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공부하는 방법 (2)
지난번 글의 요점을 다시 한번 떠올려보자.
▶ '대학 大學'은 '대동사회 大同社會' 즉 '다 함께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방법을 모색하는 학문이다.
▶ 그 '대학'의 내용을 글로 써놓은 것이 《대학 大學》이라는 책이고, 또 그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장소를 '대학 university'이라고 한다.
▶ 《대학 大學》이라는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대학인의 행동 강령은 아래와 같은 8가지다.
[ 1 단계: 내면의 완성 ]
▶ 이성적理性的 차원 : ①격물格物, ②치지致知
▶ 감성적感性的 차원 : ③성의誠意, ④정심正心
∴ ⑤ 수신修身 ( ① + ② + ③ + ④ = 내면의 완성 )
[ 2 단계: 봉사와 헌신 ]
⑥제가齊家, ⑦치국治國, ⑧평천하平天下
▶ 먼저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대해서 알아보자. 그 뜻을 해석하면 아래와 같다.
변화하는 삼라만상의 내재 규율을 탐구하여 지혜의 경지에 이르다.
▶ 공자가 제시한 '격물치지'의 방법은 '배움(學)'과 '사색(思)'이다.
▶ 동아시아의 지성인들은 전통적으로 '소리'의 공부 방법을 많이 사용했다. '배움(學)'에 있어서도 그러했거니와 '사색(思)'은 특히 '내면의 소리 듣기'라고 할 수 있다.
▶ 그러나 이른바 '내면의 소리'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들어야 하는 것인지, 막연하고 모호하다. 오늘은 구체적인 사례 설명 등으로 보충 설명을 해보겠다.
'내면의 소리'에 대한 인식은 주로 노장老莊 사상에서 비롯되었다. 아래의 기록들을 보자.
▶ 가장 큰 소리는 들리지 않는 소리다. 大音希聲。 《노자老子 41장》
▶ 도道는 소리 없는 소리다. 道無聲。《장자莊子 지북유知北遊》
소오생이 말하는 '내면의 소리'란 여기서의 ‘들리지 않는 소리(希聲)’, ‘소리 없는 소리(無聲)’를 현대 감각에 맞게 이름한 것이다. 노자와 장자는 마음으로 듣는 ‘내면의 소리’가 귀에 들리는 '현상의 소리'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말한다. 심지어 바로 그것이 '도 道'라고 주장한다.
노장 사상의 '도 道' = 내면의 소리
그렇다고 '내면의 소리'를 신비스럽게 생각할 이유는 전혀 없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듯, 귀에 들리지 않는 소리라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내면의 소리'는 막연한 상상 속의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다. 분명히 우리의 현실 속에 실재하는 소리다.
인간의 청각 인지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보통 가청 범위는 진동수 16~2만 Hz. 주파수가 지나치게 높거나 낮은 소리는 들을 수 있는 세기의 범위가 좁다. 주파수 2만 Hz를 넘는 초음파는 사람은 못 듣지만 박쥐나 돌고래는 감지感知한다. 《네이버 백과사전》 참조. 귀에 들리지 않는 소리라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다.
'내면의 소리'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1) 이미 지나간 과거 속의 그 어떤 소리, 즉 시간을 초월한 소리다. (2) 현재의 소리라 할지라도 너무 멀어서, 또는 그 소리가 너무 작아서 내 귀까지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 그 거리, 즉 공간을 초월한 소리도 '내면의 소리'가 될 수 있다.
내면의 소리 :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소리
예를 들어보자.
아래의 사진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시는가?
그렇다. 파도 소리다. 이 사진은 언제 찍었을까? 과거에 찍었다. 즉 이 사진이 지니고 있는 '내면의 소리'는 과거의 파도 소리다. 그런데 만약 이 사진을 찍던 그때 그 순간, 만약 옆에 있던 누군가 깔깔 웃었다면? 사진을 찍은 사람에게는 과거 속의 그 웃음소리도 이 사진의 '내면의 소리'가 될 수 있다.
