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원柳宗元의 우언 <삼계三戒> 감상
오늘은 중당中唐 시대의 산문가 유종원의 우언문인 <삼계三戒>를 소개한다.
유종원柳宗元(773~819)의 자는 자후子厚, 하동河東(오늘날의 산서성山西省 영제현永濟縣) 사람이어서 유하동柳河東, 또는 마지막으로 공직에 봉사한 곳의 이름을 따서 유유주柳柳州라고도 부른다. 한유韓愈(768 ~ 824)와 함께 당나라를 대표하는 문장가로, 역대로 가장 글을 잘 쓴 당송팔대가 중의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
유종원은 어려서부터 천재 소리를 들었다. 그 당시 과거 시험의 진사과進士科 합격자 평균 연령은 쉰 살 정도. 그런데 유종원은 불과 스무 살, 약관의 나이에 붙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말을 얼마나 잘하는지 토론이 벌어지면 날카롭고 신랄한 그의 세 치 혀를 당할 사람이 없어서 단번에 중앙 정단의 핵심 인물로 떠올랐다고 한다.
서기 805년. 그러니까 유종원이 만 32세 되던 해였다. 엄청난 일이 터졌다. 당나라 제11대 황제 순종順宗 이송李誦(761~806)이 보위에 오르자마자 태자 시절의 글 스승이었던 왕숙문王叔文(753~806)을 중용하고 강력한 개혁정치를 단행했다. 후세에서 말하는 영정개혁永貞改革이다.
잠시 그 배경을 알아보자.
당나라는 제7대 황제 현종玄宗 이융기李隆基의 집권 전반기까지만 해도 전 세계 최고의 강국이었다. 중국인들이 자랑하는 이른바 '대당제국大唐帝國'의 '성당盛唐' 시대다.
당 현종 이융기(685~762)는 44년 동안 황제의 자리에 있었다. 당나라 최장 기간 재위 황제다. 27살에 황제가 되었고 53세에 양귀비를 만났다. 70세에 안녹산의 난이 터지면서 몽진 길에 분노한 군사들에게 양귀비를 내주어 죽게 한 이후로 삶의 의욕을 잃고 71세에 아들 숙종肅宗 이형李亨에게 보위를 물려준다. 그가 집권했던 전반기 30년 정도는 중국 역사상 가장 빛나던 황금시대로 이른바 '개원開元 성세盛世'라고 한다.
국가의 번영은 오랜 시간 힘들게 쌓아 올린 것이지만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30년 동안 나라를 잘 다스리면 뭘 하는가! 그가 양귀비에게 빠져 잠깐 정사를 소홀히 하자, 당나라는 곧바로 내우외환에 시달리게 된다.
(1) 외환外患: 안녹산과 사사명의 반란을 거치며 번진藩鎭(지방 군벌) 세력이 발호했다.
(2) 내우內憂:
① 오랫동안 기득권을 누려왔던 전통 권문세가權門世家와 과거제도를 통해 등장한 신흥 세력 간의 충돌.
② 환관들의 횡포. 특히 환관들이 병권을 장악했다.
특히 '내우'로 인한 병폐는 10대 황제 덕종德宗 후반기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다. 이에 순종 이송은 태자 시절부터 병폐를 뿌리 뽑고 경세치국의 위업을 이루겠다는 결심을 하고, 은밀히 장차 자신의 개혁정치를 도와줄 신하들을 찾았다. 그 첫 번째 동지가 왕숙문이었다. 그리고 왕숙문은 정의감에 불타는 젊은 관료들을 자신의 동지로 삼았으니, 그 핵심 인물이 바로 유종원이었던 것이다.
왕숙문 · 위집의 · 유우석 · 유종원 등은 새로운 황제 순종의 절대 신임 하에 충격적인 개혁 정치를 순식간에 밀어붙였다. 그들이 실행한 정책 두세 가지만 살펴보자.
