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5부. 소오생의 知天命 ]
※ "나이 오십이 되면 천명天命을 알아야 한다. 五十而知天命."
《논어論語 · 위정爲政》에 나오는 공자의 이 말은 우리나라 사회에도 상당히 많이 알려져서, "지천명知天命 = 50세"는 공무원 시험에 단골로 출제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천명'을 '하늘의 명령'으로 해석하면서 굉장히 신비스럽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명命'이란 글자의 가장 큰 뜻은 '목숨'이다. 그러니까 '천명'은 '하늘이 허락해 준 수명'이라고 해석해야 옳다. 그러므로 "나이 오십이 되면 천명을 알아야 한다"라는 말은 "나이 오십 정도가 되면 하늘이 허락한 나의 수명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즉 "나이 오십이면 언제 죽음을 맞이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니까 늘 이에 대비하며 살아야 한다"라고 해석해야 타당하다.
나는 앞선 글에서 이 말을 "쉰 살부터는 덤으로 살아라"라고 조금 더 의역한 바 있다. 순전히 처절한 개인 체험에 의해 깨닫고 느낀 후에 얻은 말이었다. 앞선 글에서 말한 것처럼 나의 40대는 지옥에 떨어졌던 시기였다. 신경정신과도 다녀보고, 교회 새벽 기도에도 매달려보고, 이런저런 온갖 방법을 다 써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나를 살려준 것은 '사경 寫經'이라는 기도의 방법이었다. '사경'은 '경전 베껴쓰기'를 말한다. 인연이 닿은 남도의 어느 절에서 어떤 보살님께《법화경 法華經》을 열 번 베껴 쓰면 모든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나는 불교 신도도 아니고 불교와 별로 친숙하지도 못했지만, 아니 솔직히 거부감이 더 많았지만,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 즉시 사경을 하겠노라 말씀드렸다. 보살님이 시험 삼아 먼저 써보라며 《법화경》의 제25품品인〈관세음보살보문품 觀世音菩薩普門品〉과 두툼한 원고지 노트 한 권, 붓펜 한 자루를 내주셨다.
저녁 6시. 작은 접이식 밥상에 앉아 사경을 시작했다. 한글로 한 번, 한문으로 한 번, 번갈아가며 썼다. 무슨 까닭인지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붓펜 글씨에 눈물이 번졌고, 한 장 한 장 넘기는 종이가 눈물에 불어서 노트가 한참 두툼해졌다. 정신없이 쓰다 보니 어느새 노트 한 권이 다 떨어졌다. 시계를 보니 아침 6시였다. 깜짝 놀랐다. 12시간 동안 미동도 하지 않고 사경에만 몰두했던 나 자신이 너무나 신기했다.
그 후로 매주 주말이면 그 절을 찾아갔다. 산사의 텅 빈 법당에서 밤을 새워 사경을 했다. 얼마나 세월이 흘렀을까, 나는《법화경》을 8번 반 베껴 썼다. 끝내 10번을 채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맑은 정신과 마음의 평안함이 찾아왔다. '기도'와 '공부'에 대한 작은 깨달음도 덤으로 얻을 수 있었다.
서구식 기도는 일반적으로 언어의 힘을 많이 빌린다. 언어로 무엇인가를 간구하며 기도한다는 것은 좌뇌를 사용하는 '인식認識 세계'의 행위다. 동아시아의 전통적 기도 방법은 다르다. '언어'보다는 '반복 행동'을 통해서 '인식認識 세계'에서 벗어나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가고자 한다.
108배나 3천 배로 절을 하거나, 빗자루로 넓은 마당을 쓸거나, 잡초를 뽑거나, 경전을 베껴 쓰는 것 등이 모두 기도의 행위가 된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나 '옴마니 밤메훔' 같은 짧은 진언眞言을 일심일념一心一念으로 끝없이 되뇌면서 '무심無心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한다. 잡념으로 가득 차서 피곤하고 지쳐있는 대뇌에 휴식 시간을 부여해 주려는 것이 동아시아 기도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눈물을 흘리며 《법화경》을 베껴 쓰던 나는 점차 아무 생각도 없이 사경을 하게 되었다. 조금씩 경전 내용이 궁금해졌다. 이 단어, 저 구절은 대체 무슨 뜻일까? 중국어 경전의 이 부분을 한국어로는 왜 이렇게 번역한 거지? 애당초 산스크리트어 경전에는 어떻게 쓰여있을까? 번역 과정도 궁금했고 중국문학에서 불교 문학이 주목받지 못하는 이유도 궁금해졌다. 명색이 중국문학박사라면서 중국문화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불교문화에 대해 이렇게 무지하다니... 결국 불교에 관계된 책도 한 권 쓰게 되었다. 새로운 세상이었다.