'현상의 소리'는 나타나는 즉시 과거 속으로 사라지지만, '내면의 소리'는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그 소리를 경험에 의거하여 '현상의 소리'로 복원하면 언제든지 다시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도 소리를 들어본 직/간접 경험이 전혀 없는 중앙아시아 파미르고원에 사는 사람이라면 어떨까? 파도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가 본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으니 당연히 그 어떤 다른 소리도 들어본 적이 없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이 사진에 그 어떤 내면의 소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위의 사진에서는 또 무슨 소리가 들리시는가? 바람에 딸랑딸랑 흔들리는 풍경風磬 소리, 그리고 똑 똑 똑 똑 똑또구르르... 목탁 소리가 들리시는가? 그렇다면 과거의 언젠가 절에 가서 풍경 소리와 함께 목탁 소리를 들었던 경험이 있다는 이야기다. 최소한 그런 영화를 보았던 간접 경험이라도 있을 것이다. 그런 직간접 경험이 있는 이들에게, 이 사진에는 과거에 들었던 그 내면의 소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 사랑하는 님이 불귀의 객이 되어 그 어떤 절의 명부전을 찾았던 것이라면? 그날 자신의 내면에서 흐르던 피눈물의 통곡 소리도 들릴 수 있다. 그렇다면 그 통곡 소리 역시 이 사진의 '내면의 소리'가 된다.
소리가 너무 작아서 내 귀에 들리지 않는 '내면의 소리'도 있다. 선생님들은 교실에서 대면 수업을 할 때 표정만 보고서도 학생들이 지금 마음속으로 자기 욕을 하고 있다는 걸 금방 알아챈다.
소오생, 앞으로 나왔!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내 욕했지?
허걱, 들리지도 않았을 텐데 어떻게 알았지? 귀로는 못 들었지만 표정을 보고 마음으로 들은 것이다. 그 표정에 '내면의 소리'가 장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을 초월한 '내면의 소리'가 있는가 하면 이렇게 공간을 초월한 '내면의 소리'도 존재한다.
어떤 영화를 보면 이럴 때 그 마음속에서 중얼거리는 '내면의 소리'를 '현상의 소리'로 구현해서 관중에게 직접 들려주기도 한다. 요새 영화는 이렇듯 현대과학의 힘으로 '내면의 소리'를 완벽하게 '현상의 소리'로 재현해 낸다. 하지만 과거 무성 영화 시대에 변사辯士가 들려주던 불완전한 '현상의 소리'가 훨씬 재미있다. 너무 완벽하게 '현상의 소리'를 복원해 내면 그만큼 개개인이 상상할 공간이 줄어들지 않겠는가.
'내면의 소리'를 들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귀로 듣지 않고 마음으로 듣는다. 無聽之以耳,而聽之以心。 《장자 인간세人間世》
장자는 그런 소리는 귀로 듣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듣고 온몸으로 그냥 느끼는 거라고 말한다. 조금 막연하시죠? 그래서 《장자 제물론齊物論》에 보다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날 남곽자기가 탁자에 기대앉아 망아忘我의 경지에 들어가 하늘을 바라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 옆에 서 있던 제자 안성자유가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오늘 스승님께서 탁자에 기대앉아 계신 모습은 보통 때와는 전혀 달라 보이는데요. 육체가 고목나무처럼 보이고, 마음이란 것도 죽은 듯 사라져버린 것 같네요?”
郭子綦隱机而坐, 仰天而噓, 荅焉似喪其耦。
顔成子游立侍乎前:
"何居乎? 形固可使如槁木, 而心固可使如死灰乎? 今之隱机者, 非昔之隱机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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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곽자기가 대답했다.
“하하, 아주 좋은 질문이구나. 너는 내가 방금 망아의 경지에 들어갔던 것을 아느냐? 너는 ‘인간의 피리소리(人籟)’는 들어보았겠지만 ‘대자연의 피리소리(地籟)’는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설령 그것을 들어보았다 하더라도 ‘하늘의 피리소리(天籟)’는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안성자유가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子綦曰: "偃,不亦善乎, 而問之也! 今者吾喪我, 汝知之乎?"
"女聞人籟而未聞地籟, 女聞地籟而未聞天籟夫!"
