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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Nov 16. 2023

17. 차 한잔에... 편지 (3)

[ 제5부. 소오생의 知天命 ]

※ 앞에서 이어집니다.

필자의 지천명 知天命 시절 쓴 글의 세 번째 부분입니다.


※ [표지 사진] 

◎ 명明, 문징명文徵明, 〈혜산다회惠山茶會〉

"차나 한잔 마시고 가게." 앉아서 뒤늦게 도착한 벗님을 바라보며 말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차 한잔에 띄워보는 그리움의 편지 (3)


아름다운 인간관계, 당신은 누구십니까?     


선배님. 아침 공양을 마치고 다시 법당으로 돌아왔습니다. 멀리서 다가와 산사를 깨우고 있는 아침은 아직도 한 폭의 산수화입니다. 포근한 햇살이 법당 문을 열고 들어와 부처님께 조용히 합장을 드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화목한 아침입니다. 멀리 밭일을 나가시는 큰 보살님의 모습이 보이는군요. 하루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저도 이제 그만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보살님처럼 저도 일상생활로 돌아가 또다시 열심히 지내야겠습니다. 음, 그런데, 어쩐지 좀 서운하니 마지막으로 한번 더 차를 달여볼까요? 아무래도 그게 좋겠습니다. 차분하게 몇 잔 더 마시며 오늘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내일 해야 할 일은 또 무엇인지, 미리 곰곰 헤아려보는 게 좋겠습니다.


이번에는 아침 분위기와 잘 어울릴 듯싶은 상큼한 포종차包種茶를 한번 다려 볼까요? 왠지 예감이 좋군요. 차가 아주 잘 우러나올 것 같습니다… 비단처럼 부드러운 향기가 법당 안을 하나 가득 휘감아 돕니다. 아, 이 그윽한 맛이라니! 한 모금 마시니 온몸이 따스해지는 느낌! 너무 좋군요…      




오늘 오후에는 중국문학 강의가 있네요. 도연명의 전원시田園詩를 강의할 차례입니다.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꽃을 따노라니

아아, 유유자적함이여! 남산이 보이누나!

采菊東籬下, 悠然見南山.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임진자득任眞自得의 경지,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할 때 유토피아의 세계가 저절로 찾아온다는 그 시구詩句를 저는 정말 사랑합니다.

자연스럽게 가고 멈추는 대자연의 이치를 생각해 봅니다... 명明, 이재李在, 〈귀거래혜 歸去來兮〉


아, 참. 그러고 보니 학생들 몇 명이 수업 시간 전에 제 방에 찾아오기로 하였군요. 하하, 그 친구들 생각을 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옵니다. 글쎄, 지난번엔 제 연구실에 찾아왔길래 오룡차를 한 잔씩 주었거든요? 그런데 그중 한 녀석이 차는 안 마시고 한참 동안 잔만 빤히 들여다보면서 망설이잖아요. 왜 그러나, 살펴보니 잔 안에 조그만 차 잎이 하나 빠져있었습니다. 그 녀석, 그때 한 마디 하는 게 걸작이었죠. “저―, 선생님, 이 건더기도 먹는 건가요?” 하하, 얼마나 귀엽던지요! 저도 대꾸해 주었죠. "아니, 국물만 먹으렴!"




차는 평범한 우리들 생활 속의 친구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주와 주파수를 함께 하는 생명의 나무라고 해서, 명상과 사색의 철학자나 사랑과 낭만의 예술가만이 즐기는, 뭔가 특별한 사람들만의 전유물은 아니지 않겠어요? 차는 우리들의 인간관계를 도탑게 만들어주는 따스한 사랑의 메신저! 모르면 모르는 대로 즐겁고 재미있게 웃으며 살아가는 바로 우리들의 일상생활, 그 자체입니다.


선배님. 생각나시나요? 옛날 유학 시절. 기숙사에 살던 한국 유학생들과 여럿이 함께 모여서 점심을 먹으러 가곤 했지요. 중국 음식은 십여 명이 모여 먹으면 정말 맛있게 먹을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모여서 점심 식사를 하고 난 후 헤어지기 섭섭하여 제 방에 몰려들어 차 한잔 하다 보면 어느새 금방 다시 저녁 시간이 되곤 했지요. 그러면 또다시 다 함께 어울려 저녁을 먹으러 가고…. 그렇게 차와 더불어 우정을 쌓아나가던 시절이었습니다. 참으로 그리운 시간들입니다.