(1) '궁시宮市' 제도를 폐지하고 백성들의 세금을 경감해 주었다. '궁시'란 궁정에서 사용하는 물품을 조달하는 시장을 말한다. 극히 저렴한 가격으로 백성들의 물건을 강제로 구입하는 매매 형태로 주로 환관들이 사이에서 이득을 취했다.
(2) 궁궐 내의 '교방敎坊'에서 노래와 춤을 배우던 궁녀 900여 명을 석방했다. 이 조치는 기녀 문화의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석방된 궁녀들은 장안長安의 북리北里에 집단으로 모여 살며 민간을 대상으로 노래와 춤으로 호구지책을 삼았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새로운 형태의 시가인 '사詞'가 발전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무엇보다 궁녀들의 인권을 존중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개혁의 성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일은 병권의 회수 여부였다. 순종은 범희조范希朝 등을 병마절도사로 임명하는 등, 환관 세력의 수중에 있는 병권을 회수하려 하였으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황제의 명은 끝내 제대로 이행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왕숙문 등은 황제를 만날 수가 없었다. 사이에서 환관들이 농간을 부린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황제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더니, 보위에 오른 지 불과 186일 만에 급서하고 말았던 것이다. 조선의 정조 임금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다.
유종원 산문은 1985년 국립대만대학에 제출한 소오생의 석사 논문 테마이기도 하다. (전권 265쪽. 중국어로 썼다. 한국인으로서는 본격적으로 유종원 산문을 종합적으로 다룬 최초의 논문일 것이다.) 영정 개혁이 조선에서 일어났던 사건이라면 아마도 소오생은 벌써 이를 소재로 한 역사소설 한 권을 세상에 내놓았을 것.
아무튼 왕숙문은 처형을 당하고 유종원 등 개혁파 관료들은 머나먼 밀림 속의 오지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유종원의 폄적지는 호남성 남쪽에 있는 밀림 속 오지 중의 오지인 영주永州라는 곳이었다.
33세의 젊은 유종원은 갑자기 정권의 실세가 되었다가 불과 반년 만에 대역죄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가장 조건이 열악한 영주라는 땅에서 갇혀 살게 되었다.
유종원에게 가족은 거의 없었다. 부친 유진柳鎭은 그가 과거에 급제하던 20세 때 병사했다. 세 살 연하의 아내 양씨는 그가 26세 때 시집온 지 3년 만에 병사했다. 자식도 없었고 형제도 없었다. (누이는 두 명 있다는 기록이 있지만 자세한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남은 혈육인 모친 노씨盧氏마저 아들 유종원과 함께 폄적지인 영주에 도착하자마자 여독旅毒을 이기지 못하고 병사하였다. 드넓은 천지에 사방을 돌아보아도 혈육 하나 없는, 그야말로 사고무친四顧無親 혈혈단신의 신세가 된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일세의 궁인窮人'이라며 그를 동정하기까지 했다. (송, 갈립방)
당시 영주는 울창한 밀림 속의 무덥고 습한 열대 오지여서 중원에서 살던 사람들은 견디기가 매우 어려운, 극도로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 속에서 유종원이 그나마 희망을 가졌던 것은 '양이量移' 제도였다. 당나라 때는 2, 3년마다 귀양지를 다른 곳으로 옮겨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유종원은 영주 땅에서 무려 10년 동안 귀양 생활을 한다. 벼슬은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고 급여도 거의 없는 '사마司馬'라는 한직. 함부로 말을 할 수도, 글을 쓸 수도 없었다. 정적들이 호시탐탐 더 큰 죄를 씌우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예 글을 안 쓸 수는 없는 일. 그가 채택한 글쓰기 장르는 기행문과 전기문, 그리고 우언문이었다. 우언문이야 원래가 풍자성과 교훈성을 지닌 장르지만, 그의 기행문과 전기문 역시 단순한 글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특수한 문학적 수법을 사용한 것이었지만, 그 바람에 중국 산문은 순수문학의 영역으로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당나라 최고의 산문가는 누구일까?