여기 소개하는 글은 그 무렵에 쓴 기도의 결과물이다. 나는 왜 이렇게 글을 못쓸까... 글재주 없음을 한탄하며 200번 이상 고치고 또 고쳐 쓰면서, 나는 비로소 지옥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나이 오십이 되면 천명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 "나이 오십이 되면 하루하루를 덤으로 살아라"는 뜻임을 온몸으로 체득하게 되었다. 기도의 방법을 가르쳐주신 그 보살님께 합장 인사 드린다. 모지사바하.
깊은 밤입니다. 어느 고즈넉한 산사의 법당에 앉아 선배님에게 편지를 씁니다. 편지를 쓰다 말고 차 한잔을 달였습니다. 정성껏, 아주 정성껏 차를 달였습니다. 그윽하게 피어오르는 다향茶香을 오래오래 음미하노라니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는군요. 추억의 항아리에 묻어둔 지난 세월의 그리움을 조심스레 꺼내봅니다.
선배님. 싸락눈 내리는 대나무 숲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성긴 대나무 숲을 스치던 그 신비스러운 바람 소리…. 바람이 지나간 대나무 숲은 아무런 소리도 남기지 않습니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습니다.
차 한잔을 천천히 마시며, 저는 소리를 듣습니다. 싸락눈과 대나무 숲, 그리고 바람의 그 인연을 생각하며 산사에 찾아온 밤의 소리를 듣습니다. 나뭇잎을 두드리는 빗소리, 계곡 소나무 가지 사이로 무심히 지나가는 바람 소리를 듣습니다. 대나무 숲을 스쳐 지나간 그때의 그 바람소리처럼, 조용히 나타났다가 조용히 사라져 가는 자연의 소리를 듣습니다.
다시 차 한잔을 달여내었습니다. 아주 천천히 색과 향과 그 맛을 음미해 봅니다. 아, 이번에는 정말 잘 우러나왔네요! 무척이나 고운 색깔입니다. 향기도 참으로 기막히군요. 그래요, 바로 이런 느낌이었죠. 선배님의 글을 읽으면 언제나 아주 좋은 차를 마시는 것 같았습니다. 침체에 빠져 황폐해 가던 영혼에 맑은 샘물이 부어지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요?
삶에 대한 그윽한 사랑이 묻어나는 글, 언제나 생각하며 살아가는 선배님의 존재는 저에게 참으로 큰 행복이었습니다. 늘 저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고,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주시곤 하셨죠. ‘중국 문학의 대중화’가 꿈이라는 저의 이야기에, 꼭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라며 미리 어린아이처럼 기뻐해 주던 선배님…. 건강하시죠? 잘 지내시리라 믿습니다. 저는 요즈음 정말로 아주 정신없이 바쁘게 지낸답니다. 선배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더 이상 마냥 게으를 수만은 없는 노릇이기에….
알고 보니 불교와 차는 정말 깊은 관계가 있더군요. 시詩의 세계에 두보杜甫와 같은 성인聖人이 있고, 술과 낭만의 세계에 이백과 같은 신선이 있듯, 차茶의 세계에도 신선이나 성인처럼 추앙받는 분이 있었습니다. 다성茶聖, 또는 다신茶神으로 불리는 당唐 나라 때의 육우陸羽 말입니다. 그의 일생이나 그가 차 문화의 형성에 미친 엄청난 공적을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고아였던 그가 절에서 자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불교와 차의 깊은 인연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으니까요.