子游曰: "敢問其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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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곽자기가 말했다.
“대지大地가 토해낸 숨을 바람이라고 한단다. 그 바람이 한 번 일어나면 온 천하의 모든 구멍이 분노하여 울부짖지. 자유야, 큰바람이 일어나는 소리를 들어보았느냐? 숲 속의 수백 아름드리 거목에 있는 코나 입이나 귀처럼 생긴 수많은 구멍... 병목이나 바리나 절구나 연못이나 구덩이처럼 생긴 그 모든 구멍에서 일어나는 그 큰 바람 소리를 들어보았느냐?"
"급류가 흐르는 소리, 화살 소리, 욕하는 소리, 호흡 소리, 고함 소리, 호곡하는 소리, 울림소리, 탄식하듯 노래하고 화답하는 그 소리를 들어보았느냐? 잔잔한 바람은 작게 화답하고, 큰바람은 크게 화답하지. 바람이 잦아들면 모든 구멍이 조용해지고 한들한들 나뭇가지만 흔들린단다. 그 모습을 본 적이 없느냐?”
子綦曰: "夫大塊噫氣, 其名爲風。 是唯無作, 作則萬竅怒呺。 而獨不聞之翏翏乎? 山林之畏佳, 大木百圍之竅穴, 似鼻, 似口, 似耳, 似枅, 似圈, 似臼, 似洼者, 似者; 激者、 謞者、 叱者、 吸者、 叫者、 譹者、 宎者、 咬者, 前者唱于而隨者唱喁。 泠風則小和, 飄風則大和, 風濟則衆竅爲虛。 而獨不見之調調, 之刀刀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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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자유가 말했다.
“스승님께서 대지의 피리소리를 인간의 피리소리에 비유하여 말씀해 주시니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피리소리란 건 또 무엇인지요?”
남곽자기가 말했다.
“바람이 서로 다른 구멍에 지나가게 되면 서로 다른 소리가 나게 마련! 서로 다른 소리가 나는 것은 그 구멍의 생긴 모습이 서로 다르기 때문 아니겠느냐? 그렇다면 앞에서 말한 이치를 잘 생각해서, 대체 누가 그 소리를 분노하여 일으키게 했는지, 그 이치를 잘 생각해 보거라.”
子游曰: "地籟則衆竅是已, 人籟比竹是已, 敢問天籟。"
子綦曰: "夫吹萬不同,而使其自已也。咸其自取,怒者誰邪?"
여기서 장자가 가르쳐주고 있는 삶의 지혜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각도에서 해석이 가능하겠다. 소오생 버전은 이러하다.
똑같은 바람일지라도 서로 다른 모양의 구멍을 지나가면 서로 다른 소리를 내게 마련.
마찬가지!
똑같은 삶의 현상일지라도 서로 다른 인간들의 서로 다른 정신과 육체에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행복과 불행, 희망과 절망 등등 인간이 느끼는 모든 현상의 본질은 결국은 하나의 것.
다만 서로 다른 크기와 모양을 지닌 인간의 마음 때문에 현상이 서로 다르게 보이는 것일 뿐.
그러니까 결론은 뭐라고? 삼라만상 모든 현상의 본질은 결국 하나.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다. 이 이야기는 어디에 수록되어 있다고? 《장자 제물론》이다. 그런데 '제물齊物'이란 무슨 뜻일까?
제齊 : 가지런하다, 나란하다
물物 : 삼라만상
그러니까 '제물'이란 삼라만상 모든 것의 본질은 결국 하나라는 이야기다.
그 말을 하려고 '소리'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남곽자기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를 ‘인간의 피리소리(人籟)’, ‘대자연에서 들려오는 피리소리(地籟)’와 ‘하늘의 피리소리(天籟)’ 등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그런데 그 성질을 잘 살펴보면 ‘인간의 피리소리’와 ‘대자연의 피리소리’는 인간이 청각 인지능력으로 들을 수 있는 ‘현상 세계의 소리’이며, ‘하늘의 피리소리’는 바로 ‘내면의 소리’를 지칭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현상의 소리 : '인간의 피리소리(人籟)’ & ‘대자연의 피리소리(地籟)’
내면의 소리 : '하늘의 피리소리(天籟)'
'하늘의 피리소리(天籟)'란 무엇일까?