보통 한유와 유종원을 꼽지만, 명청 시대까지만 해도 사실상 한유를 훨씬 더 높게 평가했다. 역사책에 영정 개혁을 '권력욕에 사로잡혔던 자들의 쿠데타' 정도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유종원의 문학 평가에도 영향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 유종원의 산문은 완전히 새롭게 평가받고 있다. 한유보다 유종원을 더 높게 평가하는 추세가 형성되고 있다.
영정개혁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순종실록>이다. 송나라 때 편찬한 《구당서舊唐書》《신당서新唐書》와 《자치통감》은 모두 그 기록을 그대로 수록했다. 그런데 <순종실록>의 저자는 바로 한유였다. 한유는 유종원의 문학세계를 대단히 높게 평가했지만 정치적 입장은 완전히 달랐다.
유종원은 43세가 되어서야 유주柳州로 폄적지를 옮긴다. 유주는 영주보다도 더 남쪽에 위치했지만 조건은 훨씬 좋았다. 우선 중국인이 자랑하는 천하 명승지인 계림桂林에 버금갈 정도로 산수 풍광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고, 영주보다 훨씬 큰 고장이었다. 무엇보다 유종원은 그곳의 최고 직책인 태수로 부임했다. 비록 중앙 정단은 아니지만 자신의 정치적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는 유주에서 46세를 일기로 짧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3년 동안 최고의 선정을 베풀어, 오늘날에도 유주 사람들은 매년 그의 공덕비 앞에서 성대한 감사 축제를 벌이고 있다. 하지만 유주 시절의 유종원은 이렇다 할 작품을 남기지 못했다. 그가 중국문학을 위해 세운 엄청난 업적은 오로지 영주 시절의 피눈물 덕분이었다. 그래서 한유는 그의 묘지명에 이런 말을 남긴다.
유종원이 오랜 세월 동안 배척 당하지 않고 그 곤궁함이 극에 이르지 않았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그의 문학 재능이 남보다 뛰어났다고 하더라도, 후세에 길이 남을 오늘날의 이런 경지에 반드시 도달했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만약 유종원이 바란 대로 한때의 재상이 되었더라도, 그 양자를 맞바꾸면 무엇이 득이고 무엇이 실이 될지, 후세 사람들은 틀림없이 판별해 낼 것이다. 한유, <유자후묘지명 柳子厚墓誌銘>
子厚斥不久,窮不極,雖有出於人,其文學辭章,必不能自力以致必傳於後如今,無疑也。雖使子厚得所願,為將相於一時,以彼易此,孰得孰失,必有能辨之者。
우언寓言과 우화寓話는 조금 다르다. 우리가 잘 아는 《이솝우화》를 통해 익숙해진 '우화 Fable'라는 단어는 대부분 동물을 의인화하여 풍자성과 교훈성을 갖춘 짤막한 스토리의 문장의 한 장르다.
그에 비해 '우언 Allegory'은 우선 《장자 · 우언》에서 비롯된 동아시아 고유의 단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우언 역시 풍자성과 교훈성을 갖추고 있지만, 문장의 장르가 아니라 작품 일부에 등장하는 문학적 표현 기법을 말한다. 《장자》에 나오는 '각주구검刻舟求劍', '수주대토守株待兎' 등의 스토리가 대표적이다.
유종원의 우언문은 모두 10여 편. 자칫 필화로 더 큰 화를 입을까 우려되어 글 속에 은유와 상징으로 교묘하게 풍자하였다. 그러다 보니 초기의 우언문은 풍자성이 강하고 교훈성은 부족했지만, 점차 동물의 의인화 수법을 채택하고 풍자성 대신 교훈성을 보다 많이 부여하여 점점 원숙한 우언문이 되었다.
특히 오늘 소개하는 <삼계 三戒>는 거의 완전한 수준의 우화라고 할 수 있어, 중국 산문사에 우화라는 새로운 장르의 등장을 알리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그 풍자성과 교훈성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지만 구태여 해설하지는 않겠다. 여러 작가님 독자님들께서 마음껏 감상해 보시고 느끼신 바를 댓글로 자유롭게 이야기해 주시기 바란다.