당나라 때 조주趙州 관음사觀音寺에서 공부하시던 고불古佛 선사의 끽다喫茶 이야기도 너무나 유명하지요. 무슨 말을 해도 언제나 똑같은 답변, “차나 한잔 마시게…” 하셨다지요? 그리하여 깨달음을 구하는 불자들의 천년 공안公案이 되었다 하니, 선사의 깊은 뜻을 어찌 헤아리겠습니까만, 불교와 차의 각별한 관계는 적어도 선배님과 나의 인연 정도는 되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다성茶聖 초의草衣 선사와 해남 두륜산 일지암 이야기, 그 외에도 스님들과 얽힌 수많은 차의 사연들…. 드디어 다선일여茶禪一如의 경지에 대해 언급이 되면, 참으로 얼굴이 붉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무얼 알겠습니까? 감히 무얼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제상諸相은 허망하지만 상相이 없는 것 또한 허망하다고 들었습니다. 산사의 깊은 밤, 홀로 차를 마시면서 생각나는 대로, 느끼는 대로, 몇 글자 낙서해 보고픈 마음일 따름입니다. 언어의 그물망에 걸려 빠져나오지 못한 채 떨리는 이 번뇌의 울림을….
차는 명상 아닐까요? 늘 깨어있는 것이지요. 각성의 세계인 것입니다. 부처와 중생은 일념一念의 차이라 배웠습니다. 일념이 어리석으면 반야의 모든 지혜가 사라지고, 일념을 깨치면 다이아몬드와 같은 찬란한 지혜가 빛을 발하니, 성불의 관건은 바로 생각 하나의 차이에 있다 하였던가요? 이 그윽한 한잔의 차에 그 일념의 절벽을 뛰어넘게 하소서….
차는 안목 같기도 하였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말입니다. 소동파蘇東坡는 <적벽부赤壁賦>에서 말했지요. 삼라만상은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서 달라지게 마련이라고. 피카소가 말했다지요? 그림은 보는 사람의 몫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분명 보는 사람의 것이죠. 그림을 올바로 감상하듯, 이 세상을 올바로 보는 안목을 배우고자 합니다. 절망과 희망, 불행과 행복, 선과 악 등등 그 모든 이분법적인 어린아이와 같은 작은 시각을 버리고 세상을 보다 폭넓게, 초월과 달관의 거시적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안목을 배우고자 합니다. 이 그윽한 다향茶香으로 마음을 추스르게 하소서. 영혼의 눈을 뜨게 하소서….
차는 합장合掌인 듯도 싶었습니다. 삶이란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신비로운 여행. 어느 순간, 운명에 의해 차단당할 때 우리는 때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지요. 그러나 길을 다시 떠나면 어디선가 불어오는 신선한 바람에 도저히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았던 그 절망도 이내 사라집니다. 새로운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우리의 여행길에 화엄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꽃비가 춤을 춥니다. 삼라만상의 아름다움에 경건히 합장하며 우주를 생각합니다….
차는 열반涅槃인 듯도 싶었습니다. 백척간두 진일보! 아찔한 절벽에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 허공으로 몸을 던지는 순간, 내가 없어지는 순간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무소유의 순간, 텅 빈 가난한 마음만이 우주에 남아있는 해탈의 세계를 엿보는 순간입니다. 아, 몇 번이나 낭떠러지에서 몸을 던져야 그 순간이 찾아올까요… 그 순간에는 정녕 백팔 번뇌가 스러질까요….
그러나 차는 명상도 아니고, 세상을 바라보는 초월의 철학적 시각도 아니고, 우주와 주파수를 함께 하는 경건한 합장도 아니고, 부처님의 해탈과 열반도 아닌 듯합니다. 차는 아마도 보살님의 미소인 것 같습니다. 이 산사에 계신 큰 보살님의 그 순박하신 미소 말입니다. 그분은 차를 안 드십니다. 아니, 못 드신답니다. 차를 마시면 잠이 안 와서 힘들다고 말씀하시며, 조금은 부끄러운 듯 허허, 소탈하게 웃으십니다.
그렇죠. 술 취한 사람, 탐욕에 잠들어있는 사람에게는 “차나 한잔 마시게”, 맑고 청량한 차 한잔이 꼭 필요하겠죠. 하지만 모든 것을 털어 버리고 빈 마음으로 지내시는 분에게 구태여 차가 필요할라구요? 부끄러운 마음으로 차나 한잔 마시면서, 차를 마시지 않는 그 보살님의 따스한 미소를 생각합니다. 그 미소를 빙그레 배워봅니다. 모지 사바하!
― 계속 ―
[표지 사진]
◎ 김민혜,〈풀의 숨결〉, 2010.
차 한잔을 마시며 성긴 대나무 숲을 스치는 바람 소리를 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