동아시아의 패러다임에서 '천지인 天地人'은 흔히 '우주'와 '대자연'과 '인간세계'를 지칭한다. 그러므로 '하늘의 피리소리'란 '우주의 소리'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주宇宙'란 또 무슨 뜻일까?
천자문에는 '집 우宇', '집 주宙'라고 가르치지만, 사실 '우宇'는 '시간으로서의 집', '주宙'는 '공간으로서의 집'을 뜻한다. 그런데 '시간'과 '공간'은 사실 별개의 것이 될 수 없다. 그것 역시 본질은 하나다. 따라서 '우주'는 '시공을 초월한 세계'라는 뜻이 된다.
결론을 아래와 같이 정리해 보자.
하늘의 피리 소리 = 우주의 소리 = 시공을 초월한 내면의 소리
제자인 안성자유는 스승에게 물어본다. 그러한 내면의 소리는 어떠한 방법으로 들을 수 있는 것이냐고. 스승인 남곽자기는 대답한다. ‘인간의 피리소리’나 ‘대자연의 피리소리’가 어떻게 하여 서로 다른 소리로 울리게 되었는지, 그 이치를 잘 생각하고 그것을 근거로 하여 들어보라고 말한다.
그것은 무슨 뜻인가.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현상의 소리를 들었던 평소의 직접 또는 간접적인 청각 경험의 기억을 근거로 하여 내면의 소리를 들으라는 의미일 것이다.
예컨대 마라톤 중계방송을 본다고 하자.
마의 35km 구간, 경사진 언덕길을 달려 올라가고 있는 선수들의 일그러진 얼굴 모습이 화면에 나타난다.
그 장면을 보면서 시청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마라톤 경험이 풍부한 해설자라면? 그 화면만 보아도 심장이 파열되는 듯한 거센 숨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직접 경험을 통해 들었던 소리가 그 화면을 보는 순간, 기억에 의해 복구되는 것이다. 해설자는 화면에 담긴 그 ‘내면의 소리’를 마음으로 듣고 온몸으로 느끼면서, 마치 자기 자신이 달리는 듯, 진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 것이다.
그러나 만약 마라톤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면? TV나 영화를 통해 그 순간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들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직접 경험자만큼은 아닐지라도 그 소리를 유추하여 들으면서 함께 흥분하고 함께 감동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간접 경험마저도 전혀 없는 사람이라면?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할 게 뻔하다.
하나만 더 예를 들어보자.
아래의 사진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시는가?
그렇다. 코카콜라 병 따는 소리다.
"뽁~~~!"
음향 전문가 김벌래 선생이 1960년 의뢰를 받고 만들어서 빅히트를 친 소리다. 김벌래 선생은 콘돔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이용해 콜라 병 따는 소리를 만들어서 당시 집 한 채 값인 98만 원을 벌었단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내면의 소리'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 아닌가.
아무튼 그 소리가 하도 많이 알려져서 콜라 병을 딸 때면 누구나 자기도 모르게 머릿속에 그 소리를 복원시킨다. 어느덧 코카콜라가 지니고 있는 '내면의 소리'가 된 것이다. 그 덕택에 옥외 전광판에 등장해도 엄청난 광고 효과를 본다.
옥외 전광판의 광고는 이렇게 상당 부분 '내면의 소리'에 의존한다. 그 전광판 광고를 보는 소비자들은 보통 때 TV에서 들린 '현상의 소리'를 들었던 경험을 근거로, 전광판에 등장한 이미지의 '내면의 소리'를 뇌리에 복원해서 듣는 것이다.
'내면의 소리'는 '현상의 소리'를 들었던 평소의 직접 또는 간접적인 청각 경험의 기억을 근거로 그 소리를 뇌리에 복원하는 방식으로 듣는 것이다.
