건너 절대 가치의 세계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에 목마르게 되는 법이다. 그리고 깨달은 바를 현실사회 속에서 끊임없이 실천하고자 노력한다. 《대학大學》에서 말하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이 바로 곧 ‘학문’인 것이다.
"학문의 바다는 끝이 없다(學海無涯)." 학문은 바다 건너 절대 가치의 세계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다. 사진: 울릉도 대풍감.
‘학문’이란 머리로 ‘지식’을 배우는 것뿐만 아니라, 가슴으로 ‘지혜’와 ‘정성’을 배우는 것이며, 온몸으로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지행합일知行合一, 배운 대로 실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공자가 가르쳐준 그 '학문'을 하는 일이 바로 곧 인문학 엑소더스의 길이다.
[ 핵심 정리 ]
◎ 신학문(서양학, science) : 단순한 이성理性의 영역. 지식과 정보 중시
존재의 합법칙적 인식과 논리적 객관적 인식 만을 이론적으로 파악하려는 지식 체계
◎ 학문學問 = 예禮. 이성과 감성과 실천의 결합적 영역. 지혜와 정성 중시
머리로 ‘지식’을 배우고, 가슴으로 ‘지혜’와 ‘정성’을 느끼고 익히며, 온몸으로 ‘실천’에 옮기는 것.
감성적 인식에 대한 이성적 인식 체계 + 인류의 삶의 질의 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실천하는 행위 체계
[ 표제 사진 ]
◎ 중국 산동성 곡부曲阜에 있는 공묘孔廟 대성전大成殿. 동아시아 '학문'의 전당이다.
[ 다음 꼭지에서는... ]
◎ '학문'은 어떤 방법으로 하는 것인지, '학문하기'의 내용에 대해 알아보자.
※ 분량 관계로 이 매거진은 여기서 마무리를 짓고,
이어지는 내용은 [문학으로 인문학 톺아보기] 매거진에서 계속 이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