내가 증오하는 자들이 있다. 자신의 본분도 모르고 기회를 틈타서 거들먹거리는 자. 자신의 세력을 믿고 얍삽한 재주로 타인을 괴롭히다가 진정한 강자의 분노를 야기하는 자. 시대의 흐름을 도둑질하여 제멋대로 포악한 짓을 일삼다가 끝내 재앙을 당하는 자. 나는 그런 자들을 줄곧 증오해 왔다. 마침 어떤 이가 사슴과 나귀와 쥐새끼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그자들과 비슷한 느낌인지라 <삼계>라는 글을 지어본다.
吾恒惡世之人不知推己之本,而乘物以逞,或依勢以干非其類,出技以怒強,竊時以肆暴,然卒迨於禍。有客談麋、驢、鼠三物,似其非,作《三戒》。
(기) 임강에 사는 사냥꾼이 커다란 사슴의 새끼를 잡았다. 집에서 기르려고 마음을 먹었다.
(승) 문을 들어서니 집에서 기르는 개들이 침을 흘리며 꼬리를 치켜들고 몰려들었다. 사냥꾼은 화를 내며 개들을 쫓았지만 앞으로 사슴 기를 일이 걱정되었다. 그래서 사냥꾼은 매일 사슴을 안고 가서 개들에게 자주 보여주며 공격하지 못하게 하고 조금씩 어울려 놀도록 하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개들도 모두 주인의 뜻을 따르게 되었다.
(전) 사슴은 커가면서 점점 자신의 근본이 사슴이라는 사실을 망각해 갔다. 그 개들이 진짜 자기 친구로 생각하면서 서로 같이 부딪치고 뒹굴며 나날이 친해져 갔다. 개들은 주인이 무서워 사슴에게 아주 친근하게 대했다. 하지만 시시때때로 입맛을 다시곤 했다. 그렇게 3년이 지난 어느 날, 사슴은 집 밖에 나가게 되었다. 밖에는 길목마다 개들이 아주 많이 있었다. 사슴이 좋아하며 다가가서 같이 장난을 치려고 하였다.
(결) 집 밖의 개들은 사슴의 행동을 보고 기쁘면서도 화가 났다. 모두 함께 덤벼들어 사슴을 잡아먹어 버리니 그 피가 길바닥에 낭자하게 흘렀다. 사슴은 죽으면서도 저들이 왜 자신을 잡아먹는지 알 수가 없었다.
臨江之人,畋得麋麑,畜之。入門,群犬垂涎,揚尾皆來。其人怒,怛之。自是日抱就犬,習示之,使勿動,稍使麋與之戲。積久,犬皆如人意。麋麑稍大,忘己之麋也,以為犬良我友,抵觸偃仆,益狎。犬畏主人,與之俯仰甚善,然時啖其舌。三年,麋出門外,見外犬在道甚眾,走欲與為戲。外犬見而喜且怒,共殺食之,狼籍道上。麋至死終不悟。
(기) 검주(黔州: 귀주) 땅에는 원래 당나귀가 살지 않았다. 어떤 실없는 놈이 커다란 당나귀 한 마리를 배에 싣고 들여왔다가 별로 쓸모가 없는지라 산기슭에 풀어주었다.
(승) 호랑이가 그 당나귀를 보니 몸집이 거대한 지라 신비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숲 속에서 몰래 엿보다가 조금씩 바깥으로 나와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히히힝~ 당나귀가 길게 한 번 울었다. 호랑이는 자기를 잡아먹으려는 줄 알고 깜짝 놀라 무서워하며 멀리 도망쳤다.
(전) 하지만 다시 돌아와 살펴보니 별다른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점차 당나귀 울음소리에도 익숙해져 갔다. 그래서 슬슬 당나귀 근처로 다가갔지만 여전히 덤벼들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조금씩 더 다가서고 낯이 익게 되자 과감하게 툭툭 건드려보았다. 당나귀는 노여움을 이기지 못해 호랑이를 발로 차버렸다. 그 발길질을 보자 호랑이는 너무 기뻤다. 아, 요 녀석 별 거 아니었잖아!?