공자의 제자인 증자曾子는 하루에 세 번 자신을 돌아보았다. 이른바 '일일삼성 一日三省'이다. 이때 '성省'은 성찰한다는 뜻. 그런데 어떻게 성찰할까? 지난번 글에서 이미 말했다. 사색은 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성찰' 역시 마찬가지다. 소오생 버전으로 해석하면, '성찰'이란 하루에 세 번 자신을 돌아보며 내면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반성 反省'의 행위다.
사람들은 이 부분에서 흔히 두 가지 착각을 한다.
첫째, '반성'에 대한 착각. 사람들은 '반성'을 '죄를 뉘우치는 행위'로 생각한다. 아니다. '반성 反省'은 '돌아볼 반反', '성찰할 省', 그 어디에도 '잘못/죄'라는 뜻이 없다. 그 어떤 예단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며 깊이 성찰하는 것, 그게 '반성'의 뜻이다.
둘째, 사람들은 흔히 청각 행위를 시각 행위로 착각한다. 사람들은 우주 혹은 이 세계에 관해서 생각할 때, 그것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듯한 시각적인 모습부터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지도가 출현하고 난 후의 일이고, 우주관과 세계관의 형성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 시각이 아니라 청각이라고 한다. 월터. J.옹,《구술문화와 문자문화》112~122쪽.
방 안에서 눈을 감고 스테레오 음악을 들어보시라. 나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 된 듯한 느낌에 빠지게 된다. 소리는 나를 중심으로 하여 주변 사방에 골고루 퍼져가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모든 방향에서 한꺼번에 내 귀에 몰려 들어오기 때문이다.
밀폐된 방 안에서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며 '성찰'한다는 것 역시 시각 행위가 아니라 청각 행위인 것이다. 자기 자신이 그 어떤 행위를 했을 때 들었던 소리를 뇌리에 재생해서 들어보는 것, 그게 바로 '반성'이요 '성찰'의 의미다.
지난 과거의 행위를 '반성'하고 '성찰'할 뿐만 아니라, 역으로 미래의 행위를 예견할 수도 있다. 즉 미래에 자신이 듣게 될 소리를 미리 예측하여 들어보는 것이다. 점을 치는 행위는 짜가 도사들이 저질 권력자들에게 사기를 치는 게 아니라, 원래는 자기 수양의 한 방법이었다.
하루에 세 번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며 '내면의 소리'를 복원해서 들으면, 그 다음날 미래의 시간에 들려올 소리도 들을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하루를 예측하고, 숙달이 되면 일주일을 예측하고 한 달을 예측해 나가는 것. 그게 바로 '사색'의 힘이다.
삼라만상의 그 수많은 '내면의 소리'를 일일이 다 들을 수는 없다.
그래서 두 가지 요령이 중요하다.
첫째, 모든 일을 직접 경험할 수는 없다. 책을 통해서 간접 경험을 풍성하게 쌓아나가야 한다. 이때 반드시 낭송의 방법으로 작가의 이성과 감성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이든지 소리로 두드려봐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참 나'의 '내면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장자는 남곽자기의 입을 통해서 삼라만상, 모든 것의 본질은 하나라고 말한다. '하늘의 피리 소리'를 들으려면 먼저 ‘대자연의 피리소리’를 들어야 하고, ‘인간의 피리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다. '인간의 피리 소리'를 들으려면 먼저 나의 진실된 내면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나’라는 존재가 인간인 이상,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알게 되면 그 어떤 인간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진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이 우주와 대자연의 한 구성요소인 이상, 인간 존재의 보편적 진실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우주와 대자연의 내재원리를 깨치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내면의 소리를 듣다 보면, 어느 순간, 영혼의 눈이 열리고 마음의 귀가 열린다고 한다. 성인聖人의 경지에 이른 그런 사람들은, 그 소리를 마음으로 듣고 온몸으로 느끼며, 현상 세계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삶을 관조觀照하였던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공자가 말하는 '배움(學)'과 '사색(思)' 아닐까.
동아시아 전통의 '격물치지格物致知' 방법에는 공자의 '배움(學)'과 '사색(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마천이 제시한 '여행'이라는 방법도 있다. 다음에는 '여행'을 통해서 '지혜'를 터득해 나가는 방법론에 대해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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