진리와 자유와 사랑의 ○○대학교, 제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 학교에 부임해 온 지도 십 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기쁜 일도 많았고 슬픈 일도 많았지요. 오천여 일을 헤아리는 기쁘고 슬펐던 그 세월, 정말로 단 하루도 차와 함께 하지 않았던 날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한 잔의 차와 함께 존경하는 선배 교수님들에게 지혜로운 삶의 이야기를 들으며 겸허謙虛의 예禮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동료 교수들에게서는 동명상조同明相照의 정신을, 후배 교수들에게서는 역동적인 변화, 운명을 창조하는 힘을 느끼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강의 시간에도 늘 차를 마셨지요. 차를 마시며 목을 축이고, 학생들을 가르칠 힘과 지혜를 얻었습니다. 그렇게 가르치고 배우는 가운데 온유돈후溫柔敦厚의 이치를 조금씩 깨달아나갔죠. 차와 함께 하는 인간관계, 아름다운 대동大同 사회를 향하여…. 차는 그 모든 인간관계에 화목和睦과 조화調和를 선물하는 참으로 아름다운 우리들 삶의 벗님입니다.




선배님. 이 세상의 수많은 인간관계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간관계는 무엇일까요? 저의 오랜 의문이었습니다. 많이 생각해 보았지만 아직도 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가장 근본이 되는 건 역시 부부 아니겠습니까? 가족 아니겠습니까? 선배님. 오늘 저녁에는 일찌감치 댁에 돌아가셔서 형수님과 함께 두 분만의 오붓한 다회茶會를 꾸며보심이 어떠하실지요? 제가 드린 그 다호茶壺, 아직 가지고 계시죠? 얼마 전에 보내드린 오룡차도 아끼지 말고 꺼내보세요.


혼자서 차를 마실 줄 알면 신령스러운 경지를 깨친 것이요, 둘이서 함께 차를 느낄 줄 알면 삶의 으뜸가는 정취情趣라고 들었습니다. 혼자만의 신령스러움도 좋겠지만 조화와 균형을 이룬 삶의 정취가 왠지 더욱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모쪼록 유가儒家와 불가佛家와 도가道家의 정신이 하나로 합일된 마음으로, 색과 향과 맛이 모두 지극한 조화의 경지에 이른 생명의 차를 달여내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선배님 가족의 텃밭에 사랑과 낭만, 그리고 화목과 건강이 넘쳐흐르는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의 나무를 두 분이 함께 정성껏 일구어 나가시길 기원합니다….


선배님. 화사한 장미꽃 다향茶香이 아직도 입안에서 맴돌고 있습니다. 멀리 구름 위로 사라지는 학의 청아한 울음소리가 아득하게 들리는 듯합니다. 오래도록 입안에 남아있는 이 황홀한 여운을 음미하노라니 문득 제가 너무 호사스러운 삶을 사는 건 아닌지, 반성이 되는군요…. 차의 맛은 역시 다 마시고 난 후, 돌이켜보는 이 맛인 듯싶습니다.

    



그런데…, 선배님. 궁금한 게 있습니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선배님. 당신은, 누구…, 십니까? 차 맛의 여운을 음미하듯 지난 세월을 음미해 봅니다. 싸락눈과 대나무 숲, 그리고 바람의 그 인연을 생각해 봅니다….


당신은, 생명의 에너지로 충만한 삶의 나무, 더위에 지친 나그네의 아픔을 치유하는 싱그러운 영혼의 쉼터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지난 세월, 너무나도 못난 저를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해 주신 그 모든 분일 것입니다. 너무너무 죄송합니다.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선배님. 당신은, 바로 곧 저 자신일 것입니다. 저 자신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이제라도 늘 깨어있는 명상으로 세상을 올바로 볼 수 있는 영혼의 눈을 뜰 수 있기를, 그리고 매사에 우주와 주파수를 함께 하고자 하는 간절한 정성을 배울 수 있기를, 그리하여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맺어주는 생명의 차나무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선배님. 당신은, 바로 곧 이 글을 읽어주고 계시는 당신이십니다. 음식 하나를 먹고 마시는 작은 행위 속에서도 삶의 의미와 가치를 생각해 보는,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을 지니신 독자 여러분, 바로 당신이십니다. 삶에 대한 그윽한 사랑으로 언제나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엮어나가시는 생명의 차나무, 아름다운 당신이십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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