(결) 어흥~ 소리를 지르며 뛰어올라 그 목을 물어 끊어버리고는 남김없이 먹어 치우고 사라져 버렸다.
오호라! 덩치가 크길래 도덕성이 있나 보다 하였구나. 목소리가 크길래 특별한 재주가 있나 보다 싶었구나. 쯧쯧. 얍삽한 그 재주를 보여주지나 않았으면 비록 호랑이가 사납더라도 의심이 많은지라 끝내 덤벼들지는 못했을 터. 오늘날 이 지경이 되었으니, 에혀... 한심한 일이로다!
黔無驢,有好事者船載以入。至則無可用,放之山下。虎見之,龐然大物也,以為神。蔽林間窺之,稍出近之,憖憖然莫相知。他日,驢一鳴,虎大駭,遠遁,以為且噬己也,甚恐。然往來視之,覺無異能者。益習其聲,又近出前後,終不敢搏。稍近益狎,蕩倚衝冒,驢不勝怒,蹄之。虎因喜,計之曰:「技止此耳!」因跳踉大闞,斷其喉,盡其肉,乃去。噫!形之龐也類有德,聲之宏也類有能。向不出其技,虎雖猛,疑畏,卒不敢取。今若是焉,悲夫!
영주 땅의 아무개는 무속巫俗에 빠져서 터부 taboo가 강했다. 특히 자기가 쥐띠 생인지라 쥐새끼들을 좋아했다. 그래서 고앙이나 개를 기르지 않았고, 하인들에게도 쥐를 잡지 못하게 하였다. 창고의 곡식과 주방 음식물들도 모두 쥐가 마음대로 먹게끔 내버려 두었다.
그리하여 쥐들은 서로서로 통지하여 모두 아무개 집으로 몰려들어 마음껏 먹어 대었으나 아무런 화를 당하지 않았다. 아무개의 집에는 어느 하나 온전한 물건이 없었고 옷장에는 성한 옷이 없었으며 음식도 대부분 쥐새끼들이 먹다 남은 찌꺼기를 먹게 되었다. 낮에는 사람들과 같이 어울려 졸졸 따라다니고, 밤에는 훔쳐먹고 물어뜯고 싸워대는 온갖 소리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개는 끝내 쥐새끼들을 싫어하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났다. 아무개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고 새로운 사람이 와서 살게 되었다. 그런데도 쥐새끼들은 여전히 예전처럼 행패를 부렸다. 새로운 주인이 말했다.
이렇게 음험한 놈들이 갖은 포악질을 부리며 제멋대로 도적질을 하다니!
어찌 이 지경이 되도록 내버려 두었을꼬!
그 즉시 고양이 대여섯 마리를 빌려왔다. 문을 잠그고 기와를 들어내어 구멍에 물을 부었다. 그리고는 일꾼을 부려 쥐새끼들을 때려잡아 일망타진하였다. 죽은 쥐새끼들은 한갓진 곳에 내다 버렸다. 그 썩는 냄새가 몇 달 이 지나고서야 사라질 정도였다.
오호라!
이 음험한 쥐새끼 무리들아!
그렇게 배불리 처먹고도 언제까지나 아무 일 없을 줄 알았더냐!
永有某氏者,畏日,拘忌特甚。以為己生歲直子,鼠,子神也。因愛鼠,不畜貓犬,禁僮勿擊鼠。倉廩庖廚,悉以恣鼠不問。由是鼠相告,皆來某氏,飽食而無禍。某氏室無完器,椸無完衣,飲食大率鼠之餘也。晝累累與人兼行,夜則竊齧鬥暴,其聲萬狀,不可以寢,終不厭。數歲,某氏徙居他州。後人來居,鼠為態如故。其人曰:「是陰類惡物也,盜暴尤甚,且何以至是乎哉!」假五六貓,闔門,撤瓦灌穴,購童羅捕之。殺鼠如丘,棄之隱處,臭數月乃已。嗚呼!彼以其飽食無禍為可恒也哉!
음험한 쥐새끼 무리들을 일망타진하자! 분노하는 새로운 주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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